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작시

이필 - 사슴뿔 외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6.04|조회수23 목록 댓글 0

사이펀 신작시|이필

 

 

 

사슴뿔

 

 

 

그때 나는 대곡천 바위면 밑에 서 있었다

 

강에서 막 걸어나온 양 떼처럼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유령이 그림자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여전히 그의 배고픔이

희미한 향기를 따라 계곡 끝까지 절뚝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봄은 다시 나뭇잎 심지에 불을 붙인다

거품이 일고 몸을 뒤틀며 강물이 제 목소리를 되찾는다

인간이 버드나무에 흘러 들어가는 소리는 아름다웠지만

거기서 뭐가 잡힐지 몰랐고

 

몸 없는 뿔이 신화 속에 살고 있다며

음악이 불어오는 밤의 숲

 

나는 강가로 내려가지 않았다

불빛 번쩍이는 돌서더릿길로 이어진 암각화 앞에 다시 서지 않았다 그 아래 검은 잿더미를 막대기로 긁지 않았다 어둠이 댐의 두꺼운 수문과 배수로 물소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가져갈 때까지 기다렸다

 

사냥꾼들이 사라진 그곳에서, 선사의 핏자국이 젖은 풀들을 가로지르는 그곳에서

머리가 몸을 찾다가 결국 영원한 음악이 된다는

밤의 숲에서

 

숨어서 보고 있었다

붉은병꽃나무 사이로 잠시 움직였지만

 

 

 

----------------------------------------------

우리가 새였을 때

 

 

 

새는 가장자리에 앉는다 여성들이 그러하듯이

만조와 간조, 저물지 않는 파도가 다가오고 물러서는 것을 바라본다

 

우리가 새였을 때 기억은 그토록 짧고―

우리가 노래할 때 고음역은 유리를 산산조각낼 수 있었으니

 

새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한순간 어디로 사라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새는 인간의 약점에서 태어나고

우리가 아기일 때까지만 동행할 뿐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는 이미 날아가고 없다

 

 

 

 

 

 

 

 

 

--------------------------------

이필

2016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공동시집 『시골시인-K』가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