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이영주
쓸모 외
옛날 프랑스 소설을 읽었습니다
쟝과 장의 미세한 차이
한낮의 공원 의자에 앉아 읽었습니다
바람과 햇빛이 우수수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쟝의 신발
쟝의 스웨터
쟝의 코트
계절은 종이 안에 있고
시인은 조금쯤 우울해야지
프랑스 소설에 나오는
프랑스 시인의 대사에 밑줄을 칩니다
이 공원은 누군가의 것
나는 그저
버려진 책을 들고 와 읽었습니다
읽으며 생각합니다
갈 곳 없는 자에게도 국적이 있을까
옛 소설은 자주 버려집니다
폐지 상자 안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종이 물을 먹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가끔 슬픔에 빠진 프랑스 배우처럼 말을 합니다
무덤에서 따뜻한 꿈을 꿉니다
쟝의 노트
쟝의 펜
쟝의 소설
꽁꽁 묶어둔 거대한 폐지 탑
구청 공원에 앉아
쟝이 나을까 장이 나을까
종이 물을 먹으면
축축해서 쟝이 낫겠지
읽던 책을 다 읽으면
이 공원을 떠날 수 있을까
백발은 바람과 햇빛에 우수수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시간이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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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락
나는 문 안쪽에 앉아 있다. 철문. 원룸에 갇혀 있다. 밖에는 햇빛이 쏟아지고 나는 내부에 앉아 있다. 나는 내 방 심연에 앉아 있다. 어두운 그림자에 앉아 있다. 문 바깥에서 떠도는 저 발자국 소리.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아 있다. 모서리에서 숨을 참는다. 어두운 그림자는 열쇠 구멍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언제든 볼 수 있다. 어둠에 갇힌 나는 갇힌 채로 노출되어 있다. 현관에는 거울이 붙어 있다. 거울에서 나를 꺼내 바라본다. 세계는 투명하고 거울은 어디에나 있다. 사방에 붙어 있다. 깨진 조각. 그림자가 거울을 들여다본다. 시간이 깨진다.
달려라, 안락사를 앞둔 개처럼, 도시의 모든 검은 눈을 피해 달려라, 세상의 끝까지, 끝에 있는 검은 함정 속으로, 모든 것이 깨져 있는 방 안으로. 우리는 깨진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 적이 있다. 낡은 아파트 복도에서였다. 그림자는 나를 밟고 넘어갔다. 옆 방으로 넘어갔다. 그림자는 자유롭게 넘나든다. 나는 거울을 떨어트린다. 잠가도 잠기지 않는 문 안쪽에서 모든 세계가 깨지고 있다. 옆 방에서 고통스러운 호흡이 새어 나온다. 전혀 모르는 사이인 옆 방과 나는 덜덜 떨고 있다. 왜 각자 자신의 원룸에 갇혀 있는지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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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 『차가운 사탕들』,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 『그 여자 이름이 나하고 같아』, 『좋은 말만 하기 운동 본부』, 영문시선집 『cold candis』이 있다. 미국 루시엔 스트릭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