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김근희
회복 외
계절이 이어지는 길목에 다리가 있다
쿨럭이는 언덕을 무릎에 얹고서 실없이 웃어주는 나무
오랫동안 써 내려간 이력서가 하얗게 지워져도 그냥 살아
가면을 부비며 세수를 하고 화장을 덧칠하다
질문처럼 터지는 꽃들의 행렬에 현기증을 일으켜
봄을 견디기는 기억을 뒤적이는 일만큼 어려운데
나무는 꽃의 의미로 봄을 살아 내는가
햇살 쏟아지는 날선 시선 사이로 펄럭이는 신호들
목젖 깊은 곳에서 건져낸 붉은 뼈 흔들리는 입술
몸 안에 창을 가꾸던 사람이 벽을 더듬어 기어오르다
허공이란 마음을 마음대로 풀어낼 무렵
풍경 언저리를 물고 있던 꽃 무리가 소 떼처럼 꺼이꺼이 울다
꽉 찬 새 떼로 사라진 뒤
씨앗만큼 깊어진 계곡은 아는 길, 아는 사람의 길
우두커니 놓인 다리는 내 것이 아니다
새가 날아간다
벗어버린 가면들이 꽃무덤을 쌓다 이내 흩어지는
거듭된 노동이 백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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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뛰기
신발이 버려져 있다
고인 빗물에 멈춰버린 착지
말문을 닫고 우물우물 뭔가를 궁리하는데
폭우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나
간판들이 빼곡히 들어선 새벽 거리를
이름도 없이 서성이던 맨발은 어디로 갔나
비는 쏟아져 무엇이든 삼켜버릴 포효 속에서
인기척이 온몸으로 감싸드는데
기억에서도 사라진, 찬란했던 순간을
이 발에 싣는다면
숨 막히게 새로운 내가 다시 한 번 뛸 수 있을까
잠시 뜨겁게 사랑을 하여 넘치는 희열이 발목을 잘라
엇갈린 발걸음이 물웅덩이에 떠돌고 있다면
그리하여,
또다시 높이 뛰어 네게 갈 수 있겠나 두 번 세 번...
연거푸
아, 그러나 이 커다란 신발은 길을 끌어 올린 높이로의 약속을
안간힘으로 버려버렸나
줄행랑친 내리막길 모퉁이엔
늘 검은 바지들
큰 숨 한 번이면 끊어질 허리끈에 묶이어
인부모집 간판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하늘까지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 속에서
우린 모두 맨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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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희 서울 출생으로 2013년 《발견》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외투』, 『숲으로 가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