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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이 만난 시인

부부시인 - 배동욱, 정선영 시인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6.04|조회수421 목록 댓글 0

Focus Interview

사이펀의 시인을 만나다 : 배동욱, 정선영 시인

 

시인 부부로 살아가는 창작의 세계를 보여주는 정선영, 배동욱 시인

 

*인터뷰 진행: 석상진 시인

 

 

[프롤로그 - 만남]

T.S. 엘리엇이 4월을 두고 뭐라고 했든 나무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한 아름씩의 꽃다발이 되어 우리들로 하여금 숙였던 고개를 들게 만드는 참으로 행복한 이 계절입니다. 지난 국회의원 총선거일인 4월 10일 오후 2시경 서울시 도봉구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전망이 탁 트인 카페 2층에서 그리고 인근에 있는 김수영 문학관에서 배동욱 시인과 정선영 시인을 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두 분은 부부 시인이십니다. 저는 작년 가을 무렵 《사이펀》에서 주최한 행사(김정수 시인, 리호 시인 문학토크)에서 스치듯 두 분을 멀리서 뵌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인사를 드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의 서로 닮은 듯한 부드러운 미소와 환대 앞에서 한껏 긴장했던 마음은 곧 이 봄날처럼 금방 누그러졌습니다. 지면 관계상 두 분과 나누었던 인사말 등은 생략을 하고 본격적인 인터뷰 대화 내용을 옮깁니다.

 

석상진 배동욱 시인께서는 작년 12월 두 번째 시집 『저 무수한 빛 가운데 빛으로』(작가마을)를, 정선영 시인께서는 역시 작년 11월 일곱 번째 시집인 『빨랫줄에 걸터앉아 명상 중입니다』(작가마을)를 펴내셨습니다. 두 분 모두 현재의 시점에 다다른 시의 여정에 있어서 처음 시를 접하게 된 사건, 등단(데뷔), 그리고 지금까지 시집 출간 과정 등 본인의 ‘시의 역사’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배동욱 제 詩歷이래야 별 것 없습니다만... 최초는 고1 때의 교내백일장 입상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고교생들의 문학회에서 활동하고 대학의 문학 서클활동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시 쓰기가 대학의 학교신문이나 직장의 사보에 작품을 발표하거나 시동인활동으로 계속되었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등 시를 쓰면서도 등단이나 시집 발간에는 무관심했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정선영 시인 등과 활동하던 동인모임의 한 동인으로부터 문예지 추천을 권유받았지만 그저 성가신 일로만 여겼지요. 그러다가 거의 20년이 지나 문협 모 지부에서 활동할 당시 지부장의 권유에 못 이겨 계간지로 등단하게 되었고 문협의 경기신인문학상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등단 후에는 시를 발표할 지면도 늘고 발표한 작품들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시집 발간은 생각도 안 했는데, 정선영 시인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첫 시집을 내게 되었고 그렇게 등 떠밀려서 제2시집까지 펴내게 된 것이지요. 정 시인에게 그랬습니다. 시인이 시집을 내는 것은 그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賞이라고.

 

정선영 시인

 

정선영 제가 처음 시를 접하게 된 것은 물론 책이었죠. 저희 친정아버지께서 예전에 고물상을 하셨는데, 그 시절엔 고물상으로 세계문학 전집에서부터 20권짜리 우리나라 전설 모음집, 소설, 만화책, 동화 등 굉장히 많은 책들이 들어 왔는데, 아버지께서는 그 책들을 모두 방으로 들여 놓고 저더러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제가 한 권 두 권 다 읽고 난 후에야 파지로 묶어 실어 내셨죠. 아마 그것이 첫 번째로 문학과 가까워진 계기였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는 1987년 사상공단 근로자들을 위한 문학모임인 “응모시”에 참여하게 되면서 시에 첫 발을 내디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썼던 시 중 「길」이라는 시를 김광자 선생님이 보시고 “이 한 편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참 잘 썼다.”고 해 주신 것이 또 용기를 갖게 해 주었고요. 세 번째는 1999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 빈자리를 견디기 위해 등단도 하지도 않은 채, 첫 시집 『우울한 날에는 꽃을 산다』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첫 시집 속의 시 한 편인 「유다의 항변」을 한 청년이 읽고 자살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가방 속에 넣고 다니던 수면제를 모두 버리고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말을 어떤 사람이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 ‘아, 시의 힘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몇몇 가지가 계속 시를 쓰게 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고향을 떠나올 때 아버지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자가용을 몰고 가겠다고 하셨는데,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돌아 가셨는데, 저는 아버지께서 의미 없는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증명하고 싶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왜 시를 쓰세요?” 물으면 “아버지를 위하여”라고 하곤 했어요. 그리고 2001년 《한맥문학》에 정진채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했습니다. 그때도 신인상 소식을 듣기 하루 전에 꿈을 꾸었지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께서 복숭아꽃 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제 머리맡에 다소곳이 앉아 웃으셨어요. 다음날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는 시는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힘이었고,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정신의 에너지였죠. 슬프거나 괴로울 때, 기쁠 때에도 마음 안에 휘몰아치는 비바람이나 폭풍우, 빛나는 햇살까지 문자로 표현하고 나면 마음은 점차 잔잔해지고 나를 돌아보게 되어 미치지 않고 정신을 차리게 하죠. 그러다보니 한 권 두 권 벌써 일곱 권의 시집을 내게 되었네요.

 

 

석상진 지금까지 두 분의 ‘시의 역사’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두 분의 시 세계에 대한 논의에 앞서 역시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에 특별히 부부 시인을 모셨기에 이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두 분의 ‘인연의 역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 어떻게 두 분께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셨는지요?

 

배동욱 시인

 

배동욱 1988년 시동인 모임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라면,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 매우 매혹적인 책의 표지를 보았다고 할까요? 읽고 싶지만 너무 두꺼운 책이었다고 할까요? 그때부터 또 다른 시동인 모임에서 다시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 25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서로의 삶을 열심히 살았지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멈추지 않고 시의 길을 걷고 있었고 각자 걷던 그 길을 이젠 10년이 넘게 함께 걷고 있습니다. 제가 그에게서 ‘고단한 슬픔’을 보았듯 그도 제게서 그 어떤 슬픔을, 김현승 시인의 ‘견고한 고독’보다 더 견고한 슬픔을 서로에게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정선영 제6시집 『책상 위의 환상』 중 「서로를 읽는 시간」 일부로 이야기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깊고도 뜨거운

계곡을 지나 강이 되는

바다로 흘러

물과 물이 섞여 하나가 되는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한 쌍이 되는 책

 

(中略)

 

당신과 나의 책은

얇고도 두껍고

얕고도 깊다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읽는다

 

(-서로를 읽는 시간부분 / 정선영 책상 위의 환상)

 

 

석상진 이 질문은 정선영 시인께 여쭙고 싶습니다. 언제 어떤 순간에 ‘아, 이 사람과 함께 해도 되겠구나’ 싶으셨는지요?

 

 

정선영 글쎄요. ‘아, 이 사람이다.’라는 드라마틱한 것은 아니었어요. 처음 동인으로 활동할 때, 저는 시를 잘 모를 때였고, 배동욱 시인께 자문을 구하는 정도. 그러고 술과 사람, 시가 좋아 만나다가 또 헤어지게 되었고, 잊고 있었는데 2012년 어느 날, 동인활동을 하지 않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배시인과 어떤 인연이기에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 또 만나게 되는 걸까.’ 싶었죠. 그리고 든 생각이 ‘그럼, 가는 데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석상진 시인이 약속장소인 김수영문학관 앞에서 두 시인을 기다리며

 

석상진 특히 정선영 시인의 시집 『슬픔이 고단하다』에서는 배동욱 시인께서 직접 발문을 쓰셨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시’라는 같은 분야(장르)에서 두 분 모두 시인으로 활동하는 경우 장점과 단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배동욱 생각나고 보고 싶을 때 만나는 것과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늘 함께 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 경우엔 시란 무슨 고상한 취미이거나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삶이 곧 시이고 따라서 시가 삶이지요. 시와 함께 사는 일 - 참으로 귀하고 귀한 일이 아닐까요?

 

 

정선영 원래는 배동욱 시인의 짧은 감상을 곁들이는 것으로 하고, 다른 분께 해설을 부탁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작가마을 배재경 발행인께서 그러면 중복이 되는 것 같다고 배동욱 시인의 감상만 싣는 것이 좋겠다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시의 길을 함께 가는 것에 장점이라면 제 시의 첫 번째 독자이면서 영원한 팬이 한 사람 있다는 것과 서로의 작품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다른 친구를 두지 않아도 술과 문학의 친구를 항상 곁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점은 시가 써지지 않을 때 “시 안 쓰느냐? 시를 안 쓰는 시인이 시인이냐.”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있고 싶고, 책만 읽고 있고 싶은데 닦달을 하죠.~^^

 

 

석상진 시 외적인 사적인 영역의 질문을 한 가지만 더 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은 동료 시인으로 그리고 부부의 인연으로 서로를 가까이 지켜 봐 주며 살아오셨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바라볼 때 상대방의 장점을 세 가지씩만 간략히 말씀해주십시오.

 

 

배동욱 장점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입니다. 시를 떠나서 생각한다면 우선, 늘 부족하다 모자란다고 하는 겸손함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들 수 있습니다. 1년에 책을 100권 이상 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BB 즉 Book Bug 책벌레라고 놀립니다.) 저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요. 또한 정 시인은 peace maker입니다. 놀라울 만치의 너그러움으로 어디서건 타인의 얘기에 귀를 잘 기울이고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다독이기를 잘 합니다. 세 번째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면 서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후 가계에 보탬이 되겠다고 망설임 없이 김밥집, 야채가게 등에서 일하기도 하고 도서관 사서 보조일도 했답니다. 가진 바 장점이 참으로 많은 사람인데 요것만 말씀드릴게요.

 

 

정선영 첫 번째 배동욱 시인의 장점은 상대방을 고래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잖아요. 두 번째는 배려심입니다. 많은 것을 넘어서 무조건적으로. 세 번째는 저에게 만큼은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저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죠. 때때로 그런 배 시인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릿해지기도 합니다.

 

 

석상진

 

나는 에서 를 보며, 그것을 로 써 왔다. 아르고스의 눈으로 성찰하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감내하며, 시지프스의 절망을 일상으로 삼고, 휘닉스처럼 부활하고자 했다. 삶 가운데 죽음을 함께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시간들, 허무로부터 벗어남이 아니라 견고한 허무가 됨으로써 마침내 자유를 구하고자 한 그것이 내 詩作을 견인해 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나를 놓아줄 그날이 언제일까? 나는 이제 무척 담담하다.

 

(-시인의 말부분 / 배동욱 아르고스, 눈을 감다)

 

저는 위 말씀이 세상을 향한 동시에 본인 자신을 향한 ‘시인의 선언(宣言)’으로 의미가 받아들여졌고, 그 결연함이 머리카락 끝까지 주뼛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시인께서 자신이 가진 늘 깨어있는 아르고스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요? 그렇다면 이제 와서는 시집 제목을 『아르고스, 눈을 감다』라고 명명하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배동욱 17살적부터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물음은,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에 의미가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따라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아르고스의 눈을 뜨고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로 써내는 일, 적어도 그런 작업이 지속되는 동안은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요. 그러다가 되돌아보았습니다. 아르고스의 눈으로 나는 무엇을 보았던 걸까요? 내 실존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소리는 ‘그만하면 됐다. 이젠 너를 놓아주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17살에 만났던 반야심경, 쇼펜하우어, 사르트르, 카뮈 등등 그들은 아직도 저랑 같은 동네에 살지만, 꽤 오래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이젠 아르고스의 집에도 아르고스는 살지 않습니다.

 

 

석상진

 

예쁜 칠을 한 당신의 손톱이 예뻐서

당신을 사랑한 것은 아니라고

당신이 선 자리 뒤편의 장밋빛 노을이

당신을 사랑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당신을 사랑한 것은부분 / 배동욱 아르고스, 눈을 감다)

 

그럼에도 시의 면면마다 심심찮게 ‘사랑’이란 단어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사랑’이란 단어는 시집 곳곳에 등장합니다. 겉으로는 냉철하지만 가슴 한편 따뜻한, 아마도 시인의 이십대 적 철학도의 모습이지 않으셨을까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이 질문은 정선영 시인께 묻고 싶습니다. 배동욱 시인은 평소 ‘충분히’ 로맨티스트이신가요?

 

인터뷰 도중 카메라를 보고 잠깐!

 

정선영 네, 충분히 로맨티스트이지요. 가끔 지나쳐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항상 기대 이상이라 이제는 제가 “그만!”이라고 비명을 질러요.~^^

 

 

석상진 한편, 시집 『저 무수한 빛 가운데 빛으로』에서 ‘江, 바다, 비우다, 빈 들, 엑소더스, 사라지다, 잊히다, 색즉시공’ 등 단어의 쓰임을 통해 언뜻 이전 시집과의 연상선상에 놓여 있는 것 같지만 보다 확장된 시상의 폭을 전개하고, 마찬가지로 ‘아버지’, ‘어머니’, ‘누이’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도 더 짙게 노출되는 등 더더욱 밀도가 더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번 시집을 통해 어쩌면 시인의 ‘상실’에 대한 작업도 포함된 것일까라는 개인적인 궁금증도 들었구요. 이와 같은 시적 배경과 관련하여 시인 본인이 직접 말하는 해당 시집 전반에서의 시적동기 혹은 자기분석을 듣고자 합니다.

 

 

배동욱 사는 일은 어쩌면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 아닐까요? 생로병사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얼마나 어떤 모습으로 내 존재의 스러짐을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일 뿐. 이제는 돌아와 언젠가 모두 스러지고 말 그 무수한 빛 가운데 또 하나의 빛으로 그 스러짐들을 하나하나 응시하고자 합니다. 모질고 모질게 불어 닥치는 슬픔을 견디면서. 그렇게 산다는 일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가 볼 것입니다. 두 번째 시집은 아마도 그쪽으로 가는 차를 기다리는 버스정류소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석상진

 

길을 걸었다 발길에 차이는 나뭇잎을 들춰봤다

나뭇가지 위 새들에게도 물었다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달아나는 바람이 수상하다

아슬아슬 자전거가 비켜 간다 안장 위에 시간이 앉아 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나지 않는데 잃어버렸다는 생각

주머니가 비고 가슴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

눈이 뻑뻑하고 머릿속이 스산하다 가슴이 바스락거린다

물기 없는 막막함 화르르 재가 될 시간이다

 

(-마른 시간부분 / 정선영 슬픔이 고단하다)

 

정선영 시인께서는 어떠한 ‘때’, 주로 어떠한 자신의 ‘상황’에서 시를 쓰시는지요? 시집에 술, 막걸리 등의 단어도 고명처럼 간간이 등장합니다. 평소에 약주(술)를 좀 즐기는 편이신지, 혹 주량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정선영 저는 일상 속에서 오는 느닷없음, 또는 찰나로 머리를 한 대 치고 가는 생각들이 있을 때, 그리고 대화 중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의 느낌들을 메모합니다. 그리고 그 메모들을 들춰보며 생각에 집중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시가 될 때도 있고, 묻히거나 지워지기도 합니다. 술을 좋아합니다. 20대에서 50대까지는 소주 4~5병 정도를 마셨고, 술 취한 김에 객기도 많이 부렸어요. 젊은 날 불합리한 일들에 패악을 부렸죠. 어떻게 대항해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패악은 벽을 치고 되돌아와 저를 때렸죠. 상처받고 피 흘리는 내게 사람들은 무언으로 순종을 강요했어요. 저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견디기 힘들었죠. 제는 1병 정도면 기분 좋을 만큼입니다. 술의 양도 나이는 이길 수가 없더라구요.

 

 

석상진

 

당신 굳이 내 속을 알려고 하지 마시라 내 안에 부글거리는 말들이 당신에게 닿지 못해도 외로워 마시라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 모르는 것은 어깨가 시려 와도 먼발치 바람인 듯이 스쳐 가시라

 

(-난해함에 대한부분 / 정선영 빨랫줄에 걸터앉아 명상 중입니다)

 

시인께서는 매우 섬세하고도 감각적인 시선과 관점으로 (가끔은 건설적 의미의 냉소적일지라도) 우리 주변 현상(現象)으로서의 세계와, 사물과, 인물들, 사건 등에 한계와 경계를 두지 않고 두루 살피고 그것을 하나하나 채록하듯이 시로써 표현하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시의 근간에 흐르는 정서 혹은 삶에 대한 주된 관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이라는 우물 속에서 시라는 두레박을 통해 무엇을 길어 올리고자 하는 과거와 현재진행형의 시 쓰기 과정이신지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시적 성과와 관련된 자기평가의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정선영 기억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현재를 살고 있지만 저라는 한 사람이 형성되기까지 과거가 있었고, 그 과거들이 말을 걸지요. 잊지 말아 달라고. 그러면 저는 과거와 현재를 손잡게 해서 말해보라고 합니다. 거기엔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내가 만났고 스쳐 지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사물들과 사건들까지도 그들이 말을 듣는다고 상상을 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것들의 말을 대신 한다는 생각으로 씁니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그들과 저의 차이는 문자로 표현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 생각이 사소한 것들에게까지도 눈길을 주게 되고, 제가 살아 있는 시간 동안 주위에 있는 모든 것과 생각을 주고받고 싶은 거지요. 그러면 그 모두와 모든 것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니까요. 성과와 자기 평가라는 말에는 글쎄요, 지금까지 죽지 않고 잘 견뎌냈다.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일까요.

 

 

석상진 까마득한 한참 아래 후배의 입장에서 선배 시인께 드리고픈 질문입니다. 시가 잘 안 풀릴 때,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시에 대한 회의가 엄습하는 순간, 시 쓰기에 있어서 심신이 고갈된 느낌의 번 아웃이 찾아올 때 두 분 시인께서는 그럴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하시는지요. 아울러 시를 써 오는 동안 본인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거나 도움이 되었던 사람(인물), 지인들, 사건, 책 등이 있다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정선영 어떤 시기에는 도저히 더는 쓸 수 없다는 막막함에 절망할 때가 있지요. 저 같은 경우 그럴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을 잡니다. 잠을 자는 이유는 가끔 꿈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있어서요. 꿈을 꾸고 난 뒤 쓴 시들이 몇 편 있거든요. 꿈이라는 것이 저의 무의식에 감춰진 어떤 것을 알려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의 욕망이라든지, 슬픔 같은 것. 미처 인지하지 못한 그 무엇을 암시하는 기분이 들어 자고 난 후 꿈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또 무한정 소설을 읽기도 하고요. 그러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을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으며 갈등하는 심리 상태를 함께 느끼고 공감하면서 다시 힘을 얻곤 합니다. 시 세계의 영감을 주는 것은 모든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저의 친정아버지께서 생전에 고물상을 하셨는데 고물상에 들어오는 수많은 책들이 제게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을 갖게 했어요. 아버지께서는 고물(중고)로 들어온 책들을 제게 건네주시면서 읽어보라고 권하셨으니 아버지가 저의 첫 번째 문학 스승이라고 해야겠네요. 다음은 세상이겠죠. 세상 모든 사람들과 현상, 사물, 자연들이 스승인 셈이지요. 그리고 지금은 모든 시인들이고요. 그분들의 시를 읽으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서로의 작품세계는 달라도 상대의 문학을 존경하고 예우한다는 정선영, 배동욱 시인

 

 

배동욱 다른 분들도 그런 경우가 있겠지만, 제 경우는 대개 저 자신 속으로 침잠하는 일입니다. 그리곤 제 삶 자체를 들여다봅니다. 시는 결국 제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시가 써지지 않을 땐 먼저 삶을 들여다보고 시의 길이 어디서 막힌 건지를 가늠해 봅니다. 시를 써 오는 동안 도움이나 영향을 받았던 사람은 없지만, 정선영 시인과 함께 하면서부터는 알게 모르게 정 시인을 염두에 두는 것 자체가 결과적으로는 시작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책으로 말씀드린다면 20대 초반 이후로는 책에서 영향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그렇게 자신을 길들여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길은 다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해왔으니까요.

 

 

석상진 덧붙여, 시는 자신에게 어떤 도구인가요? 그리고 자신의 시를 어떻게 읽어 주길 바라시는지요?

 

 

정선영 ‘시’는 나를 나로 있게 합니다. 20대, 30대, 40대를 생각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 속에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런 절망 속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시’가 저를 붙잡고 있어서였을 겁니다. 저의 시를 어떻게 읽어 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독자들이 읽고 느끼는 그대로 읽으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시들이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여 제 손을 떠나 이소했으니, 그 시들이 가 닿는 대로 살거나 소멸 하겠지요.

 

 

배동욱 시는 제 삶,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굳이 말씀드린다면 삶과 모든 것을 느끼고 통찰하는 도구라고 하겠습니다. 저의 시를 어떻게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은 드리기가 좀 그러합니다만, 단지 글의 밑바닥에 흐르는 어떤 의지나 갈증 같은 것에 시선을 두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석상진 혹시 시 이외의 아끼고 즐기거나 좋아하는 취미나 활동, 병행하시는 작업 등이 있으신지요? 특히 정선영 시인께서는 본인과 배동욱 시인의 시집 표지그림을 직접 그리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정선영 표지그림에 대해서는 사실 시집 『슬픔이 고단하다』부터 시작되었는데요. 3~4일 전에 만났던 시인 한 분이 느닷없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카톡으로 받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잠시 말을 잊었었어요. 그러고 한동안 마음이 안정이 안 되었는데, 배동욱 시인이 그림을 한번 그려보라고 권하더라고요. 문득 들었던 생각이 점, 선 하나 하나가 사람의 목숨이 아닐까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한 열흘을 자잘한 선을 긋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나니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고 그 다음부터 가끔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그것이 배동욱 시인과 저의 시집 표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취미는 헌옷을 뜯고 잘라서 제 가방을 만들거나 쿠션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고요. 또 나무로 뭘 만드는 것도 좋아하는데 지금은 손목이 아파 나무 자르는 일은 잠시 중단 상태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석상진, 배동욱, 정선영 시인이 김수영문학관 앞에서

 

 

배동욱 저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할 만치 취미라고 부를 만한 그런 부분들이 전무합니다. 그동안 틈틈이 시동인 활동이나 문학단체에서 함께 했던 이런저런 일 외에는 따로 병행하는 활동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집에서 청소하기, 설거지하기, 빨래를 하거나 집안 이곳저곳 정리정돈 하는 걸 좋아해서 틈만 나면 그런 것에 매달리긴 합니다만.^^

 

 

석상진 앞으로 두 분의 삶의 영역과 시 쓰기(시 세계)에서의 계획 또는 방향성(지향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이펀》 독자들께도 마무리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배동욱 읽는 이가 살아갈 힘을 되찾게 되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시를 쓰고자 합니다. 시 쓰기란 참 개인적인 작업이긴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면도 있으니까요. 앞으로의 詩作은 예를 들어 정선영 시인의 한 줄 詩 「유다의 항변」을 생각합니다.

 

왜 하필 저였습니까?

 

(-유다의 항변전문, 정선영 우울한 날에는 꽃을 산다)

 

이 한 줄 시가 한 젊은이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쓰는 시도 읽는 이에게 힘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습니다.

 

 

정선영 앞으로도 지금처럼 제게 말 걸어오는 모든 것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부드럽고 밝아지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쓰다가 머뭇거려지면 쉬어가면서요. 시는 시인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물결입니다.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응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이펀》 독자들께는 모쪼록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두 사람의 시선과 문학은 동반자이자 동료로 부부 이상의 지향을 갖는다.

 

[에필로그 - 인터뷰 후기]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우이신설선으로 환승을 하고 북한산우이역에서 하차를 해서 약속 장소인 카페를 향해 북한산 둘레길을 잠시나마 걸었습니다. 벚나무 가지에 푸릇한 잎사귀가 돋아나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꽃이 진 것은 아니었고 곳곳에 산진달래도 피었습니다. 그때 마치 어릴 적 학창시절에 소풍을 가는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약속 장소에서 두 분 시인님을 뵙고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간간이 웃음꽃을 피우며 대화에 또 한 번 푹 빠졌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저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나는 봄 소풍을 다녀온 것이 맞습니다. 우리의 세상살이에서 서로에게 베푸는 따뜻한 미소와 환대를 가진 사람이 봄꽃이고, 그런 사람과 나누는 대화 시간이 곧 즐거운 소풍의 한때이라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두 시인 분들과 나눈 대화가 훨씬 풍부하지만 지면 관계상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질문-답변의 내용을 싣지 못해 못내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 한참 모자람이 많은 후배의 서툴고 미흡한 질문 하나하나에도 포용적으로 성심껏 답을 해주신 두 분 시인님께 그리고 두 분 시인님을 모시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사이펀》에도 깊은 감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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