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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효정/임흥윤 수필

작성자남궁선|작성시간26.06.19|조회수24 목록 댓글 0


(효정문예 3호 출품작) 임흥윤


120미터의 기도

임흥윤
― 한 글자씩 나를 다시 쓰다
사람은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에게 그 순간은 조용한 밤,
책상 위에 펼쳐진 경전 한 권 앞에서 찾아왔다.
처음부터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마음을 거칠게 만든다. 사소한 일에도 목소리가 높아지고,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허기가 쌓여 갔다. 무엇인가 나를 붙잡아 줄 것이 필요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경전필사‘한번 해 보자.’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쓰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요즘 세상에 손으로 책을 베껴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시대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손으로 글자를 옮기고 싶었다. 펜 끝에서 종이로 전해지는 느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한 줄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글자를 옮겨 적다 보면 금세 손목이 아파 왔다. 눈도 쉽게 피로해졌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음속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마치 흐린 물이 천천히 맑아지듯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렇게 한 줄이 두 줄이 되고, 한 페이지가 두 페이지가 되었다.
밤이 깊어도 자리를 떠나기 어려웠다. 새벽 두 시, 세 시가 되도록 글자를 옮기던 날도 많았다.
세상이 잠든 시간, 작은 전등 아래에서 나는 오로지 글자와 마주했다.
그때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글자가 나를 쓰고 있는 것일까.
필사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 날 한 권의 경전필사가 끝났다. 책장을 덮는 순간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또 다른 시작의 예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한 권이 두 권이 되고, 두 권이 세 권이 되었다. 그렇게 종이는 차곡차곡 이어졌다. 어느 날 문득 펼쳐 보니 글자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두루마리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시작된 작업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종이와 글자는 끝없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몇 미터쯤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길이는 점점 늘어났다.
마침내 길이를 재어 보니 놀라운 숫자가 나왔다.
백이십 미터.
내가 써 내려간 글자들이 그만큼 이어져 있었다.
두루마리를 말아 보니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백이십 킬로그램.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글자의 무게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인다. 그 두루마리는 결코 자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나의 부족함과 참회의 시간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나는 성격이 급했다. 사소한 일에도 목소리가 커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경전필사를 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글자를 급하게 쓸 수는 없다. 또박또박 써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마음 또한 천천히 가라앉는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요즘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경전을 필사한 것은 나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시간 동안 경전이 나를 다시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그 두루마리를 모두 펼쳐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집 안에서는 도저히 펼칠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은 공간을 찾아야 했다.
나는 다목적 운동장을 떠올렸다.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말아 놓은 두루마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에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 속에는 수많은 밤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서 천천히 두루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종이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나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며 두루마리를 펼쳤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졌다.
운동장 담벼락에 기대여 길게 흐르는 종이는 마치 하나의 강처럼 보였다. 그 위에는 내가 써 내려간 수많은 글자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시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잠들지 못했던 밤들
마음이 흔들리던 날들
그리고 다시 펜을 들었던 다짐
그 모든 시간이 그 두루마리 속에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운동장 위에 펼쳐진 두루마리는 마치 한 사람의 삶처럼 보였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길.
사람의 인생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그날 두루마리 앞에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특별한 장식도, 화려한 무대도 없었다. 다만 운동장 담벼락에 기대여 길게 펼쳐진 종이와 그 위에 적힌 글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어떤 무대보다도 뜻깊은 순간이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기록을 세상에 남겨 보면 어떨까.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다해 써 내려간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작은 꿈이 생겼다.
기네스북에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기록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기록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시간이다.
나는 이제 안다.
경전을 필사하는 동안 내 마음도 함께 쓰여 왔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펜을 든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한 글자씩
삶의 두루마리를 이어 가기 위해서.
아직도 내가 써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의 삶도 하나의 두루마리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위에 하루하루의 글자를 써 내려가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글자들이 모여
언젠가
한 사람의 삶이라는 긴 이야기가 된다.
나의 두루마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다음 글자를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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