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이선정
밀서 외
복숭아가 물러터졌다
물러터진 문화예술인을 물러나게 한 즈음이었다
발갛고 탐스러운 외관은 썩은 속내를 감추고
구린내를 은닉하기 적당한 장소
복숭아를 세어볼까?
블랙리스트 1*
블랙리스트 2
블랙리스트 3
까끌까끌한 털을 세워
물러터진 반쪽이 멀쩡한 반쪽을
블랙으로 고발했네
복숭아 색이 예쁜 이유가 뭔 줄 아니?
부끄러움을 아는 붉은 볼을 가졌거든
썩은 복숭아 볼도 최초의 색은 아마
붉음이었다
붉음이었겠지?
붉음이었을까?
ㅠㅠ 15브릭스를 많이도 주입했네
달큼한 명예에 속살이 물러터지는 줄도 모르고
아미그달린의 시안화수소로**
샴쌍생아의 몸통을 잘라낸,
*문화계의 '청와대 블랙리스트' 파문
**복숭아 씨앗 속에 내재된 중독성 강한 맹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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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낯선 시골 버스터미널에서 안녕을 고한다
조문을 마친 저녁나절의 빛은 하필 따사롭고
군데군데 깨진 타일 바닥 위 눈부신 자태로
이곳까지 배웅 온 그를 알아보겠다
이미 다 태워져 부서진 육신으로
그림자조차 어쩌면
밝기도 하지 당신,
슬픔의 향낭은 빛줄기에 매달려
눈을 고쳐 뜨고 바라볼수록 시린 향을 뿌린다
한번 떠나면 다신 올 일 없는
낯선 시골 버스터미널처럼
이별은 아득하고도 단호해야지
안녕!
마지막 인사를 하고
버스가 떠날 때
의식처럼 단호하게 소나기가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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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정 강원도 동해 출생으로 2016년 《문학광장》 등단했다. 계간 《동안》 , 《시와징후》 편집위원이며 시집으로 『치킨의 마지막 설법』, 『고래, 52』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