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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니 - 비를 맞은 핸들은 그냥 조금 미끄러운 것 같아 외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6.04|조회수43 목록 댓글 0

사이펀 신작시|김고니

 

 

 

비를 맞은 핸들은 그냥 조금 미끄러운 것 같아

 

 

 

빠르게 지나가면 물보라를 일으키는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빙그르 돌아버린 것 같아

 

울고 있는 앞 유리보다 더 

슬픈 척을 하고 싶은 것 같아

 

자꾸만 밟히는 브레이크 보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보다

같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돌아가는 게 

토할 것만 같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

 

튕겨나갈까 봐 그저 검은 벨트에 의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어떤 게 튀어나올지 몰라 핸들을 꼭 잡은 두 손바닥에 

조금씩 차오르는 땀방울보다 더 불쌍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

 

어쩌면

아주 조금 갈라진 듯

괜찮은 듯 

 

선이 되어버린 균열 속에 앉아 

비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젖은 핸들만큼 슬프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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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처럼

 

 

나도 아이처럼 다시 말을 배웠으면 좋겠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예뻐

구슬처럼 동그란 말들만 뱉어냈으면

뭐가 그리 좋은지 햇살처럼 웃는 

그런 보드라운 입술로 돌아가면 좋겠다

 

나도 처음부터 걸음마를 다시 배웠으면 좋겠다 

물웅덩이 앞에서도 더러워질까 망설이지 않고

살짝 얼어버린 길을 걸을 때도 겁내지 않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알고 있는 

조약돌을 닮은 작은 발이 되면 좋겠다

 

나도 처음부터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슬프지 않은

누군가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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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니 서울 출생으로 2016년 《월간 see》 추천시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달의 발자국, 냉장고를 먹는 기린, 팔랑, 아무도 손대지 않은 아침을 너에게 줄게, 아픈 손으로 문을 여는 사람들에게와 동시집 완이의 잠꼬대, 꽃잎 먹는 달팽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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