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고선주
봄의 사유 외
나는 너를 봄,
너는 나를 봄
나무에 꽃이 피면
나는 너의 봄을 봄
그해 아버지의 마지막 봄은
겨울이었다
오는 봄 보지 못하고
상강 날
하늘로 긴 여행 떠나셨지
늘 눈과 삭풍, 그리고 찬 그늘 옆에
있기를 바랐으나
겨울은 끝내 봄을 거부했다
봄은 말로 오는 게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고투를 다한 뒤
소리없이 오는 게 봄이다
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한 줄기 햇살로 오는 것이다
고양이가 늦잠 자는 바깥이면
봄은 충분하다
강아지가 꼬리 흔들며 산책가는 바깥이면
봄은 흐드러져도 좋다
나무에 꽃이 피면 봄이 아니라
너의 삶이 덜 고단하면 그것이
봄인 것이다
나는 너를 봄,
너는 나를 봄
서로 마주 보는 봄
오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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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미학
나는 길을 잃었다
한두 번이 아니다
가고자 하는 길이었으나
끝내 정글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구나 교과서대로 살아지지 않는 세상
반듯하게 앞을 향해 간 죄 밖에 없으나
기어이 불공정 인사가 횡행하는 직장에서
미로에 빠지는 날 많아졌지
집이 정글이 될 때가 있지
네 명이 모여 사는데
사자 400마리쯤 모여 우글거리는,
그날이 정글이지
냉랭한 공기만 제 갈 길을 오갈 뿐
젊은 시절 정글에 빠진 시간들
가뿐하게 빠져 나왔지만
삶이 오후로 기우는 요즘
사는 것 자체가 정글일 때 많다
그런데도
오늘은
아늑한 정글에 갇히고 싶은 날
냉랭한 공기마저 잠이 든,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었다
눈감지 않은 시간이나 재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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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주
199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계간 《열린시학》 및 《시와산문》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꽃과 악수하는 법』, 『밥알의 힘』, 『오후가 가지런한 이유』, 『그늘마저 나간 집으로 갔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