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권진희
가을볕에는 외
가을볕에는 마른 풀들 머리 쓸어 올리는 소리가 난다
가을볕에는 시집 넘기는 소리가 나고
시옷 자 모양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날갯짓 소리가 난다
가을볕에는 어미 닭이 새끼를 부르는 소리
송아지가 어미 소를 찾는 소리가 난다
가을볕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 모두 떠나보내고
홍시처럼 바알간 눈길로 사진첩을 넘기는 소리가 나고
벽에 걸린 빛바랜 액자 속 하얗게 머리 센 이들이
그 모습 지켜보며 쯧쯧쯧 혀 차는 소리가 난다
가을볕에는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한 이들도
되돌아오지 않는 이들도
바스락 바스락 되돌아오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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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들려주던 그 말들은
이천사백만 년 전엔 고래였을지 몰라
대륙이 하나로 붙어있던 그 시절
넓디넓은 바다 철썩철썩 후려갈기던
꼬리지느러미 커다란 수염고래였을지 몰라
우리에게만 들리는 주파수로
어이 삑삑삑
그리로는 너무 가지마
삐비비 삑삑
이리 오라니깐
소리치며 우리를 다그쳤을지도 모르지
새우 전갱이가 떼지어 몰려다니는 곳을 향해
힘차게 물을 가르는 법과
삼키지 말아야 할 것들과
뱉지 말아야 할 말들과
먼 길 같이 헤쳐가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오래오래 가르쳐주었을 거야
당신이라고 다 알고 있었을까
눈 뒤집혀서 달려드는 난바다
당신이라고 두렵지 않았을까
엄마니까
엄마라서
그저 당신이 아는 대로
아는 데까지 숨 몰아쉬며
길 없는 바닷속 헤쳐갔겠지
가쁜 숨 참다 참다 뿜어냈겠지
이제 당신의 너른 바다 갈래갈래 갈라지고
당신 곁에서 헤엄치던 고래들
소리 듣지 못하는데
되돌아오지 못하는 밤바다 홀로 건너갈 때까지
삑삑 삐비빅
삑삑 삐비비빅
지금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떠돌고 있는지
당신의 깊고 푸르던 그 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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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희
1996년 《사람의 문학》 겨울호로 등단했다. 작가정신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어떤 그리움은 만 년을 넘기지』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