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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기행

작성자순담|작성시간26.06.05|조회수17 목록 댓글 0

 

                                                           아리랑 기행       최 건 차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로 이어지는 가락이 내 맘속엔 깊숙이 흐르고 있다. 1950년대 초 형편이 어려운 피난 시절이라 여름 방학 때 2학기 등록금을 마련해 보려고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비켜 다녔다.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중고부라는 조선소가 봉래동에 있었다. 그곳에서 1.4 후퇴로 청학동에 생긴 피난민촌이 아리랑고개너머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난민촌을 찾아 그 고갯길를 부지런히 넘어 다녔다.

 

  지금은 한진 중공업인 그 앞 큰길 뒤편으로 시작되는 고갯길이 영도아리랑고개.우리 동네는 그곳에서 서쪽으로 더 뻗친 산자락 해안가였는데 그때는 고갈산이라고 불렀던 지금의 봉래산아래 신선동 3가였다. 겨울이면 낙동강 하류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이 살을 애일 듯이 매서웠다. 흙벽돌로 담을 쌓은 판자집에 밤이면 석유로 등을 켜고 이웃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험악한 밀수꾼이 은거한다는 태종대며 청학동 피난민촌으로 넘어 다니는 아리랑고개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1880년대 영도 태종대 앞 중리에는 조선 수군진영이 들어섰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뭍에 나가 팔려고 넘어 다녔던 고갯길이 지금의 영도아리랑고개가 생기게 된 시점이었다. 섬 앞쪽 해안에는 나라에서 쓰는 군마軍馬를 훈련시키는 국마장國馬場이 있었다. 해안가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는 말들이 어찌나 빠르던지 그 모양새가 마치 그림자가 끊어질 것처럼이었다고 해서 절영도絶影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영도影島 공식적이고 일반적인 지명이다.

 

  우리 집은 영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1959년 가을부터 삼양동 개척민이 되어 살았다.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우리 동네에서는 뒤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정릉이었다. 돈암동에 가서 전차를 타려고 정릉천에서 가재를 잡으며 그 산고개를 유유자적하며 넘어 다녔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 고갯길에서 우리나라 영화계의 선구자로 활약했던 나운규가 아리랑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원래 정릉고개로 불리고 있었는데 풍광이 좋아 고급 요정이 세워지면서 아리랑고개라는 간판을 내걸었다고 한다. 아리랑 영화도 유명해져 이 고개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돈암동아리랑고개라 부르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 도로명이 개편되어 서울 시내의 전체 도로명이 대로大路나 로, 길인데, 이 고갯길만은 아리랑고개로 유지되고 있다.

 

  나는 아리랑고개와 아리랑 가락이 있는 곳의 산을 등반하고 주변을 살피고 있다. 영남의 알프스라는 높은 산들과 애상哀想한 아리랑의 고장 밀양으로 마음이 쏠려 탐방하러 나섰다.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이 못된 관노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사연이 담긴밀양아리랑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지난 2012년 어느 한겨울 밀양으로 달려가 이른 아침 물안개가 드리우는 영남루를 둘러보고 표충사로 가는 버스에 올라 천황산과 재약산을 등반했다. 다음 해의 이른 봄에는 가지산과 운문산을 오르려고 내려가 일박하면서 밀양의 명소를 두루 살피고 밀양아리랑을 되새겨 보았다.

 

  2017년 가을에는 역시 아리랑 가락이 흐르고 있는 진도에 가보았다. 먼저 기암절벽이 대단하다고 알려진 암릉의 동석산을 등반했는데 암반으로 절묘하게 이루어진 엄청난 산이었다. 등반을 끝내고 해가 저무는 시간대라 석양의 풍광이 그윽하다는 세방낙조대로 가면서 진도아리랑의 흔적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이제 막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있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진도아리랑 가락을 떠올려 본다. 이 지방에서는 아리랑타령이라고 하는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라는 가락을 상고하면서 단체산행이라 페키지로 온 탓에 아쉬움을 안고 진도를 떠났다.

 

  또 이번에는 아리랑의 기원지로 여겨지는 정선에 가볼 참이다. 먼저 정선 일대의 높은 산들을 섭렵하려고 한여름 가리왕산을 오르려 했다. 정선에서 나고 자란 지인께서 그 산은 깊고 숲이 울창하여 곰이 살고 나무 사이를 나르는 무서운 뱀이 있다고 하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채양 넓은 모자를 쓰고 나 홀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열대의 원시림 같은 정글을 헤집고 정상에 올랐다가 무사히 하산했다. 그다음은 노추산을 한겨울에는 함백산백운산을 올랐다. 봄에는 화암동굴을 탐방하고, 문학기행 때 읍내 공연장에서 오페라 정선아리랑를 관람하게 되었다.

 

  정선에는 이성계에 의해 패망한 고려의 유민들이 숨어들어 한을 토하고 있었다. 정선 출신의 연기자들이 눈물겹게 연출하는 모습이 가슴 아프게 아리랑 가락으로 와 닿았다. 날을 다시 잡아 아리랑의 흔적이 보존되어있는 아우라지를 찾았는데 여기에서도 가슴 저린 사연이 애절하게 간직되고 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처녀를 사랑하는 나무꾼 총각이 경복궁을 지을 뗏목을 타고 흘러가다가 뗏목이 뒤집혀 죽었다. 처녀는 돌아오지 않은 임을 그리며 그 강가를 서성인다. 두 연인의 석상이 서로 마주 바라보이는 강가에 세워져 있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적셔주고 있다.

 

  아리랑은 개성을 떠나 정선에 사는 이들이 고려왕을 사모하고 그리는 노래였다. 아우라지의 애상哀喪이 더해져서 애절한 사랑의 아이콘인 정선아리랑이 되었다. 전국에 있는 여러 아리랑고개에 얽힌 내력과 각색의 아리랑 가락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며 정과 그리움의 대서사시다. 수년 전 미국에서 각국의 유명 민요 경연대회가 열려 우리 아리랑이 세계 최우수 민요로 선정되어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청량리로 가는 열차에 오를 시간이 되어 정선아리랑 기행을 일단 접고 아우라지를 떠났다. 2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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