학창 시절을 보내며/오신탁

작성자靑山 /임흥윤|작성시간25.01.28|조회수45 목록 댓글 0

(자전적 수기)

학창시절을 보내며

                      오신탁

내가 태어난 곳은 읍내에서 40리 떨어진 시골이다
중학시절, 하루 네번만 운행하는 시골이어서 학교 통학하기에는 불가능한 곳이었다
내가 사는 장정학교 7개 마을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근처 읍내에 자취방을 얻거나 하숙을 하며 학업을 해야했다.
본인도 선배들처럼 당연한듯 방을 얻어 자취를 선택했다.
그 시간들이 이루 말할 수 밖에 없는 슬픔과 아픔이 있는 시간들 이었다.
연탄가스에 취해 일어나지 못해 지각하기 일쑤였고 어떤 날은 화장실에 쓰러져 잠을 자고 있어야만 했다
마침, 주인어른이 발견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그러한 일들이 다반사였다.
그날, 9시에 정신차리고 학교에 가니 지각생이 되어 선도부 선배들의 다그침에 두손들고 있어야만 했다.
이런 우여곡절의 지각들은 연속이어서 본인도 어려움 가운데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그때는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시내가 집인 친구들은 부모님께서 해주시는 따뜻한 아침밥을 먹고 등교하지만 시골출신들은 자취하면서 피 눈물을 먹고 등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침밥을 굶고 등교하니 힘이없고 선배들의 다그침에 어떻게 이겨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할때가 많았다.
그 무렵, 본인은 A탑 교회 옆집에 살면서 저곳이 분명 교회인데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임을 늘 생각하면서 살았다.
무엇하는 곳일까? 늘 생각했었다.
자취방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A탑 교회, 여자분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곳이기에 체념하며 살기로 했다.
가끔 지나다니며 아는 선배형들의 얼굴이 보이긴 하지만 감히 먼저 나설 수 없는 처지였기에 숨숙여 지내야만 했다.
이즈음,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취방도 옮겨야 했기에 교회옆을 떠나 멀리 방을 구했다.
그곳에 와 보니 옆반 동기가 있었는데 반장 친구였다.
함께 등교하며 가깝게 지내며 하교후에는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늘 언제나 함께 공부하자며 많은 가르침을 주는 친구였다.
친구와 함께하다 보니 공부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늘 1등과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와 더불어 옆방에 살면서 공부와 연애등 스스럼 없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 둘이는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A탑 교회를 반드시 지나가야 했다. 어느날, 하교중 교회앞을 지날 무렵 익숙한 분께서 가는 길을 막아서며 말을 걸어왔다.
학생 ! 시간이 되면 이야기좀 하자 였다.
그렇지 않아도 중학시절부터 교회가 궁금했는데 잘 되었다며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정확한 시간 약속에 놀라시며 고맙다면서 이런 학생은 처음 본다며 운을 떼신다.
고맙다라는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았다. 이때가 고등학교 1학년 후반이었는데 토요일이면 본가에 가 일주일 식량과 반찬을 가져와야 했지만 약속으로 인해 시골가는 횃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교회 출석을 통해 세상이치 모르는 어린 나에게 하늘의 섭리를 들을 때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교회장님의 차분한 원리강론 서론을 들을때는 세상이치를 다 깨닫는 느낌을 받아 살아갈 희열을 맛보았다.
단짝 친구,  홍근이를 만나 친구는 반장이고 본인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등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다.
고등3년을 마치고 홍근이는 청주교육대학에 가고 본인은 교회장님의 추천하는 수택리 신학교를 선택 하게 되었다
하필 졸업식 날에 면접보러 오라는 소식이 있어 수택리를 향했지만 끝내 합격여부를 들을 수 없었다.
친구따라 교대에 갔더라면 교사의 길을 갔을텐데 뜬금없이 신학교행에 선생님도 놀라시고 친구들도 놀랬다.
소식이 없어 낙방이란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요한 목사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부모님께서 학비를 대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대강면에서 땅이 제일 많고 부자이십니다. 가능하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수학과 영어 문제는 백점이지만 왜 탈락 되었는지 지금도 궁금증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그후로 정규대학도 못가고 자존심이 상해 교화와의 발길을 일년 가까이 끊었습니다
졸업식에도 참석 못하고 아무런 추억도 간직할 수 없는 고등학교 마무리가 비참하게 느껴왔습니다.
그렇게 부모님 곁 시골에 있으며 재수를 하기로 했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께서는 저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날아드는 편지에 신앙도 다시금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6천년을 기다려 오셨다. 신탁이는 겨우 1년도 못버티냐며  디그치시십니다.
반면, 용기를 붙돋아 주셨습니다.
낮에는 부모님 일손을 도와 드리고 밤에는 재수의 공부를 해내었습니다.
그렇게 영남대학교 행정학과에 합격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함께 살던 형님은 돌연 용인 양계장을 맡아 그 해 겨울 떠나기로 해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은 형님에게 많은 실망을 안고 심각한 고민의 나날이셨습니다.
많은 땅들을 어찌 감당하실련지 경험이 없는 본인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대학을 보내 주십시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주름살을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손등을 보았습니다. 휘고 찢어진 몸골을 보면서 또 4년간의 학비로 허리를 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저를 사랑방으로 부르셨습니다.
신탁아! 네 형이 아비곁을 떠나갔다!
신탁이가 아버지와 함께 이곳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함께 살자고 눈물로 호소하십니다.
아버지의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얼른 아버지를 안아 드렸습니다
아버지!  제가 대학을 포기하고 아버지 곁에서 농사를 짓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아버지와 나는 얼싸안고 함께 한참을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9년의 소중한 농사경험이 저를 있게한 토대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대강면에서 땅부자였던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몰래 좋은 땅은 저의 명의로 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란 것을 나중에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 곁을 떠날때 얼마나 가슴아팠는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비록 아버지 곁을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했을지라도 통일교회에서 기성축복의 길로 나오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름니다. 신탁이 말이라면 모두 수긍하시고 따라주셨던 아버지, 감사할 뿐입니다.
눈물 범벅의 탕감봉행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내와 함께 제일 기쁜 날로 기억되고 기록될 것입니다
대학을 포기 했지만 하늘은 더 큰 축복을 저희 가정에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 은혜, 인연 잊지않고 지켜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되새겨 봅니다. 올바르게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셨습니다

 

                          202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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