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단[ 權 ]
권단(權)1)은 자가 회지(晦之)로 추밀부사(樞密副使) 권수평(權守平)의 손자다. 한때 은둔할 뜻을 가졌지만 부친인 한림학사(翰林學士) 권위(權韙)가 강하게 만류하면서 가산을 기울여 비용을 대어 문하녹사(門下錄事)로 임명하도록 조정에 청탁을 넣었으므로 권단은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아갔다. 재상 유경(柳璥)이 “그대는 학문을 닦았으니 서리로 있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며 과거에 응시하게 하니 과연 급제2)하였다.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승진해 예주(禮州 :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승주(昇州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맹주(孟州 :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개주(价州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 개천) 등 네 주의 부사(副使)로 나갔는데, 이때부터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모두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업무에 밝다는 칭송을 받았다.
동경에는 옛부터 창고 하나가 있었는데 백성들로부터 능라(綾羅)를 거두어들여 저장하는 곳으로 갑방(甲坊)3)이라 불렀다. 조정에 공물로 바치고도 남는 것이 매우 많아 유수는 그것으로 개인의 사복을 채우곤 했다.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부임한 권단은 갑방을 철폐하고 1년 동안 거두어들인 것을 3년 동안의 공물로 나누어 지출하였다. 사호(司戶)4) 가운데 백성의 조세를 도적질하는 자가 있으면 뜰에서 그 자의 머리통을 부숴버리니 보는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충렬왕 초에 내직으로 불러들여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임명하였다. 살고 있던 동네에 불이 나서 1천여 가구가 다 타 버렸는데, 그 가운데 권단의 집만 온전하니 사람들은 백성을 아낀데 대한 보답이라고들 말했다.
3도를 안찰할 당시 문서를 보내면서 영판(鈴板)5)만 사용하고 한 명의 향리도 보내지 않았으나 그 명령들이 모두 제대로 시행되었다. 경상도 안찰사로 있을 때 진주 부사(晋州副使) 백현석(白玄錫)6)이 채 부임하지도 않았으면서 고을 향리들이 가지고 온 은폐(銀幣)를 먼저 써 버렸으며, 부임한 후에는 여러 차례 어의(御衣)에 쓸 능라사(綾羅絲)의 값을 거두어 개인적으로 착복했다. 또 보주부사(甫州副使) 장전(張悛)은 집이 단산현(丹山縣 :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에 있어서 보주(甫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와 가까웠기 때문에 보주의 백성들을 보내어 자기 밭을 갈고 김을 매게 했다. 권단이 그들을 모두 탄핵했는데 장전은 장원 급제했던 자였고, 백현석은 성랑(省郞)을 지낸 자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명예를 더럽혔으므로 사림들이 치욕으로 여겼다.
국자좨주(國子祭酒)·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있을 때 진주(晋州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수령 최참(崔旵)7)이 공물로 바친 능라(綾羅)의 질이 좋지 않자 왕이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고을의 향리들이 그 당시 안렴사로 있던 권단이 실 값을 깎아버렸기 때문이라고 공술했으므로 권단은 최참과 함께 파직당했다. 재상들은 “권단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고치고도 파직되었으니 이제 누가 백성을 걱정하겠는가?”고 탄식했다. 곧이어 복직되어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 옮겨서는 과거를 주관해8) 이름난 선비를 많이 선발했다. 권한공(權漢功)·김원상(金元祥)·최성지(崔誠之)·채홍철(蔡洪哲)·백이정(白頤正)은 뒤에 모두 명망있는 재상이 되었다.
권단은 지조가 굳어서 권세가들에게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기에 3품으로 임명된 이후로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했다. 오랜 뒤에야 승지(承旨)로 임명되었고 다시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했으나, 은퇴를 간곡히 요청했으므로 지첨의부사(知僉議府使)로서 벼슬을 마치게 한 후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올려 은퇴하게 했다. 충선왕 3년(1311)에 죽으니 여든네 살이었다.
성품이 청렴 겸손했고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40년 동안 냄새나는 채소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 자손들이 절후에 맞추어 새 옷을 드리면 반드시 예전에 입던 옷을 벗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므로 궤 속에는 늘 여벌옷이 없었다. 스스로 몽암거사(夢菴居士)라고 자호했다.
중국 강남(江南)의 승려 소경(紹瓊)9)이 바다를 건너 고려로 오자 권단은 출가해 그를 스승으로 섬기려고 하였으나 아들 권보(權溥)가 막을까봐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권보가 없는 틈을 타서 선흥사(禪興社)10)로 숨어 들어가 머리를 깎으니 권보가 와서 대성통곡했지만, “내 수염과 머리를 다시 붙이려느냐? 이것이 나의 본뜻이다.”라며 돌아가지 않았다. 병이 들자 가부좌(跏趺坐)를 튼 채로 세상을 떠났다. 손자 권준(權準)이 왕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특별히 권단에게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각주
1 권단(1228~1311) :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종 때 장단현위(長湍縣尉)·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 등을 지내다가 과거에 급제한 후 충렬왕 때까지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밀직제학을 거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찬성사로 벼슬을 마쳤다.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낸 교하 노씨 노연(盧演)의 딸 한국대부인(韓國大夫人)과 결혼하여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한 권보(權溥)를 낳았다. 이 가계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02, 열전15, 권수평전(權守平傳) 참조.
김용선 편, 「권단(權)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2 급제 : 고종 41년(1254) 6월 지공거 조수(趙脩)와 동지공거 윤극민(尹克敏)이 주관한 과거에 권단(權)이 윤정형(尹正衡)·최서(崔瑞) 등과 함께 급제한 사실을 말한다.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17·437~444쪽.
3 갑방 : 백성들에게 능라(綾羅)를 수탈하여 저장한 경주(慶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지역의 창고이다. 갑방은 대개 지방 관청의 수요보다 중앙 관청의 수요를 위한 가죽 제품이나 능라비단을 짜는 지방 관청 수공업장이었다. 그런데 경주의 갑방은 고려후기에 금기(金器)능라 등의 생산기구가 아니라 중앙의 수요에 납부하는 능라 등의 공물을 백성들에게 수취하여 보관하는 장소로 변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기에 지방 관청수공업이 쇠퇴하고 민간수공업이 성장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홍희유, 『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 지양사, 1989, 92쪽.
서명희, 「수공업」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93, 421~422쪽.
김동철, 「수공업과 염업」 『한국사』 19, 국사편찬위원회, 1996, 350~351쪽.
4 사호 : 고려시대 지방 향리들의 관청 가운데 한 부서이며, 성종 2년(983) 향리직을 고치면서 나말여초 이래 호족의 관반(官班)조직이었던 호부(戶部)를 사호(司戶)로 개칭하였다. 사호에는 호정(戶正)·부호정(副戶正)·사(史)라는 향직이 있었는데, 이들 향직은 그 지역의 토착세력이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그 정원은 인구의 크기에 따라 달랐다. 그 임무는 토지·인구를 파악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전세(田稅)·공물·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金鍾國, 「高麗時代の鄕吏について」 『朝鮮學報』 25, 1962.
武田幸男, 「高麗·朝鮮初期の邑吏田」 『朝鮮學報』 39·40, 1966.
박경자, 「고려향리제도의 성립」 『역사학보』 63, 1974.
김광수, 「나말려초의 호족과 관반」 『한국사연구』 23, 1979.
이훈상, 「고려중기 향리제도에 대한 일고찰」 『동아연구』 5, 1985.
5 영판 : 우편물을 전달하여 돌려보는 문서라는 뜻이다. 영(鈴)은 고려의 역참제(驛站制)에 있어 공문서를 담는 포대에 다는 것으로 용건의 완급에 따라 다는 방울의 수가 달랐다. 삼급(三急 : 지급)의 경우에는 세 개의 방울을, 이급(二急 : 보통)의 경우에는 두 개의 방울을, 일급(一急 : 평상)에는 한 개의 방울을 달아 표시하였다. 영판의 판(板)은 독(牘) 또는 문적(文籍)의 뜻으로 쓰인다. 한편 묘지명에서는 가죽과 뿔[皮角]로 싸서 알렸다고 하였다.
김용선 편, 「권단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6 백현석(?~?) : 원종~충렬왕 때 우사간(右司諫)·진주부사(晋州副使)를 역임한 문신관료이다. 원종 10년(1269) 7월에는 김경(金鏡)과 서로 잘 지낸다는 이유로, 임연(林衍)이 추대한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에 의해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7 최참(?~?) : 충렬왕~충선왕 때 진주목부사(晉州牧副使)·문한학사승지(文翰學士承旨)·사림 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형조상서·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 등을 역임한 문신관료이다. 충렬왕 5년(1279) 6월에는 권단(權)과 함께 파면되었다가 뒤에 복직하였으며, 충선왕 즉위년(1298) 정원에는 박전지(朴全之)과 같이 즉위교서를 지었고, 4월에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김승(金昇)과 함께 전선(銓選 : 관리의 전형 선발)을 맡았다.
8 주관해 : 권단은 충렬왕 10년(1284) 10월에 동지공거로서 지공거 김주정(金周鼎)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조선열(趙宣烈)·최성지(崔誠之)·채홍철(蔡洪哲)·권한공(權漢功)·김원상(金元祥)·백이정(白頤正) 등을 선발하였다.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17·437~444쪽.
9 소경 : 충렬왕 30년(1304)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의 초청으로 고려에 왔다가 3년 동안 머물렀던 남송(南宋)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의 철산화상(鐵山和尙)을 말한다. 소경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04, 열전17, 한희유전(韓希愈傳) 참조.
10 선흥사 : 고려시대 개성부(開城府 : 지금의 개성직할시)의 송림현(松林縣)에 있던 선종(禪宗) 계열의 사원이다. 충숙왕이 신하들과 함께 행차하였으며, 충숙왕 17년(1330)에는 관직에서 물러난 방신우(方臣祐)가 사원을 화려하게 수축하였다. 조선 태종은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에게 선흥사의 탑을 개경사(開慶寺)로 옮기게 하였다. 한편 이 사원에 출가한 권단(權)은 도호(道號)를 야운(野雲)이라 하였다.
『고려사』 권35, 충숙왕 7년 5월 을묘 및 권122, 열전35, 환자, 방신우전(方臣祐傳).
『태종실록』 권19, 10년 4월 갑진.
김용선 편, 「권단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權㫜, 字晦之, 樞密副使 守平之孫. 嘗有遯世志, 父翰林學士 韙强留之, 請於朝, 爲門下錄事, 傾家貲供其費, 㫜不得已就職. 宰相 柳璥謂曰, “子有文學, 不宜爲吏.” 令赴擧, 果中第. 遷閤門祗候, 出爲禮·昇·孟·价四州副使. 自是, 揚歷中外, 皆以廉勤精明稱. 留守東京, 舊有一庫, 賦民綾羅貯之, 名甲坊. 充貢獻, 贏餘甚多, 皆爲留守所私. 㫜撤甲坊, 以一年所收, 支三年貢. 司戶有盜民租者, 碎其腦于庭, 觀者股栗. 忠烈初, 徵拜典理摠郞. 所居里火延燒千餘家, 㫜家在其中獨完, 人以爲愛民之報.
嘗按三道, 行文書, 但用鈴板, 未嘗發一吏, 令行禁止. 其按慶尙也, 晉州副使 白玄錫未之任, 先用州吏所賫銀幣, 到官重斂御衣對綾羅絲價, 私用之. 甫州副使 張悛, 家在丹山與州近, 遣州人耕耨其田. 㫜並劾之, 悛壯元及第, 玄錫曾爲省郞, 同受汚名, 士林恥之. 轉國子祭酒·左司議大夫, 晉州守 崔旵所貢綾羅麤, 王命考問. 邑吏以㫜爲按廉, 減折絲價對, 與旵並罷. 宰相言, “㫜爲民革弊而罷, 孰有憂民者?” 尋復其職, 遷判衛尉寺事, 掌試取士, 多知名士, 權漢功·金元祥·崔誠之·蔡洪哲·白頤正, 後皆爲名相.
㫜耿介不苟合, 自除三品, 十年不遷. 久之乃拜承旨, 陞密直提學, 乞退甚篤, 以知僉議府事致仕, 後加贊成事致仕. 忠宣三年卒, 年八十四. 性淸儉謙遜, 酷信浮屠, 斷葷肉四十年. 子孫以時獻新衣, 則必解舊所服, 以與貧乏, 篋中常無餘衣. 自號夢菴居士. 江南僧紹瓊, 泛海而至, 㫜欲出家師事之, 恐爲子溥所沮未果. 會溥不在, 遁入禪興社剃髮, 溥馳至大哭, 㫜曰, “將復鬚髮我耶? 此予素志也.” 得疾, 趺坐而逝. 孫準有寵於王, 特謚文淸.
권단(權㫜) 부 권보(權溥)
권보(權溥)1)는 자가 제만(齊滿)이며 처음 이름은 권영(權永)이다. 충렬왕 5년(1279), 나이 열여덟으로 과거에 급제2)했으며, 이듬해에 다시 전시(殿試)에 급제한 후 거듭 승진해 첨의사인(僉議舍人)이 되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올라 사림원(詞林院)3)을 설치하자 권보는 박전지(朴全之) 등과 함께 학사가 되었는데, 총애가 비할 데 없었다. 곧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복위하자 권보 및 조간(趙簡)·김태현(金台鉉)·김우(金祐)4)에게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맡겼다. 밀직학사(密直學士)로 승진하고 여러 번 옮겨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하자 그를 찬성사(贊成事)·판총부사(判摠部事)로 임명하고 7품 이하의 무관을 선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충숙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판총부사(判摠部事)로 임명하고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올렸으며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또한 정동행성원외낭중(征東行省員外郞中)·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을 지내기도 했다.
권보는 성품이 충직하고 효성스러웠으며 친인척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동료와 벗들과는 화목하였다. 독서를 즐겨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5)의 간행을 건의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은 권보로부터 시작6)되었다. 『은대집(銀臺集)』 20권7)을 주석하였으며, 아들 권준(權準)과 함께 역대의 효자(孝子) 예순네 명에 관한 기록을 모아 사위인 이제현(李齊賢)에게 찬(贊)을 짓게 한 다음 『효행록(孝行錄)』8)이라고 이름짓고 간행하였다. 성품이 모나지는[圭角9)] 않았으나 오랫동안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맡으면서 벼슬을 팔아 가산을10) 늘리니 당시 사람들이 “그 부친 권단의 청렴과 비교해 현격한 차이가 난다.”고들 말했다.
아들 권고(權皐)·권후(權煦)·권겸(權謙)과 사위 이제현(李齊賢), 또 다른 사위인 종실(宗室) 왕숙(王璹)·왕순(王珣)은 모두 군(君)으로 봉해졌다. 아들 종정(宗頂)은 승려이면서도 광복군(廣福君)으로 봉해지니 세상 사람들은 한 집안에 아홉 명이 군(君)에 봉해졌다고들 했다. 권보는 재상을 지내다 늙어서 물러났는데, 권준이 문하생을 거느리고 축수하니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충목왕 2년(1346), 여든다섯 살에 병이 들자 주변 사람들에게 부축하게 한 후 단정히 앉아서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왕후(王煦)와 권겸(權謙)은 따로 전기가 있다.
각주
1 권보(1262~1346) : 초명은 권영(權永)인데 권보로 고치면서 아울러 자도 기경(耆卿)에서 제만(齊滿)으로 고쳤다. 호는 국재(菊齋)이며, 작(爵)은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이다. 충렬왕 5년(1278) 과거에 급제한 후 국자학유(國子學諭)·첨의사인(僉議舍人)·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판총부사(判摠部事) 등을 역임했다. 충선왕 즉위년(1298) 왕이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고 개혁을 시도할 때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과 함께 4학사의 일원으로 왕의 자문을 맡았다. 충렬왕 27년(1301) 5월에는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조간(趙簡)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민상정(閔祥正)·노승관(盧承綰)·박원계(朴元桂)·이제현(李齊賢)·전신(全信)·왕백(王伯) 등을 선발하였다. 민지(閔漬)를 도와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를 편찬하였으며,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케 하여 성리학의 전파에 크게 힘썼다. 또 『은대집(銀臺集)』 20권을 주석했으며, 아들 권준(權準) 및 사위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역대 효자 64명의 행적을 기린 『효행록(孝行錄)』을 편찬하였다. 한편 권보(權溥)는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낸 문화 유씨 유승(柳陞)의 맏딸 변한국태부인(卞韓國太夫人)과 결혼하여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 문화군(文化君) 권고(權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大君) 권재(權載)·王煦,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 권겸(權謙)과 조계종(曹溪宗)에 출가하여 양가도총섭(兩街都摠攝)·대선사(大禪師)가 된 승려 종정(宗頂)을 낳았다. 또 맏딸은 대언(代言) 안유충(安惟忠)에게, 둘째 딸은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에게, 셋째 딸은 순정대군(順正大君) 왕숙(王璹)에게, 넷째 딸은 회안대군(淮安大君) 왕순(王珣)에게 각각 시집갔다. 아들과 사위 모두가 봉군되어 9봉군집이라고 한다. 권보의 내·외 손자와 증손도 백여명에 이르렀다.
김용선 편, 「이제현 처 권씨(李齊賢妻權氏) 묘지명」·「권보(權溥) 묘지명」·「권보 처 유씨(權溥妻柳氏)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46~447쪽.
2 급제 : 충렬왕 2년(1276) 8월 주열(朱悅)이 주관한 국자시(國子試)에 권보(權溥)가 이지환(李之桓)·이록(李祿) 등과 함께 급제한 후 같은 왕 5년 6월 지공거 박항(朴恒)과 동지공거 곽여필(郭汝弼)이 주관한 과거에 조간(趙簡)·김순(金恂)·이세기(李世基)·이진(李瑱)·한사기(韓謝奇)·오잠(吳潛) 등과 함께 급제한 사실을 말한다. 또한 같은 왕 6년 5월에는 조간·이세기·이진·오잠·김태현(金台鉉)과 함께 전시(殿試)에 급제했다. 같은 왕 27년(1301) 5월에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조간(趙簡)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노승관(盧承綰)·박원계(朴元桂)·이제현(李齊賢)·전신(全信)·민상정(閔祥正)·왕백(王伯) 등을 선발하였다.
『고려사』 권74, 선거지, 과목, 국자시 액수.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35~436·446~447쪽.
3 사림원 : 충선왕 즉위년(1298) 개혁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관부이다. 충선왕은 원나라의 제도를 본떠서 충렬왕 원년(1275)의 기형적인 관제개정을 정상화시키면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사림원을 신설하였다. 충선왕은 권력층에 의해 장악되어 인사행정을 문란시키고 있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한림원과 승지방을 계승한 사림원을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장악하면서 왕권강화를 시도하였다. 사림원에는 개혁세력인 최참(崔旵)·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이승휴(李承休)·권보(權溥) 등의 신진관료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기남, 「충선왕의 개혁과 사림원의 설치」 『역사학보』 52, 1971.
이익주, 「충선왕 즉위년(1298) 관제개편의 성격」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4 김우(?~?) :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한 후 비서윤(秘書尹)을 지낸 문신관료이다. 충렬왕 29년(1303) 6월에는 동지공거로서 지공거 김태현(金台鉉)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박리(朴理)·허관(許冠)·최해(崔瀣)·이연종(李衍宗) 등을 선발하였다.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48·456·496쪽.
5 『사서집주』 : 사서(四書)의 주석서로 「논어집주(論語集注)」, 「맹자집주(孟子集注)」,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의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가장 힘을 쏟은 저술로 죽기 직전까지 고쳐쓰기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는 송나라 학자의 주석에 입각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에 근거하여 새로운 해석을 덧붙여 주석학과 철학을 잘 융합하였다. 주자학의 주요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사서집주』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말하는 성리학의 정수로 도통론과 이단설, 군주성학론, 항산설, 경세제민론 등 현실정치를 이끌어가는 정치사상을 담고 있다. 원간섭기 고려에서 『사서집주』의 수용과 관련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맹자』의 경세론이 고려중기에 비해 더 많이 활용되고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현철, 「원간섭기 『사서집주』 이해와 성리학수용」 『역사와현실』 49, 2003.
6 시작 : 안향(安珦)이 원나라로부터 도입·소개한 주자성리학을 백이정(白頤正)·권보(權溥)·우탁(禹倬) 등이 연구·보급하여 이제현(李齊賢) → 이곡(李穀) → 이색(李穡) 등으로 이어진 사실을 말한다. 원나라로부터 수용되었다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그 이전에 남송(南宋)으로부터 직접 전래된 성리학이 신효사(神孝寺)의 당두(堂頭) 정문(正文) 등과 같은 승려나 재야의 학자에 의해 연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재야의 주자성리학 사상은 중앙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안향에 의해 전래된 원나라의 주자성리학이 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尹瑢均, 「朱子學の傳來とその影響に就いて」 『尹文學士遺稿』, 朝鮮印刷株式會社, 1993.
문철영,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143~144쪽.
7 『은대집』 20권 : 『은대시(銀臺詩)』라고도 하며, 고종 때 이인로(李仁老)의 시문집이다. 은대(銀臺)란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은대집은 한림원의 학사들이 지은 시를 모은 시문집이다.
8 『효행록』 : 중국 역대의 효행고사를 모아 만든 책으로, 충목왕 때 권보(權溥)와 그의 아들 권준(權準)이 중국의 효행설 62장을 선정하고 이제현(李齊賢)의 찬(贊)을 얻어서 엮었다. 초판본은 고려말에 간행되었고, 조선 태종 5년(1405)에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영락주해(永樂註解) 중간본(重刊本)을 간행하였다. 이는 단순한 중간이 아니라 주석과 교정을 가한 『효행록』 주석본이었다. 그 후 세종 10년(1428)에 『증보효행록(增補孝行錄)』으로 다시 간행되었으며, 또 다른 중간본으로는 같은 왕 15년 경주(慶州)에서 간행된 판본이 전한다. 62권의 전래본을 간행한 이 판본은 간행 책임자가 경주부판관(慶州府判官) 이호신(李好信)과 경주부윤(慶州府尹) 김을신(金乙辛), 교정은 유학(幼學) 최여공(崔汝恭), 각수로는 지영수(池永守)·서용신(徐用臣)과 승려 홍혜(洪惠)·의담(義淡) 및 학생(學生) 송의(宋義)·김자의(金自義)·김상립(金尙立) 등이며, 발문은 전농소윤(典農少尹) 송해(宋海)가 썼다. 『효행록』의 편찬과 간행은 조선 세종대에 국민윤리서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편찬에 자극을 주었다.
김두종, 『한국의학사』, 탐구당, 1966, 114~115쪽.
이희덕, 『고려유교정치사상의 연구』, 1997, 316~320쪽.
남권희, 「경주에서 간행된 서적연구」 『신라문화』 19, 2001, 201쪽.
9 규각 : 옥에 모가 난 것을 말한다. 언행에 모가 나서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서설(孟子序說)에는 “정자가 말하기를 ‘맹자에게는 다소 뛰어난 재기가 있는데, 재주에는 뛰어난 재기가 있어도 모가 난 점이 있다.’(程子曰 孟子有些英氣 才有英氣 便有圭角).”라 하였다.
10 가산을 : 권보의 묘지명에는 그가 정방(政房)에 13년 동안 있었고, 재상의 지위에 22년 동안 있었지만, 신중하고 청렴하기가 당나라 청백리인 노회신(盧懷愼)과 같았다고 하였다.
김용선 편, 「권보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 溥, 字齊萬, 初名永. 忠烈五年, 年十八登第, 明年, 又中殿試, 累遷僉議舍人. 忠宣受禪, 置詞林院, 溥與朴全之等, 俱爲學士, 寵幸無比. 尋拜右副承旨. 忠烈復位, 以溥及趙簡·金台鉉·金祐, 掌銓選. 陞密直學士, 累轉知都僉議司事. 忠宣復位, 拜贊成事·判摠部事, 王命注七品以下武選. 忠肅朝, 拜僉議政丞·判摠部事, 加領都僉議使司事·永嘉府院君, 賜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號. 又嘗爲征東行省員外郞中·王府斷事官.
溥, 性忠孝, 惠族姻睦僚友. 嗜讀書, 老不輟. 嘗以朱子四書集註, 建白刊行, 東方性理之學, 自溥倡. 註銀臺集二十卷, 又與子準, 裒集歷代孝子六十四人, 使壻李齊賢著贊, 名曰孝行錄, 行于世. 爲人無圭角, 久典銓衡, 鬻爵營産, 時人以爲, “視其父㫜之淸, 懸遠也.” 子準·皐·煦·謙, 壻齊賢·宗室璹·珣, 皆封君, 子宗頂祝髮, 亦封廣福君, 世號一家九封君. 溥以冡宰退老, 準領門生稱壽, 時人榮之. 忠穆二年, 年八十五遘疾, 命左右扶起, 端坐而逝, 謚文正. 煦·謙, 自有傳
권단(權㫜) 부 권준(權準)
권준(權準)은 자가 평중(平仲)이다. 과거에 급제1)한 후 충선왕을 연경(燕京 : 지금의 중국 베이징[北京])의 사저에서 알현하자 왕이 그를 대언(代言)으로 발탁했다. 이때부터 은총이 나날이 깊어져 상으로 내려주는 물품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황제에게 건의해 그를 무위 장군(武衛將軍)·합포만호(合浦萬戶)로 임명하고, 뒤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삼았으며 곧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임명했다. 국신도감(國贐都監)에 명령을 내려 은 50근으로 중찬(中贊) 안향(安珦)의 집을 사서 그에게 내려주게 하였고 금잔도 내려주었다.
원윤(元尹) 신여계(申汝桂)2)의 처 김씨(金氏)가 노비들과 함께 이사를 하는데 불량배 십여 명이 고함을 지르며 김씨를 메고 달아났다. 신여계가 숙비(淑妃)3)에게 달려가 알렸는데, 김씨는 숙비의 이모였다. 숙비가 사람을 시켜 그 뒤를 쫓게 하자 10리쯤 가다가 버리고 흩어지기에 한 사람을 잡았더니 바로 권준의 집안사람이었다. 그러나 순군(巡軍)에서는 권씨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다스리지 못하였다. 충숙왕이 권준의 집으로 행차한 적이 있었는데, 집의 아름다움을 두루 보고는 “과인이 감히 당해 낼 수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
왕이 심왕(瀋王) 왕호(王暠)와 서로 대립하자 신하들이 대부분 부당하게 심왕 편에 붙었으나 권준은 변함없이 의리를 지켰으므로 사태가 가라앉자 찬성사(贊成事)로 임명되었다. 조적(曹頔)의 변란4) 때 권준은 문을 닫아 걸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조적이 패망하자 충혜왕은 그를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봉하고 부(府)를 설치해 관료를 두었으며 권준의 외손녀를 왕비로 받아들이니 이 사람이 화비(和妃)5)다. 왕이 재산 늘리는 일에 재미를 붙이자 권준은 초(鈔) 1천 정(錠)을 바쳤다.
충목왕이 죽자 권준은 원로대신들과 함께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공민왕을 세우자고 청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였을 때 권준은 병석에 있었는데 의원들과 문병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일흔두 살로 죽자6) 왕이 크게 슬퍼하며 창화(昌和)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품이 순박 중후했으며 함부로 웃거나 떠벌이지 않았고 예의범절에 뛰어났다. 그러나 세도를 믿고 남의 농토를 강탈했으며 뇌물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 아들7)로 권렴(權廉)·권적(權適)을 두었다.
각주
1 급제 : 권준(權準)은 문음으로 판관(判官)·대전행수(大殿行首)를 역임하다가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충숙왕 13년(1326)에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박원(朴瑗)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최원우(崔元遇)·정포(鄭誧)·이정(李挺)·이인복(李仁復)·이달충(李達衷)·김대경(金臺卿) 등을 선발하였다.
김용선 편, 「권준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52·461~462쪽.
2 신여계(?~?) : 충렬왕~충선왕 때 우부승지(右副承旨)·밀직부사·검교재신(檢校宰臣)을 역임한 지낸 문신관료이다.
3 숙비(?~?) : 원간섭기 세족으로 성장한 언양 김씨 위위윤(衛尉尹) 김양감(金良鑑)의 딸로 충렬왕의 비가 되었다가 후에 충선왕의 사랑을 받은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를 말한다. 숙비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9, 후비, 충렬왕, 숙창 원비 김씨 참조.
4 조적의 변란 : 충숙왕 후8년(1339) 조적(曹頔)·채하중(蔡河中) 등이 심왕(瀋王) 왕호(王暠)를 왕위에 추대하려고 일으킨 정변을 말한다. 이 변란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31, 열전44, 반역, 조적전(曹頔傳) 참조.
5 화비(?~?) : 평리(評理)를 역임하고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이 된 남양 홍씨 홍탁(洪鐸)과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이 된 안동 권씨 권준(權準)의 맏딸 사이에 태어나 충혜왕의 비가 된 화비 홍씨(和妃洪氏)를 말한다. 화비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9, 후비, 충혜왕, 화비 홍씨(和妃洪氏) 참조.
6 죽자 : 권준(權準)은 개성부(開城府) 장단군(長湍郡)의 임진현(臨津縣 : 지금의 개성직할시 장풍군)에 있던 자효사(慈孝寺)의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특히 자효사는 권준이 중수하여 이미 장례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한편 권준은 30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10명의 승려들에게 공양하는 등 불교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김용선 편, 「권준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7 아들 : 권준은 군부판서(軍簿判書)를 지낸 오인영(吳仁永)의 딸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내고 현복군(玄福君)이 된 권렴(權廉)과 첨의찬성사를 지내고 화산군(花山君)이 된 권적權適이며, 맏딸은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남양 홍씨 홍탁(洪鐸)에게, 막내 딸은 남양후(南陽侯) 남양 홍씨 홍언박(洪彦博)에게 각각 시집갔다.
김용선 편, 「권준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 準, 字平仲. 登第, 謁忠宣于燕邸, 擢爲代言. 自是, 恩寵愈隆, 賞賜無算, 奏帝, 拜武衛將軍·合浦萬戶, 後授密直副使, 尋知司事. 命國贐都監, 以銀五十斤, 買中贊 安玽第賜之, 又賜金盞. 元尹 申汝桂妻金氏徙宅, 率婢僕行, 有惡少十餘人, 大呼擔金氏走. 汝桂奔告淑妃, 金氏妃之姨也, 使人追之, 至十里許, 棄之而散, 獲一人乃準家人也. 巡軍畏權氏勢, 莫敢究治.
忠肅嘗移御準第, 周觀屋宇之美, 歎曰, “非寡躬所敢當也.” 王與瀋王暠相持, 群不逞多附瀋王, 準守義不變, 事定拜贊成事. 曹頔之變, 準閉門不出. 頔敗, 忠惠封吉昌府院君, 開府置僚屬, 納準外孫女, 是爲和妃. 王以殖貨爲事, 準進鈔一千錠. 忠穆薨, 準與耆舊大臣, 上書于元, 請立恭愍. 及卽位, 準有疾, 醫問不絶. 卒年七十二, 王慟悼, 謚昌和. 性純重, 寡言笑, 儀表秀偉. 倚勢奪土田, 納賄賂, 以致鉅富. 子廉·適.
권단(權㫜) 부 권렴(權廉)
권렴(權廉)1)은 자가 사렴(士廉)이다. 충숙왕 때 삼사부사(三司副使)로 임명되었고 부친의 관작을 이어받아 선무 장군(宣武將軍)·합포진변만호(合浦鎭邊萬戶)가 되었다. 뒤에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자 법에 정해진 대로 군전(軍田)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조금 뒤에 좌상시(左常侍)로 승진했으며, 충숙왕이 그의 딸을 수비(壽妃)2)로 삼은 후 그를 현복군(玄禑君)으로 봉했다. 뒤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내다 양재(梁載)3)와 틈이 생겨 파직되었지만 다시 현복군으로 봉해져 죽었다. 아들로4) 권용(權鏞)·권현(權鉉)·권호(權鎬)·권균(權鈞)·권주(權鑄)를 두었다.
각주
1 권렴(1302~1340) : 권형(權衡)이라고도 하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충선왕~충혜왕 때 음보(蔭補)로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에 임명되었고, 보마배행수(寶馬陪行首)·삼사부사(三司副使)·응양군(鷹揚軍) 대호군(大護軍)·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등을 역임하고 현복군(玄福君)이 되었다. 이제현(李齊賢)·홍언박(洪彦博)·안진(安震)·안축(安軸)·김륜(金倫)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과 정치 및 무예를 익혔고 시중 김일봉(金逸逢)에게 몽고어를 배웠다.
김용선 편, 「권렴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2 수비(?~1340) :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고 현복군(玄福君)이 된 안동 권씨 권렴(權廉)의 맏딸로, 밀직상의(密直商議)를 지낸 천안 전씨(天安全氏) 전신(全信)의 아들과 혼인하였다가 충숙왕의 비가 된 수비 권씨(壽妃權氏)를 말한다. 그녀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9, 후비, 충숙왕, 수비 권씨(壽妃權氏) 참조.
3 양재(?~?) : 충숙왕의 폐행으로, 연남(燕南 : 지금의 중국 헤베이성[河北城] 이남지역) 사람이다. 양재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4, 열전37, 폐행, 왕삼석(王三錫) 부 양재전(梁載傳).
4 아들로 : 권준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평양 조씨 조련(趙璉)의 딸과 혼인하여 5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현성군(玄城君) 권용(權鏞), 왕부단사관(王府斷事官) 권현(權鉉), 대사헌 권호(權鎬), 상서(尙書) 권균(權鈞), 삼사좌윤(三司左尹) 권주(權鑄)이다. 맏딸은 충숙왕의 수비(壽妃)이며, 둘째 딸은 원나라의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부다시리[普達實理]에게, 셋째 딸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지낸 동복 오씨 오중화(吳仲和)에게, 넷째 딸은 대사헌을 역임한 서원 염씨 염국보(廉國寶)에게, 막내딸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원주 원씨 원송수(元松壽)에게 각각 시집갔다.
김용선 편, 「권렴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 廉, 字士廉. 忠肅時, 授三司副使, 襲父爵, 爲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 後爲選軍別監, 授田有法, 人便之. 俄遷左常侍. 忠肅納其女爲壽妃, 封廉 玄福君. 後拜僉議贊成, 與梁載有隙罷, 復封玄福君卒. 子鏞·鉉·鎬·鈞·鑄.
권단(權㫜) 부 권용(權鏞)
권용(權鏞)의 처음 이름은 권일(權鎰)이다. 합포만호(合浦萬戶)로 있으면서 군리(軍吏)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아 금·은을 사서 그릇을 만든 후 제멋대로 역마를 동원해 자기 재물을 운반했다. 조정에서 원호(元顥)로 교체해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의 군대를 지휘하게 하자 원호가 권용의 비행을 일일이 적어 식목도감(式目都監)에 보고했다. 경상도 찰방(慶尙道察訪) 김한구(金漢丘)도 감찰사(監察司)로 보고서를 보내고 주민들도 권용의 비행을 고소했으나 감찰사가 덮어버리고 죄를 묻지 않았다.
공민왕이 사자로 갔던 관리들을 불러 백성들이 직면한 고통을 물어본 뒤 그 정황을 알아차리고 그를 순위부(巡衛府)1)에 하옥시킨 후 정환(鄭桓)2)으로 하여금 신문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환도 기일을 질질 끌며 죄를 다스리지 않자 왕이 노해 석말도사(石抹都事)를 불러,
“권용의 족당들이 나라에 가득 차 있어 사람들이 감히 그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데, 네가 그를 다스릴 수 있겠느냐? 만약 다스리지 못하겠다면 바로 아뢰라.”
고 다그쳤다. 석말도사가 부끄러워 얼굴이 벌개진 채 한참 있다가,
“권용은 탐욕스럽고 더러운 인간이니 어찌 철저히 다스리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뒤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있을 때 운암사(雲岩寺)3)의 승려가 도당(都堂)에,
“공들이 주상과 함께 다스리는데도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가령 남에게 감옥을 맡겼는데 죄수들이 달아나버리면 그것을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
라고 비판했다. 권용이,
“나는 불교가 자기 본성을 살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대도 자신의 본성을 잘 아는가?”
라고 묻자 승려는,
“본성을 알고 모르고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으니 물을 필요조차 없소이다.”
라고 대답하니 재상들은 권용이 실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뒤에 아들4) 권진(權瑨)이 왕을 시해5)하자 먼 고을로 편배(編配)되었는데 우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였다.
각주
1 순위부 : 고려후기 도적의 예방·체포 및 정치적 변란의 진압을 맡은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77, 백관지, 제사도감각색, 순군만호부 및 권113, 열전26, 최영전(崔瑩傳) 참조.
2 정환(?~1352) : 공민왕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한 관료이다. 같은 왕 원년(1352) 6월에는 연저수종(燕邸隨從) 일등공신이 되었으나, 9월 조일신(趙日新)의 반란 때 성입동(星入洞)의 이궁(離宮)을 숙직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3 운암사 : 고려시대 개경(開京) 봉명산(鳳鳴山)에 있던 왕실의 진전(眞殿)사원이다. 원래 교종(敎宗)계통 사원이었으나, 창화사(昌和寺)라 이름을 바꾸면서 선종(禪宗)사원으로 삼았다. 공민왕 19년(1370)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사원의 동쪽 기슭에 안장하면서 광암사(光岩寺)라 하였으며, 우왕 때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진전을 옮기고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 하였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이 사원에 들렀고 공주가 죽은 후에도 자주 행차하였으며,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토지 2,240결과 노비 46명 및 능지기 114호를 시주하고 승려들에게도 쌀 30석과 공급품을 제공하였다. 김극기(金克己)·이인로(李仁老)·이색(李穡)의 시가 전하는데, 김극기의 시에서는 이 절에서 날마다 강석(講席)이 열렸고, 경전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운암사는 고려 태조가 창건한 개경의 10대 사원 가운데 하나인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와 다른 사원이다.
『고려사』 권89, 후비, 공민왕,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 및 권114, 열전27, 이성서전(李成瑞傳).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 고적.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7, 83쪽.
4 아들 : 현성군(玄城君) 권용(權鏞)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광주 김씨 김태현(金台鉉)의 손녀와 결혼하여 2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행수별장(行首別將) 권준(權濬) 및 산원(散員) 권연(權演)이다. 맏딸은 별장(別將) 민공량(閔公亮)에게, 둘째 딸은 중랑장(中郞將) 송인수(宋仁壽)에게 각각 시집갔다. 한편 묘지명에는 공민왕의 시해 사건에 연루된 권진(權瑨)과 형 권정주(權定住)에 대해서는 누락되어 있다.
『고려사』 권131, 열전44, 반역, 홍륜전(洪倫傳).
김용선 편, 「권렴 묘지명」·「김태현 처 왕씨(金台鉉妻王氏)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5 시해 : 환자(宦者) 최만생(崔萬生)이 자제위 소속의 권진(權瑨)·홍륜(洪倫)·한안(韓安) 등과 함께 공민왕을 죽인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31, 열전44, 반역, 홍륜전(洪倫傳) 참조.
○ 鏞, 初名鎰. 嘗爲合浦萬戶, 割剝軍吏, 市金銀鑄器, 擅發傳騎, 輸私貨. 元顥代鎭合浦, 具鏞事移式目都監, 慶尙道察訪 金漢丘牒監察司, 居民又訴之, 監察司庇不問. 恭愍引奉使者, 訪民疾苦, 得其狀, 下巡衛府, 命鄭桓鞫之. 桓亦依違不治, 王怒召石抹 都事曰, “鏞族黨滿國, 人不敢治其罪, 汝能治之乎? 不能則直以告.” 石抹慙赧良久曰, “鏞貪汚人也, 敢不窮治?” 後爲密直副使, 雲岩寺僧言於都堂曰, “公等與王, 共理一國而國不理. 使人主獄而囚逸, 則誰任其咎?” 鏞曰, “吾聞釋敎, 見性成道, 爾亦能見性乎?” 僧曰, “見性與否, 聞言可知, 不必問也.” 諸相以鏞爲失言. 後以子瑨弑逆, 編配遠州, 辛禑遣人殺之
권단(權㫜) 부 권적(權適)
권적(權適)은 충혜왕의 총애를 받아 거듭 승진해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가 되었다. 원나라가 충혜왕을 폐위하고 충숙왕을 복위하도록 하니 충숙왕이 권적과 상호군(上護軍) 김예(金銳)1)를 순군(巡軍)에 가두고 곤장을 때려 바닷섬으로 유배보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는 밀직대언(密直代言)으로 임명되었고 추성경절공신(推誠勁節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첨의참리(僉議參理)를 역임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해졌다. 공민왕 초에 다시 길창군(吉昌君)으로 바꿔 봉해졌고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홍건적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을 함락하자 권적은 승병(僧兵)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였으므로 뒤에 단성보절익대공신(端誠保節翊戴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공민왕이 시해되자 권적은 권진의 근친(近親)이라 하여 파직되었으며, 죽은 후 원정(原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각주
1 김예(?~?) : 충숙왕~충혜왕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한 무신관료이다. 충숙왕 복위 원년(1332) 3월에는 순군옥(巡軍獄)에 수감되었다가 장형(杖刑)되고 직첩(職牒)을 몰수당했다. 충혜왕 복위 3년(1342) 7월에 밀직부사(密直副使) 원호(元顥)의 집으로 행차하는 국왕을 시종한 것으로 보아 권적과 함께 충혜왕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문종 때 좌보궐(左補闕)을 지낸 김예(金銳)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 문종 24년 정월 기유 참조.
○ 適, 爲忠惠嬖幸, 累遷判典客寺事. 元廢忠惠, 命忠肅復位, 囚適及上護軍 金銳于巡軍, 杖流海島. 忠惠復位, 授密直代言, 賜推誠勁節功臣號. 歷判密直司事·僉議叅理, 封花山君. 恭愍初, 改封吉昌君, 拜贊成事. 紅賊陷西京, 適率僧兵赴征, 後賜端誠保節翊戴功臣號. 恭愍見弑, 適以權瑨近親罷, 卒謚原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