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황지형
꽃사과나무에서 외
꽃잎이 떨어지는 바람에 융단을 깔아버린 꽃밭이 되어버리거나, 꽃이 떨어져서 빨갛게 익게 되는 사과의 풍경은 위독한 일이죠. 어제는 꽃잎의 길이와 넓이를 재단하는 일을 하는 이솝우화를 만났고, 생활지원금 카드를 긁지 못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없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다는 언니는 연장 업무로 주말을 저당 잡혔죠.
매일 크리스마스 크리스탈!
지금 당장 도려내지 않으면 곪아버리거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사과를 하죠. 전혀 예상치 못한 핑계를 대기 위해선 땅에서 떠오르게 될 공중부양을 해야 해요. 계단 하나는 뛰어넘거나 중력의 법칙에 복종할 필요는 없어요. 귀신으로 돌아갈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아직은 동이 트기 전이에요. 얼굴 붉히는 사람들에게만 한꺼번에 멍든 사과가 생기잖아요. 언니는 온종일 엉덩이를 닦느라 병원처럼 침울하고요. 쉴 틈을 내어주지 않는 엄마는 마귀할멈을 떠올리게 하죠. 이솝우화의 교훈이라뇨! 쌍코피가 계속 떨어지지 않나요?
딸국질의 여파가 어디를 파고드는지 몰아쉬는 허파를 점검합니다. 무관심과 무감각의 파도가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스며듭니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돌멩이를 느끼도록 내 몸은 조금씩 조금씩 연기를 지피고 있구요. 아주 천천히 내게서 달아난 바람을 고용해 꽃사과를 피게 할 파란입니다.
병원 투숙객들은 배신의 폐허 사이에서 사과를 쪼갭니다. 실룩샐룩 오리 궁둥이를 닮은 사과들은 과도에 베어져 한입에 먹혀요. 어디에도 닿지 않는 서늘함은 천장에서 들려오는 허연 입김의 한숨 소리입니다. 처음으로 꽃나무 사과를 심었던 아버지는 아직도 배나무에 사과를 접붙이는 중입니다. 나는 침실 문을 두드린 깎은 사과를 먹고요. 아무 말도 없이 달아나버린 일곱 난쟁이를 찾아다니며 백설공주와 기운이 생기는 얘기를 할지도 모르고요. 험담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곱 번째는 행운을 안겨주는 숫자라고 말할지 모른다더군요. 파란물을 마셨다고 기고만장하지 말라고요? 기진맥진해지는 것은 기고만장을 금하면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전등이 매일 반짝이는 크리스탈이 되면 됩니다. 켜면 어두워지고 끄면 밝아지기 위해 주변의 점선을 생각하거나, 밤하늘에 공중 부양하는 꽃사과를 돌보는 일 기꺼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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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장미가 핀 침대에 있다 그것을 침대로 옮겨 온 것은 나인데 언제 핀 꽃이었는지 다시 물을 갈아주곤 한다 침대 위에 핀 장미는 봉오리 때부터 장미였지?
병에 핀 장미는 살아 있는 게 아니며 장미꽃을 지켜낼 수 없다 꺾인 장미이거나 다시 필 수 없는 꽃이겠지 장미가 파리를 생산한 적은 없으니까
장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담장을 다 채워 온 지금까지 달의 진행 주기에 있었을 때도 장미가 틀림없다
장미 앞에선 침대에 파묻히지 않아야 한다 파묻힐 수 없기 때문이다 침대 위에 장미는 진실을 위해 사실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용에 떨려 나는 무릎을 껴안는다 누가 침대 위에 장미를 올려두었지? 물론 장미는 예나 지금도 장미다 밤이면 고민하였다가 낮이면 받아들이는 일상으로
화창한 날이면 장미를 꺼내 거실에 두곤 한다 장미가 자유로워 보인다 그것은 잠시도 다른 감정일 수 없는 수다쟁이일지 모른다
몸부림을 쳐도 병 속 일 때가 있다 장미는 한두 송이만 피고 나면 말라버린다 물은 충분한데 나는 목이 마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건 뭐지?
나의 장미는 여전히 침대 위에 놓여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장미는 세 살 아이처럼 보이지만
장미에게는 아이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장미의 줄기를 매만질 때 그것은 땅 밑 어딘가에서 휴식기를 취한 웃음을 보인다
장미는 아이가 아니며 아이가 장미일 수 없지 나는 장미의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장미, 살아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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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형(본명 황말남)
울산출생으로 2009년 《시에》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이시옷은 그게 아니었다』, 『내내 발소리를 찍었습니다』가 있다. ‘변방, 詩作나무, 시in, 시목문학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명지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