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중국 북경을 지배했다"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사료로 찾은 고조선의 강역(上)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4-10-22 오전 10:09:00
심백강 원장은 사료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는 후학(後學)들이 우리 고대사를 바르게 연구할 수 있도록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연대가 앞선 1차 사료를 수집ㆍ정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를 2회에 걸쳐 나누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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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그는 "고대사는 사료가 생명"이라며 <사고전서> 등 1차 사료 발굴을 통해 우리 고대사를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
이런 우리 사학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학자가 있다. 바로 심백강(沈伯綱)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이다. 그는 “상고사(上古史)는 사료가 생명”이라고 주장하며 지난 20여 년간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사료(1차 사료)의 수집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바른 역사)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이라는 두 책에서 심 원장은 고조선과 낙랑관련 사료의 원문과 번역문, 해설문, 주석을 실어 누구라도 읽을 수 있게 편집했다.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사료는 국내학계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인용이나 번역이 된 적이 없는 초역(初譯) 자료들이다.
낙랑의 위치가 곧 고조선의 강역
국책연구기관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심 원장 개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내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높은 한문 해독 실력을 갖춘 한학자이자 역사가, 문학가이기 때문이다. 한중(韓中) 고대사 전공으로 중국에서 역사학박사 학위를 받은 심 원장은 퇴계전서, 율곡전서, 조선왕조실록 등 국내 주요 고전과 역사 기록물을 번역했다. 또한 월간 현대문학 출신의 문학평론가로서 문사철(文史哲)에 두루 조예가 깊은 학자다.
지난 10월초 서울 광화문 부근에 있는 민족문화연구원 사무실에서 심백강 원장을 만났다. 심 원장은 “이번에 펴낸 두 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보다 연대가 앞선 중국의 새로운 사료(사고전서)를 통해 고조선의 발상지와 강역을 고증한 것으로, 오랜 고대사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한국사의 척추를 바로 세운 작업”이라고 자평했다.지금부터 하는 작업은 이런 사료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고, 해설을 하는 2차 작업에 해당합니다.
국내에 사료의 원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적이고, 특히 요즘에는 역사학과 교수 중에도 사료의 원전을 제대로 해독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일이 만무합니다. 따라서 제가 후학들을 위해 단순히 1차 자료를 모아서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 자료들을 직접 해석하고, 주석과 해설을 붙여 엮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고조선과 낙랑 부분에 관한 작업을 했으니 이어서 삼국시대에 관한 사료 정리 작업을 할 것입니다.”
-‘낙랑’은 한나라 사군(四郡)의 하나인데 어째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지요.
고조선은 우리나라 사료에 등장이라도 하지만, 중공 사료에는 거의 취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랑은 한무제(漢武帝: BC 156~BC 87)가 고조선(위만 조선)을 침략해서 설치한 한사군(낙랑, 임둔, 진번, 현도) 중의 하나기 때문에 지나 문헌에 많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이 낙랑과 현도(玄菟)가 고구려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낙랑의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기존 강단 사학(이병도 학설을 계승한 현재의 통설)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설치되었더라면, 고구려의 발상지도 이 부근이 되는 것이고, 낙랑이 대동강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발상지도 다른 곳이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20여 종의 각기 다른 자료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공 하북성 동쪽, 내몽고 남쪽, 요녕성 서쪽, 즉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당연히 요서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동안 강단 사학이 상고사 연구에서 그토록 강조해 온 ‘사료의 빈곤’ 주장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그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 낙랑 관련 사료가 여실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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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인 국사 책에 실린 한사군의 위치. 한사군이 압록강과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이병도 학설을 따르고 있다. 심백강 원장은 "낙랑의 영토가 곧 고구려의 영토이기 때문에 낙랑의 정확한 위치 고증은 우리 고대사의 척추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이미지 출처: 영토한국사(소나무) |
-현재 학계의 통설은 고구려의 발상지이자 첫 수도를 중국 요녕성(遼寧省) 오녀산성(홀본 혹은 졸본) 부근으로 보고 있는데요.
고구려의 출발지가 바로 낙랑군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통설은 고구려의 발상지를 압록강이나 대동강 유역으로 해놓았는데 이는 한사군인 낙랑, 임둔, 진번, 현도가 압록강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 있었다는 가정하에 고정된 학설입니다.
이병도씨는 그 가운데 낙랑군이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이런 학설에 반발한 사람들이 소위 민족사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 같은 분들로 이들은 낙랑을 요동(신채호)이나 요서(정인보 등) 지역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신채호ㆍ정인보 같은 민족사학자들도 당시 <사고전서> 같은 방대한 중국 측 1차 사료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강역을 요동이나 요서지역 이상 확대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분들이 <사고전서>를 보았다면 우리 고대사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사고전서>의 기록을 고증해 보니, 낙랑군은 하북성의 발해만을 끼고 현재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의 남쪽 일대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동으로 당산(唐山) 천진을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보정시(保定市) 수성진(遂城鎭)과 백석산(옛 갈석산)까지 이르는 지역입니다.
즉 이곳이 고조선의 강역입니다.”
-그 근거를 설명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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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백강 원장은 <사고전서>등 중국에서 펴낸 1차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과 낙랑의 위치를 고증했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의 주 활동무대(중심지)는 오늘날 노룡현 일대(하북성 동쪽 일대)로, 그 세력 범위가 동쪽 발해만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수성현, 동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이른다. 심 원장은 "이 하북성 동쪽 일대가 바로 우리 배달민족(동이족)이 수천년간 한족(漢族)과 흥망을 다투던 지역"이라고 말했다. 심 원장은 최근 펴낸《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북경 부근에 있는 '조하'가 예전에는 '조선하'였다는 것을 고증했다. 그는 "진시황과 한나라 시절에는 이 조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날 요녕성의 요하를 기준으로 나눈 요동ㆍ요서와는 다른 지역"이라고 밝혔다. /구글맵 |
하나는 앞서 말한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던 갈석산입니다.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진(西晉: 265∼316) 시기에는 낙랑군에 수성현이 있고,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수당(隋唐) 시대 이후 갈석산이 지금의 하북성 북평군 노룡현(盧龍縣)에 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수서 <지리지>, 당 두보의 <통전>, 송의 <태평환우기> 등).문제는 갈석산이 있다고 언급된 북평군에는 ‘수성현’이 설치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서진 시대에 말한 수성현(遂城縣)에 있다는 갈석산과는 분명 다른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가 바로 <전한서>에 기록된 갈석산인데, 현재의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 부근에 있습니다.”
‘연나라 동쪽에는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滹沱)와 역수(易水)가 있는데 지방이 2000리쯤 된다’(사기 열전). 이어서 그는 ‘연 나라가 남쪽에는 갈석(碣石)ㆍ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수익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비록 경작을 하지 않더라도 대추와 밤의 수익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이니 이곳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천혜의 땅이다’라고 했습니다.
소진은 바로 연나라 남쪽 변경에 호타하와 역수가 있다고 했습니다.남쪽에는 갈석(碣石)ㆍ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호타하와 역수는 지금도 하북성 보정시 남쪽에 있습니다. 역수는 역현(易縣) 부근에 있습니다. 소진은 이어서 ‘호타하를 건너고 역수를 건너서 4ㆍ5일을 넘기지 않아 국도(國都)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연나라의 수도에서 남쪽으로 4~5일 거리에 호타하와 역수가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만리장성의 9대 관문 중의 하나인 안문관도 있습니다. 즉, 연나라 남쪽의 안문산과 함께 거론된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노룡현에 있는 갈석산과 동일한 산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한 것입니다.”
-현장을 가보셨습니까.
갈석산의 갈(碣)은 비석 중에 짤막한 돌로 비를 세우는 것을 특별히 ‘갈’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비처럼 큰 것은 비(碑)라고 하고요.
그래서 합쳐서 비갈(碑碣)이라고 하는데 백석산에 가니까 산의 돌이 전부 비석 같은 모양의 갈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에 지맥으로 연결된 낭아산(狼牙山)이 있는데, 이 역시 산 위에 돌들이 삐죽삐죽 한 것이 이리의 이빨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 ‘백석산’과 ‘낭아산’이 예전에 바로 갈석산으로 부르던 산입니다.”
“낙랑의 평양 대동강 유역설은 어불성설”
그 갈석산은 서한 말엽 신왕조의 왕망시대에 ‘게석산’으로 출발했다가, 수당(隋唐) 시대에 이르러 갈석산으로 개명된 것입니다. 따라서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현도ㆍ낙랑군은 바로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한사군이 압록강과 대동강 유역에 설치되었다면,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의 원래 갈석산은 물론 하북성 동쪽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과도 수천리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갈석산과 한반도 사이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 백두산 등 큰 산이 있고, 조하(潮河), 난하(灤河), 대릉하(大凌河), 압록강 등 여러 큰 강이 있습니다.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면, 수천리 밖에 있는 갈석산을 특징적인 산으로 들어 설명하지 않고, 백두산이나 압록강을 지나 현도ㆍ낙랑을 설치했다고 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만약 요녕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면 가장 특징적인 산인 의무려산을 지나서 설치했다고 했을 겁니다.”예를 들어 <전한서>에서 이 말을 한 당사자인 가연지(賈捐之)가 낙랑군이 설치된 지 500년이나 1000년 뒤쯤 사람이라면 그동안의 역사를 고증하는데 착오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불과 50년 뒤의 기록입니다. 50년 전에 일을 말하면서 공간적으로 수천리가 떨어진 지리를 혼동할 정도로 큰 착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가연지는 한무제가 설치한 주애군(珠厓郡)의 폐기를 건의했고, 한원제가 이를 받아들였을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입니다.이런 그가 사적인 저술이 아니라 황제에게 정중히 올리는 글에서 이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이 기록이 잘못되었다면 후대에서 주석을 통해 바로잡았을 텐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동강 유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주장은 사대 식민사관적 논리를 따르는 근거 없는 역사 왜곡입니다.”
그러니까,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옛 기록에 모두 맞으려면 현재의 보정시 수성진이 예전의 낙랑군 수성현이라는 지명이어야 하고, 여기에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또한 만리장성의 기점이 있어야 합니다. 단, 여기서 말하는 장성은 오늘날 북경 위에 있는 장성이 아니라,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북경 부근에 쌓은 장성은 명나라 때 쌓은 성이기 때문에 ‘명장성’(明長城)이라고 불러야 합니다.이것을 진시황의 장성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천리장성을 쭉 연결해서 쌓은 것만이 ‘만리장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연나라 장성이 가장 동쪽에 있었는데 그 기점이 바로 수성입니다. 거기가 예전 고조선과 접경지역이었으니까 당연히 장성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참고로, 현재 갈석산이 있는 산해관 부근의 창려현 쪽에는 연나라 장성이 없습니다.”
그 부근에는 수당시대에 와서 명칭이 ‘갈석산’이라고 바뀐 산이 하나 있다는 것 외에는 고대의 기록과 맞는 부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진태강지리지>에 말한 지역이 아닙니다.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은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가? <한서> 무제기에 갈석산에 대한 주석을 내면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해석했는데, 그것이 시발이 되어 많은 사가(史家)들이 이를 근거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간주함으로써 게석산이 갈석으로 둔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당 이후에 갈석산이 창려현쪽으로 옮겨오면서 전국시대의 연나라의 갈석산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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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백강 원장은 <조선왕조실록>과 중국측 기록인 <사고전서>에 있는 단군(檀君)과 고조선 관련 자료를 모두 발췌해서 후학(後學)들이 1차 사료를 통해 상고사를 연구할 수 있도록 길을 터 놓았다. |
전국 7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습니다.
춘추시대의 패권 국가였던 제(齊)나라도 산동성의 절반밖에 못 차지했던 상황인데 한 번도 패주(覇主)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연나라가 오늘날 요녕성 요동지역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소진이 연나라 문후를 만나서 ‘연나라 영토가 2000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연나라가 강성할 때인데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소진의 설명에 의하면 연나라는 동서로 좁고 길게 늘어져 있던 나라입니다. 중공은 이런 연나라의 영토를 요동까지 확장해서 요동은 물론 어떤 때는 압록강까지 확장해 놓은 것입니다.”
1500년 전 선비족의 금석문에 기록된 고조선의 위치
무려 1500년 전의 선비족이 남긴 ‘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碑)가 그것인데 정말 귀중한 사료입니다.
사료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문헌사료는 필사(筆寫) 과정에서 글자를 고칠 수가 있지만, 금석문은 그것이 거의 어렵기 때문에 더욱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이 기록에 요서에 건국한 전연(前燕)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선건국(朝鮮建國)’ 즉 ‘조선이 그 지역에서 건국했었다’고 딱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금석문은 고조선이 바로 요서에 있었다는 것을 확증해준 겁니다.물론 이때의 요서는 오늘날의 요녕성의 요서 지역이 아니고, 고조선과 한사군, 연나라가 있던 하북성의 북경 부근 지역을 말합니다.”
일연 같은 분이 이 비문을 봤다면 그리고, 이에 대해 단 한 줄만 인용을 했었더라도 우리 고대사가 이렇게 참담한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삼국유사>에 기록이 되었으면 일본이 아무리 우리 고대사를 위조한들 위조가 되겠습니까.
일본은 고조선의 역사 중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2000년의 역사를 ‘신화’ 혹은 ‘말이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잘라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위만조선부터 역사로 인정해서 일본의 역사보다 우리나라 역사의 길이를 줄여놨습니다.
이런 일제의 반도사관을 강단 사학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의 역사를 왜곡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조선의 역사만 비틀어 놓으면 뿌리를 비틀어 놓은 게 되고,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의 모든 부분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고조선의 역사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 강역도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해놓은 것입니다.” (下편에서 계속. 上편에서는 주로 '낙랑'의 위치 고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고, 下편에서는 고조선의 강역 고증에 대한 인터뷰가 이어진다.)
"은(殷)은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기자 조선으로 이어져"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고조선은 중국 북경을 지배했다"(下)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2014-10-23 오후 6:24:00
지금까지 원장님의 설명을 요약하면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혹은 압록강 부근이 아니라, 발해만 부근을 중심으로 노룡과 북경-천진을 아우르는 지역,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오늘날의 보정시까지 이어진 하북성 일대라는 말씀이신데요.
“그 일대가 우리 민족, 즉 동이족(조선족)의 활동무대였습니다.물론 동북쪽으로는 오늘날의 조양시를 포함하는 요서 지역과 압록강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기자는 자기 선대(先代)가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은나라는 우리 민족이 세웠다는 말이 되지 않는지요
“일본 사람들은 기자가 하남성(河南省: 은허)에서 한반도의 대동강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너무 멀고, 망명객 신분에 이(異)민족이 있는 지역을 지나서 한반도로 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 우리 사학계도 기자조선을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자기 종족들이 터를 잡고 살던 요서조선(진한 시대의 요서군) 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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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백강 원장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주요 지명을 표시한 하북성 동부 일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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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말기까지 존속한 '조선하' 명칭
송나라 때 <태평환우기>의 기록에 여기에 ‘조선성(城)’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는 증거가 부족한데, <사고전서>에서 노룡의 서쪽 북경 부근에 조선하(朝鮮河)가 있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송나라 때 나라에서 펴낸 병서(兵書)인 <무경총요>(武經總要)인데, 여기에 바로 ‘조선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조선하는 북경시 북쪽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무경총요>에 등장하는 ‘조선’은 어떤 조선을 말하는 것이며, 왜 북경 북쪽 지역에 이 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조선하는 고대 요서조선 수도의 서쪽에 있던 강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의 모든 기록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사기> 열전에 섭하(涉河)가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것이고, 위만이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겁니다.당연히 수(隋)나라가 조선을 치기 위해 건너왔다는 패수(浿水)도 이병도의 주장처럼 청천강이 아니고 조선하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청천강 패수설’과 ‘대동강 낙랑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의 핵심 요소입니다.”
저의 이번 책《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사고전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하가 왜 조선하인지 자세하게 고증했습니다. 최소한 원(元)나라 말년까지는 조선하라는 명칭이 존속했습니다.
명청(明淸) 시대에 이르러 조선하가 조하로 변경된 것 같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압록강 이남의 손바닥만한 땅을 소유한 나라에 불과했고, 중원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신세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중원 수도 근처에 조선하가 있다는 것은 지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역사적 분쟁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불편한 명칭이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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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오임신이 저술한 <회도산해경광주>. <산해경>은 한나라 이전인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다. 이 책 '해내경' 편에 고조선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심 원장은 "지나의 여러 학자들이 '해내경'은 조선기’(朝鮮記)라고 했는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직접사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
고조선이 현재의 요동이나 반도에 위치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예전에 조하(조선하)를 기준으로 요동ㆍ요서를 나눈 근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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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백강 원장이 최근 펴낸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과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심 원장은 계속해서 <사고전서>의 삼국시대 관련 사료를 펴낼 계획이다. |
"북한이 만든 시조 단군릉은 가짜"
세계사에서 이처럼 생명력이 긴 민족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수천년의 역사적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순환 반복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니까 언젠가는 다시 옛날의 찬란했던 영광을 회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처음 주 무대가 노룡현 일대라면, 지금의 북한 평양(平壤)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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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녕성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삼원 구조의 원형제단(좌)과 내몽고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대규모 적석총 유적. / 이미지 출처: 우실하 저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 |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고조선…쏟아지는 유물ㆍ유적 증거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우리 동이족이 세운 ‘고조선’입니다.
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가 발굴되면서 입증되었습니다.
기록뿐 아니라 유물과 유적까지 뒷받침하는 것이죠.
홍산문화가 꽃핀 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주 무대였던 요서군 지역입니다.
홍산문화의 3대 특징은 여신을 모신 사당과 원형제단, 적석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그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섬서성처럼 지나 한족 문화가 융성한 지역(황화문명권)에서는 이런 특징을 가진 유적이 발굴되지 않습니다.지나 황제는 무덤 조성 시 평지에 흙을 끌어모아 토갱(土坑)을 만들었습니다. 능(陵)과 태묘(太廟), 제단(祭壇) 등은 부락단계에서는 볼 수 없는 국가의 상징인데, 대규모 제단이 황화문명에 앞선 홍산문화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국가의 전야(前夜) 단계라고 합니다.황화문명이 아직 국가 단계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때 벌써 국가의 전단계에 진입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거주하는 곳에서 먼저 문명이 시작되어 황화문명권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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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 여신묘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신상. 오른쪽은 두상이고, 왼쪽은 복원한 반가부좌상이다. |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땅에서 솟아나올 수는 없잖아요.
이러한 문화의 전야(前夜) 위에서 고조선이 건국된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면 무슨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인돌을 가지고 고대국가의 건국을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바로 중원 대륙의 우리 민족이 살던 곳 요서지역에서 국가의 건국을 상징하는 유물이 최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공의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지나 문명의 서광(曙光)이 홍산문화에서 열렸다’고 했습니다. 문명의 시작이 황화문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건국도 홍산문화에서 먼저 이루어졌고요.
홍산문화에서 발굴된 용(龍)이 황화문명에서 발굴된 용보다 연대가 앞섭니다.
봉황(鳳凰)도 최초로 이쪽에서 나왔고요.
그러다 보니 ‘황화문명에서 문명이 시작되어 오랑캐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기존의 이론이 뒤집어 지게 된 것입니다.중국문명의 출발점이 달라지다 보니까 아예 지나의 시조라는 황제(黃帝)를 이쪽 지방으로 갖다놓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물론 그 황제도 동이(조이)족이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요서고조선’ ‘요서낙랑’ ‘요서고구려’(여기서 말하는 요서는 오늘날의 요서 지역이 아니라 진한시대의 요서군 지역임)만 바로 세우면 동북공정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모든 사료는 청의 자료이고, 그 내용도 역사적 사실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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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섬서성 함양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두로 영은비' 중의 조선국 기록 부분. |
사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예컨대 선비족(鮮卑族)은 고조선의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1500년 전에 세워진 선비족의 ‘두로공신도비문’이 지금 전해집니다. 어떤 이의 비문을 쓸 때는 당연히 그 사람의 조상(뿌리)부터 이야기하는데, 그 첫마디가 바로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라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건국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고 한 겁니다. 선비 모용부(慕容部)가 나라를 세우고 활동한 지역이 요서와 요동 지구, 그리고 하북성 서북과 남부 지역을 포괄하는데, 이곳은 기자조선이 건국하고, 고죽국이 통치하고, 이후 한나라가 위만조선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사군을 설치한 곳입니다.요서성은 진시황이 이쪽 지역을 요서군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춘추시대에는 고죽국이 있었으니 ‘고죽성’이 있었던 것이고, 고조선 때는 조선이 있어서 ‘조선성’이란 이름이 있었던 겁니다.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중국 동북지방 전체가 우리 역사이고, 우리 조상의 무대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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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골문자(좌)와 이보다 앞서는 골각문자(우). |
-동북아에서 우리 민족이 최초로 국가를 세웠고, 은나라도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웠다면 은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우리 민족이 만든 글자로 봐도 됩니까.
갑골문자에서 4000천자(字)가량이 해독되었는데, 미해독 문자도 상당합니다.
이 정도의 문자가 통용될 정도라면 이미 이에 앞서 갑골문을 탄생시킨 문자 체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문자는 당연히 우리 민족이 만들었습니다(수년 전 산동성 창려현 지방에서 갑골문자보다 1000여년 앞선 골각문자가 발견됨=편집자주).
한자(漢字)는 갑골문자를 한족이 더욱 발전시킨 문자입니다. 정리하면 한자는 당연히 갑골문을 토대로 한족이 발전시킨 글자이지만, 이 문자를 발생시키고 문명 자체를 연 서광은 우리 민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명의 뿌리이자, 시초를 열어준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단군은 신화이고, 기자는 허구이며,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니까 우리 민족은 타율적이며, 지배를 받아야 하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것이 식민사관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관을 아직도 학교에서 그대로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꾸려면 교과서를 개정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자료를 정리해 놓아야 교과서를 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서 작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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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백강 원장이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백이 숙제가 독서하던 곳'이라는 표지석 옆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심 원장은 "고죽국은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운 나라"라고 말했다. |
저는 북경 북쪽의 ‘조하’가 ‘조선하’라는 것을 밝히는데 3개의 자료를 인용했지만, 후학들이 더 연구하면 더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고전서>는 동양 삼국이 공히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사고전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바로 세우면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던 여러 난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를 통해 한국사의 근간을 바로잡고, 동북공정에 대응하며, 한중(韓中) 양국이 대립각을 세우는 여러 문제에 대해 상호 우의(友誼)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 학파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그러한 흐름을 주도하기 어렵다면 국민이 나서야 합니다. 요사이 한국 사회에 인문학 바람이 부는데 인문학의 핵심은 역사입니다. ‘역사광복’을 위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지혜와 힘을 모을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