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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교양

그 바다엔 두 명의 이순신이 있다

작성자희망의미소(박영훈)|작성시간17.07.28|조회수63 목록 댓글 0

우리 울딸이 용돈을 모아서 신발을 샀습니다.
그리고선 울각시한테 얘기를 하더랍니다.
그것도 새로운 걸 알게 돼서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요.
지금까지는 225mm를 샀었는데, 살 때는 맞는 것 같다가도 신다 보면 신발이 작아서 발이 아팠었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조금 헐렁한 듯해도 발이 편한 230mm를 사기로 했다고요.
그러면서 아주 어이없어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요.
그랬더니 울딸한테 느꼈던 그 어이없음을 저한테서도 느끼는 것 같더라구요.

살다 보면 늘 그런 줄 알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 이게 아니었네!' 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평생 알고 있던 혈액형이 틀린 경우도 있고, 심지어 병원에서 애가 바껴서 서로 남의 애를 키우는 경우도 있잖습니까?
지금이라도 안 게 어딥니까?
그걸 이제서야 알았냐고 할까봐 말도 안 하고 계속 힘든 걸 참고 견디는 바보짓보담야 백배 낫지요.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출근할 때쯤 뚝 그쳤습니다.
지붕이나 가로수 같은 곳에서는 여전히 맺혔던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다소 헷갈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수역에서도 서울역에서도 대부분 쓰던 우산을 벗어서 들고 가는데 일부는 계속 쓰고 있습니다.
우산을 쓴 그 사람도 비가 안 오는 걸 알고 있을 테지만 계속 우산을 쓰고 있는 그 심정 이해가 갑니다.
비가 오는 줄 알고 썼다가 다시 벗기가 민망한 거지요.
누가 쳐다 보지도 않는데 혼자서 지레 남들이 볼까 봐서요.
남들 볼까 무서워서 차마 못하고 있는 게 있나요? ~^.^~

♥그 바다엔 두 명의 이순신이 있다♥

'죽은 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했다.' -선조실록 사관
기나긴 전쟁의 끝을 알린 노량해전 승전보고.
전투는 승리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하지만 쓰러진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끝까지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또 다른 이순신이 있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던 동명이인의 부하였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3달 전, 조선 수군이 주둔했던 전라좌수영에서 두 이순신이 만났다.
같은 부대에 있던 두 이순신은 이름의 혼동을 피하고자 부하 이순신을 '방답첨사 이순신', 줄여서 '이 첨사'로 불렀다.
옥포 해전 적선 50여 척, 합포 해전 적선 5척, ... 고성 해전 적선 13척, 사천 해전 적선 12척 격파.
이 첨사는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고 이순신 장군은 이름이 같은 그를 신임했다.
'충무공과 방답첨사는 임진왜란 내내 함께 활 쏘고, 술 마시고, 밥 먹고, 이야기하다, 함께 승경놀이도 했다.' -난중일기
두 이순신은 전투가 없는 평소에도 함께했다.
이순신 장군이 갖은 모함으로 관직과 군사를 잃었을 때도 이 첨사는 그의 곁을 지켰다.
'충무공이 백의종군하게 되자 제일 먼저 술을 들고 찾아와 밤새 위로하였다.'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끝내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오자 그들은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1598년, 그들은 노량 앞 바다로 출전했다.
두 이순신이 함께했던 마지막 전장이었다.
''아직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했다.
하지만 이 첨사는 장군의 뜻을 이어 맹렬한 공격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조선이 승리했다.
그 뒤로 이 첨사는 '무의공'이라 불리며 충무공의 후임 통제사로 임명됐다.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함',
'잠수함, 무의공 이순신함'
4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해군은 두 명의 이순신을 기리며 바다를 지키고 있다.
-스브스 뉴스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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