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유지현
절벽에서 적는다 외
나의 시는 설산 눈표범에 있습니다
일상의 어둠에 또렷해지는 눈빛
희끄무레한 세상과 불화하는 얼룩무늬
얄팍한 언어를 부숴버릴 다부진 턱
시가 써지지 않는 밤
표범 눈빛은 보이지 않고
수첩에는 무정란의 언어들만 부풀고
강인한 줄무늬는 절망의 속도만큼 멀어져갑니다
눈보라 속 돋아나는 송곳니
그 한마디를
찾습니다
불면을 떨치고
표범을 깨우러
설산 꼭대기에
발이 멎습니다
되돌아갈 길은
검은 종이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흉터뿐인 벼랑에서
쓰디쓴 밤의 먹물을 갈아
적습니다
폐허를 넘어온
가파른 심장 소리
강철 빛깔로 달군
불꽃 한마디를
얼음 절벽에 던질 때
멸종과 생존을 줄타기하며
타오르는 시
당신이 시를 읽는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운명을 줄타기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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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연주
저마다 빛나는 선율이 있다고 적힌
악보는 빤히
나를 쳐다본다
누가 나의 이름이 적힌
건반 위에 벽돌을 얹어 두었을까
어떤 음을 쓰다듬어도
부푸는 흉터들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컴컴한 음정이
두 눈을 할퀴고 간다
건반 위의 생은
각기 다른 높은음자리
오선지를 넘어가는 달리기라서
유연하게 쓰러지고
서글프게 일어나는
연주법을 배워야 한다
불협화음으로 흘러가는 구름이
부지런하게 묘비를 다듬어 가며
한 생애를 몰아 넣는다
울타리도 없이
청중도 없이
부은 발들이 이어붙인
아침과 저녁의
도돌이표
그 끝은 무서운 침묵이지만
연주는
계속
되어야 한다
두 손을 다잡으며
묻는다
당신, 무슨
곡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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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현 2019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199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평론집으로 『현대시의 공간 상상력과 실존의 언어』, 『언어의 형상과 성찰적 상상력』이 있으며 편저로 『만해 한용운』이 있다. 현재 한경국립대 인문융합공공인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