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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고선주 - 봄의 사유 외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3.16|조회수31 목록 댓글 0

신작시 | 고선주

 

 

봄의 사유

 

 

나는 너를 봄,

너는 나를 봄

나무에 꽃이 피면

나는 너의 봄을 봄

그해 아버지의 마지막 봄은

겨울이었다

오는 봄 보지 못하고

상강 날

하늘로 긴 여행 떠나셨지

늘 눈과 삭풍, 그리고 찬 그늘 옆에

있기를 바랐으나

겨울은 끝내 봄을 거부했다

봄은 말로 오는 게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고투를 다한 뒤

소리없이 오는 게 봄이다

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한 줄기 햇살로 오는 것이다

고양이가 늦잠 자는 바깥이면

봄은 충분하다

강아지가 꼬리 흔들며 산책가는 바깥이면

봄은 흐드러져도 좋다

 

나무에 꽃이 피면 봄이 아니라

너의 삶이 덜 고단하면 그것이

봄인 것이다

 

나는 너를 봄,

너는 나를 봄

 

서로 마주 보는 봄

오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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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미학

 

 

나는 길을 잃었다

한두 번이 아니다

가고자 하는 길이었으나

끝내 정글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구나 교과서대로 살아지지 않는 세상

반듯하게 앞을 향해 간 죄 밖에 없으나

기어이 불공정 인사가 횡행하는 직장에서

미로에 빠지는 날 많아졌지

 

집이 정글이 될 때가 있지

네 명이 모여 사는데

사자 400마리쯤 모여 우글거리는,

그날이 정글이지

냉랭한 공기만 제 갈 길을 오갈 뿐

 

젊은 시절 정글에 빠진 시간들

가뿐하게 빠져 나왔지만

삶이 오후로 기우는 요즘

사는 것 자체가 정글일 때 많다

 

그런데도

오늘은

아늑한 정글에 갇히고 싶은 날

 

냉랭한 공기마저 잠이 든,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었다

눈감지 않은 시간이나 재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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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주

1996전북일보신춘문예와 계간 열린시학시와산문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꽃과 악수하는 법, 밥알의 힘, 오후가 가지런한 이유, 그늘마저 나간 집으로 갔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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