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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은령 - 하트, 하였던 외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3.16|조회수23 목록 댓글 0

신작시 | 김은령

 

 

하트, 하였던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방바닥에 길게 누워있다

나도 길게 누워

맨발을 교차시켜 누운 햇살 위에 포개어 본다

발가락을 오므렸다 폈다가를 하다가 늙어가는 발이

오래전에 말라죽은 당단풍나무를 기억하게 한다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던,

위로 뻗는 가지는 가차 없이 잘리고

옆으로 나아가는 가지들은

제 방향을 빼앗기고 교차로 비틀리어

층층,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진 단풍 분재

목질의 훼절과 굴신으로 이룬 자태는

하트, 하트 하였으나

고사하겠다는 결심, 그 결단이 아름다웠던……

 

내 발이었으나 내 마음대로 가지 못했음을!

 

입춘 아침,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비쩍 마른 내 발을 비추고 지나가며

하트 대신 존엄을 택한 그 나무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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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나무 아래서 잠깐

 

 

 

 

복사꽃 피는 날에 우르르 몰려가서

환한 그 아래,

왁자지껄 노닐다가 봤다

 

꽃 진 자리, 흰 나비 한 마리 날개를 접고 앉는 것을

나비의 날개는

고이 벗어 개켜놓은 흰 명주 저고리라는 것을

저고리 앞섶 살짝 들춰보면

꽃 피었던 자리와 진 자리의 거리가 아-득, 아득한 것을

그 아득함 이쪽에서 저쪽으로 누군가가 걸어갔을 것이고

나비가 앉았던 자리에 복숭아 한 알 맺히고 있는 것을

 

발그레한 빛 속으로

비로소 열리는 천도天桃, 혹은 천도天道!

 

꿈결인 듯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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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령

경북 고령 출생. 1998년 《불교문예》 등단. 시집 『통조림』, 『차경』, 『잠시 위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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