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수피아
분수대에서 다시 태어나기로 했네 외
혼자는 외로워서 기계라는 사회를 만났지. 사회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계이므로, 나의 세계를 버리고 기계의 사회로 이사했지
나는 진정한 사회의 기계가 되기로 마음먹었지. 내 개성을 버렸더니 아침에 눈을 뜨자 입에서 균형 잡힌 사회의 기계 소리가 나왔지.
소속감에 들떠 옆에 있는 기계에 말을 걸어 보았지. 옆의 기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했지.
벌이 날아왔지. 벌은 귓가에서 윙윙거렸지. 옆에 있던 기계는 시끄럽다며 벌을 손바닥으로 눌러서 죽였지. 누르는 손에는 감정이 흐르지 않았지. 기계는 죽어가는 벌에게서 저항을 뽑아버렸지.
먼 곳에서 새가 날아왔을 때도, 더 먼 곳을 걸어서 나무에 오른 꽃이 피어났을 때도 기계는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며 사회의 힘을 보여주었지.
옆에 있는 기계에 말을 걸어 보았지. 나의 말은 조용하고 평화롭던 우물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처럼 사회를 울렸지. 기계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지 말라고 옆의 기계가 말했지. 조용하고 평화롭기 위해 기계 사회에서 나는 더 외로워졌지. 기계들은 아무도 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
그러나 왜 조용해야 평화로워지는지 알고 싶어서 나는 말을 그치지 않았지. 누군가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계속 말을 했더니 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처럼 기계 사회는 시끄러워졌지. 사회의 모든 기계는 짜증스럽게 나를 노려보았지. 사회가 정당하게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눈빛들이었지.
조용하고 평화롭던 사회는 내가 생각하는 조용하고 평화롭던 그 사회가 아니었지. 필요한 순간에만 전원을 켜서 정해진 규칙대로만 움직였다가 다시 전원을 끄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회였던 거지. 말하고 또 말을 하다가 결국 나 혼자서 분노했지. 그러자 나의 말은 분노로 솟아올랐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는 분수와 같아졌지.
분수에서 솟아오른 물은 반드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지. 기계들의 조용함과 평화로움이 습관화된 사회를 참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므로 곧 나는 물고랑을 타고 사회를 떠나 어디론가 내가 생각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찾아 떠날 수 있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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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를 받은 날
아파트는 네모로 지어졌지. 상자와 닮아 있었지. 누가 보냈는지 상자가 배달되었지. 배달된 가로세로 1m 크기의 상자를 거실에 들여놓았지. 상자는 상자 크기의 공간만 가졌지. 나는 상자에 너라 이름을 붙였지. 보낸 사람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너를 어떻게 쓸까 생각했지. 레인지 주변에 라면 봉지가 아무렇게나 놓인 것이 거슬렸지. 라면 봉지를 너에게 던져 넣었지. 레인지 주변은 깔끔하게 치워졌고 너는 비닐봉지를 소화했지, 상자는 어떤 역경도 소화할 것 같았지. 찢긴 우산, 깨진 찻잔, 프린터기 옆에 구겨진 종이 뭉치들, 오래 신어서 뒷굽이 주저앉은 구두를 고민 없이 던져 넣어 보았지. 끝장난 삶의 골대에 들어가는 공처럼 정확하게 너에게 들어갔지. 다친 마음이 말끔하게 사라졌지. 나는 너에게 물건 집어넣는 것에 재미 붙이기 시작했지. 작아진 헌 옷, 먹다 만 치킨, 반쯤 남은 소주병, 다리가 하나 빠진 의자를 집어넣었지.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라 여겨지는 것이라면 모두 너에게 던져넣었지. 나는 이제 흠집 없는 인생이 되는 거지. 먹는 것마다 소화를 시키는 너.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을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를 화덕에 밀어 넣듯 너에게 밀어 넣어야겠다 생각했지. 만능 주부를 자처하며 설거지를 누가 할지 놓고 다투던 시장에 간 남편을 떠올리며 1인분의 생활비가 줄 것 같아 혼자 웃었지. 돈도 안 되는 잡동사니를 버리고 나니 집 안이 텅 비어서 세상이 넓어지고 홀가분했지. 네모난 아파트에 나 혼자 앉아 있었지.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지. 생각해 보니 버린 구두가 남편의 것이었지. 뒤집어 생각해 보니 나는 너의 밖에 있었고, 아파트에는 나의 외로움이 혼자 앉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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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아/ 2007년 《시안》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은유의 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