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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안주씨

작성자주재갑|작성시간07.04.06|조회수1,699 목록 댓글 0

신안 주(朱)씨

 

 

1> 시조 :  주 잠[朱 潛]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신안은 중국 중앙부, 양자강 하류 및 회하 유역의 안휘성 휘주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新安 - 중국 하남성 신안현)
 
     신안주씨는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인 주잠(朱 潛)이 고려 고종때 동래하여
     나주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그를 동래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잠은 주자(朱子 : 본명은 희, 성리학을 대성한 남송의 유학자)의 증손으로 송나라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여경(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금성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원나라에서 송의 유민을 압송하려 했을 때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성 고정리에 은거하였다가 여러 곳으로 이거하여 지명에 따라 따로 본관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 나주, 능성 등 45개 파로 갈리었다.
 
     1902년(고종 39, 광무 6) 의정부 찬정 석면(錫冕)의 상소로 선조의 본향인 신안을 본관으로
     복관하게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주씨의 본관은 신안, 나주, 능성, 웅천, 공주, 전주, 압해 등
     무려 107본까지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신안주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잠의 아들 여경(餘慶)이 고려 고종때 은사과(恩賜科)에 올랐고,
     여경의 아들 열(悅)은 원종때 병부낭중으로 충청·경상·전라도의 안찰사로 크게 치적을

     올렸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생활이 검소하여 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뒤에 한림학사, 판도판서 등을 지냈고 충렬왕 때는 지도첨의부사에 이르러 능성군에 봉해졌다.
 
     열의 아들 인장(印長), 인원(印遠), 인환(印還) 3형제는 널리 이름을 떨쳐 신안주씨 가문을
     중흥시켰는데, 맏아들 인장은 예부상서를 지냈고,  둘째 인원은 경상도 안렴사를

     역임하였으며,  셋째 인환은 첨의부사를  지냈다.
    
     조선조에서 약관도 못되어서 향시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택정(宅正)
     우암 송시열이 덕원에 유배되어 오자 그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고, 1679년 식년문과에 올라
     성균관 학유, 이성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몽룡(夢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군수로 의병장 강덕룡·정기룡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 싸움에서 용전, 왜군을 격파하여 3룡으로  불렀다.
     그외 중종 때  전적을 지낸 양우(良佑)와 선조때 군수를 역임한 덕원(德元)의 부자가 유명했고,
     정은  숙종때 개성 교수를 역임하여 경원부사 표(杓)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32대손이면 中, 奎자 항렬입니다..

-'주잠'은 신안주씨 시조의 함자이고 '청계'는 그분의 아호입니다..

-주잠청계공파란 파명이 아니라 다른 주씨와 구별하기 위해 신안주씨 후손들에게 일러준 시조의 함자와 아호입니다.

 

                                                                                                                                    

 

초계주씨세보중간서

유아주씨는 조자황제헌원으로 주씨왕실에 예락문물과 전장법도를 융흥발전하야 사해만방에 종주국이러니
중국수망에 이주위성하고 당장종시에 유한림학사휘황이 오계지란을 피하야 동국으로 오시어 교남땅 즉
경상남도 합천군초계면에 정착후손이 초계로 위관하고 월기세하야 유휘세후하니 예부삼서로 고려현종조에
계단지란을당하야 호종유공함으로서 총탁하야봉팔계백하니 팔계는 초계읍 지구호야라 그후예가 분적하야
상주장흥삼계함안안의육파가 유하니 유초계가 동방주씨의 본원이오 종통임을 분명히 자손만대에 알려드립니다...

 

초계 주씨(草溪周氏)
초계는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초팔혜현인데, 경덕왕 때 팔
계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 : 합천)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때는 초계로 하였고 1018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 때 감무를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초계주씨의 시조 주 황(周 璜)은 주나라 왕손의 후예로서 당조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907년(신라 효공왕 11) 오계의 난을 만나자 동래하여 교남 초계부에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초계(草溪)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황의 아들 흥인(興寅)이 통일신라의 효공왕 때
집사성대사(執事省大舍)에 올랐으며 시중(侍中)을 거쳐 아간(阿干)에 이르러, 고려 목종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손자 빈(斌)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초계 주씨는 황(璜)의 6세손 세후가 고려 선종 때 임원후등과 함께 황급탑과 국청사를 창건하고「오복상피식」을 개정하는 등 하례식의 예법도를 개정하는데 중신들과 합모하여 크게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아들 지(砥 : 보문각 대제학을 지냄)와 절의 형제 후손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문의 융성을 누렸다. 조선조에 와서는 검교장군 치(稚)의 아들 원의(原義)가 도적을 토벌하여 왕으로부터 상방검을 하사받았으며, 개국원종익대이등공신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라 팔계군에 봉해졌고, 상창(尙昌)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여 중종 때의 원종공신으로 금성군에 봉해진 후손 세흥(世興)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 외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명신과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몽득(夢得)이 뛰어났고, 공주 판관(公州判官)을 역임한 명흠(命欽), 공조 참의(工曹參議) 경손(敬孫), 공조 참판(工曹參判) 만량(萬良) 등이 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26(錫석) 27(淳순) 28(采채) 29(應응) 30(載재) 31(鍾종) 32(永영) 33(植식 林임) 34(찬 炳병) 35(培배 圭규) 36(鉉현 鏞용) 37(溶용 源원) 38(相상 東동) 39(熙희 憲헌) 40(基기 時시)
---->
http://www.saju2000.co.kr/name/sung_ja_ju1_4.htm

 

 

주황의 6세손 주세후는 상주주씨의 분파인 안의주씨의 시조가 됨. 세후의 아들 경(璟)은 여말의 충신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인 진주목 단성현(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 문익점(처남)의 집에 얹혀 살다가 독립하여 단성현 등광마을(현 산청군 신안면 외고리 등광)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산소에 초옥을 짓고 3년상을 지냈죠. 저의 본가가 바로 판서 주경이 살았던 집터이구요. 마을앞 100여미터 근처에는 정문이 있던 곳이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초등학교때까진 비각이 그대로 있었죠. 여지승람 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단성현에 고려효자 주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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