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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천년의 미소

작성자정기열|작성시간10.06.14|조회수159 목록 댓글 0

문화재 칼럼 - 신라문화유산해설사  정기열


신라천년의 미소

  경주 여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담장이나 광고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 신라천년의 미소(媚笑)라는 그림이다[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수장 기록을 보면

경주; 1564,       명칭; 人面文瓦當(인면문와당),   물질; 土(토)

시대; 古新羅時代(고신라시대),

收藏緣由(수장연유); 出所 경주시 沙正洞 興輪寺址

                    (기증자) 日本國福岡縣北九州市八番地 折尾町

                            일본국 후쿠오까현 기다규슈시 8번지

                            田中敏信(다나카 도시노부)

形狀大小(형상대소); 現徑(현경)  11.5cm,  復元徑(복원경)  14.0cm,

構造特徵(구조특징); 人面文瓦當(인면문와당)으로 女性的인 미소의 表現이 잘 조각  되였으며 대단히 强한 浮彫(부조)를 띄움, 一部破損(파손) 되었으나 전체 모습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음.

備考(비고); 사진번호 374→1-63

    ※기록의 한문자를 원본대로 쓰고 한글은 괄호 안에 넣었음.


    신라천년의 미소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36년 경주에서 개업한 일본인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씨가 경주시 사정동에 환자가 있어 왕진(往診)을 갔다가 환자를 진료를 하고 그 집에서 [인면문와당]을 보고 다나카씨가 취득(取得) 했는데 값(대가)을 지불했다는 말과, 진료비를 받지 않고 대신했다는 말이 있으나 어느것도 확실치 않아 대가 지불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후 광복이 되어 다나카씨는 일본 오사카(大坂)로 돌아가고, 광복당시 경주박물관장 일본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1938~1945년 재직)씨가 귀환하면서 후임 박일훈(朴日薰)씨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일본에 돌아갔다. 박일훈씨는 경주박물관장에 취임한(1963~1973년11월) 후 일본 오사카에 다나카씨를 찾아가 기와편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계속 교섭을 한 결과 1972년 10월 14일 다나카 도시노부 부부가 직접 경주박물관을 방문하여 기증하였다. 그때 기증식한 사진을 필자는 찾고 있는 중에 있다. 사진을 찾을 가능성은 있으니 찾으면 같이 즐깁시다.

   또한 문제는 출토지가 사정동 흥륜사지라고 했는데 지금 학계에서는 흥륜사지를 영묘사지(靈廟寺址)라 보는 설(說)이 제기 되고 있다. 1972년 2월 1일에 전 경주문화원장을 지내신 김태중 선생님이 사정동 흥륜사지(興輪寺址)에서 [영묘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을 발견하여 수습했다. [사진]


  ⇧ 영묘지사(靈廟之寺) 명문 기와편.   ⇧ 전흥륜사 사정동 1976.2.1 김태중 4-2

 

신라천년의 미소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기와공장에서 수막새 문양을 찍어 내는데 도공이 수작업(手作業)으로 하나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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