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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보다 높이 올라섰다-강은교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6.03|조회수18 목록 댓글 0

범어에서 보내는 문학편지 -유혹들

 

너는 보다 높이 올라섰다

 

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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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적 설득의 문제를 생각한다.

시적 단어는 지시적 단어와는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 출발선부터 다른 셈이다. 지시적 단어가 출발하는 곳은 화자의 외부이다. 그리고 그것이 닿는 곳도 화자의 외부이다. 그에 비해서 시적 단어는 화자의 내부에서 출발한다. 시적 단어가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면, 그래서 단어를 던지는 자와 단어를 받는 자 사이에서 ‘관계’가 성립한다면, 지시적 단어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서 양자의 수직선 상에 놓이며, 동시에 지시적 단어는 기호로서의 출발선에 서 있다가 지식의 기호로서의 타자의 외부에 닿을 뿐이다. 뿐 아니라 시적 단어가 수정될 수 없다면, 그러면서 끊임없이 확대되는 것이라면 지시적 단어는 끊임없이 수정, 재생될 수 있으나 변용·확대될 순 없다. 정답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이런 구조는 더욱 분명해진다. 변용을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면 지시적 단어는 ‘관계’ 속에서는 결코 답을 구할 수 없이 항상 정답이 있는 외재적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까. 시의 단어가 해석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해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수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 아니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는 무한한 ‘관계’가 성립되며, 이는 ‘관계’ 사이의 설득이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시적 설득을 감정이입 ‘만’으로 흔히 생각한다. 또는 심한 경우에는 감정이입 ‘쯤’으로. 그러나 시적 설득은 내재적 초월을 일으킴으로써 ‘관계’를 확대, 확장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도 확장, 확대하는 것이어야 하리라.

지시적 단어의 사용은 내재적 초월성의 설득을 일으킬 수 없다. 늘 수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시적 단어는 힘센 단어이기는 하지만 설득하지는 못한다. 주입될 뿐이다. 지시적 단어가 수직적인 정답의 단어라면, 시적 설득의 단어는 수평적 관계의 단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 설득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관계’ 사이에서만 변용 · 변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지시적 단어는 홀로 존재한다. 그것은 관계를 회피할 뿐 아니라 ‘관계’ 위에 서려고 한다.

 

#

2)

오랜만에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읽는다. 자유가 일생의 주제였던 그. 그의 “Spritual Exercise”.

 

*순간순간 모든 것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라. 천천히 그러나 열정적으로.

 

*빛도, 밤도 아닌 나, 하지만 불꽃 하나가 나의 내부를 쑤시고 나와 나를 태운다. 나는 빛이 삼켜버린 밤이다.

 

*언제나 쉬지 말고 자만하지 말며 길들지 말라. 어떤 습관이 편안하게 느껴지면 곧 그것을 때려 부수라. 모든 것 중 최대의 죄악은 자만

 

*우리는 삶이라는 이 선술집에서 한 테이블에 앉아 한병의 술을 들이키고 있다.

 

*그 외침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말하고 있는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조상들이 그대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욕망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미래 세대의 후손들이 그대의 가슴을 빌어 갈망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나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음을. 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나는 자유. 이성으로부터도, 마음으로부터도. 나는 보다 높이 올라섰다. 나는 자유롭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한 것. 그 이상 아무것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자유를 찾아 줄곧 나는 헤매어 왔으니.

 

#

3)

언젠가 썼던 글을 생각한다. <시인의 말> 같은 원고였을 것이다.

 

󰡐전체가 부분이 되는, 부분이 전체가 되는

마을 하나, 마당 하나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글의 마지막은 나의 단말마 같은 외침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바라건대,

 

시여, 달아나라. 시여, 떠나라, 시를.

그때 시는 비로소 일어서리니.

 

전체와 부분이 ‘관계’로서 읽는 이의 가슴에서 분화작용을 일으키는 내재적 초월성의 단어로 짠 금빛 초록의 마당, 그 마당의 나무, 풀, 아침의 이슬, 또는 부는 바람 하나하나는 전체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전체인 마당. 전체이면서 부분인, 부분이면서 전체인 그런 시, 관계의 ‘벽돌 단어들’, 그럴 때 ‘벽돌 단어’ 한 장이 빠지면 그 전체가 무너지리라. 나의 시도 그래야 하리라. ‘단어 한 장’이 빠지면 와르르 무너지리라. 무너져야 하리라.

 

내 시는 벽돌시가 되어야 하리라. 전체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리라. 따라서 한 부분이 전체를 암시할 수 있어야 하리라. 벽돌단어 한 장 한 장이 단단히 서로를 딛고 서 있으면서 전체가 되는 마당. 벽돌 단어는 내 전체 시의 맥락 속에 있으며, 뿐 아니라 한국 현대 시의 전통 속에 한 부분으로서 있을 수 있는 시, 그러고 보니, 젊은 시절 잘 이해하진 못했으나 푹 빠져있던 T.S 엘리엇의 전통론에서 아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다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나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가당찮은 생각도 한다. 베르너가 안개 속의 하이킹을 하다가 부분부분 밝아지는 바위벽을 보면서 산을 내려 갈 수 있는 산의 전체 지형을 알아챈 것 같은 생각.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너는 제발 시 같은 시를 쓰지 말아라. 시 같은 시의 늪에 빠지지 말아라.

 

#

4)

내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이가 이메일을 해왔다. 몇 가지 질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첫 번 질문 

p.116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윗줄의 사람들이 서로 입술을 부비는 겁니까아니면사람들이 자기 입술을 어둠에 부비는 겁니까?

 

나는 메일을 읽는 순간 좀 당혹했다. 한 번도 이 시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시를 다시 써본다.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 6,~8>

 

그 메일의 답장을 쓰면서 아마도, ‘사람들이 자기 입술을 어둠에 부비는 겁니다’라고 답했었던 것 같다. 주어가 명확한 영어의 특성상 그런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순간 나는 문장을 정확히 쓴다는 것이 은유가 많은 시라 할지라도 중요하지, 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이 흐른 뒤 이 시에 대한 질문 이메일이 또 왔다.

 

한 어둠에여기서 이란 a, or same?

 

나는 대답하기가 힘듦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두 개의 의미가 다 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마도 시어의 이중성, 은유 운운하다가 그만두었던 것 같다. 나는 시도 하나의 설득이라는 문제에 쿵 하며 부딪혀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질문도 있었다.

 

p.204 "밤새도록 꿈꾸는너 때문이다"-> ''가 꿈꾸나요내가 밤새도록 네 꿈을 꾸나요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

 

<별똥별> 전문

 

‘나’라는 화자가 생략되었다. 라고 나는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번역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꾸는’이라는 시어는 ‘꿈꾸어지는’이라는 수동태적 의미를 가지게 썼으면,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썼을 때 이 시의 긴장성은? 나는 또 설득이라는 문제에 쿵 하며 부딪혀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시적 설득, 완전히 실패다. 읽는 이의 내부에서는 첫째 행의 단어와 두 번 째 행의 단어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뿐 아니라(관계적 설득이라기보다는 강요적 설득의 시도), 번역하는 이와 작가인 나 사이의 ‘관계’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단어 속에서 읽는 이의 가슴에 닿는 촉매 작용(일리엇이 많이 쓴 용어)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감정이입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메시지를 강요한 것이다. 마치 정답인 것처럼.

 

#

5)

지난겨울을 그림 그리기로 보냈다. 내 시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달라는 요청이었다. 나의그림과 육필시를 나란히 걸겠다고. “강은교의 그림과 시”라는 기획전을 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나도 지금까지 몰랐던 그 시의 단어,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가 눈앞에 화안히 열려지는 경험이 그것이었다. 잘못 끼어든 단어가 확연히 나의 눈에 드러나 보였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에서 시적 긴장이 오며, 그 긴장은 나를 깊이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 관계 사이에는 우연의 필연화라는, 요즈음 내 고민의 한 답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있었다. ‘우연’이라는 나의 구두선같은 명제, 우연 위에 선 필연의 벽돌단어들, 그것들이 서로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관계’의 마당.

 

아무튼 지난 겨울은 축복이었다. 하긴 모든 시간이 축복이며, 모든 추억이 축복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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