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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박제영 - 해는 간절곶에서 떠올라 카보 다 호카에서 진다네 외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6.05|조회수32 목록 댓글 0

사이펀 신작시|박제영

 

 

해는 간절곶에서 떠올라 카보 다 호카에서 진다네

 

 

 

간절곶에서 애인에게 시를 읊어주었지

“그리하여 여기, 바다가 끝나고 땅이 시작되도다”

 

애인은 멋진 시라며 모래사장에서 플라멩코를 추기 시작했지

순진한 그녀에게 차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어

미안해 실은 표절한 거야

춤을 멈춘 애인은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고백은 멈추지 않았어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카보 다 호카’라는 바다와 맞닿은 땅끝을 만나게 되지

그 곶에 가면 커다란 돌탑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어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도다”

루이스 카몽이스가 쓴 시의 한 구절이야

실망한 애인은 끝내 그를 버렸지

 

그땐 몰랐어

애인들은 왜 표절을 용서하지 않는 건지

사랑은 왜 표절해서는 안 되는 건지

 

그땐 몰랐어

간절곶에서 시작된 사랑은

카보 다 호카에서 몰락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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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쌀을 안치는 저 오래된 애인이

오늘 처음 만난 이국의 여자였으면 좋겠다

아무도 모르는 저 오랑캐 여자와

아무도 모르는 북쪽 오슬로 숲에서

모르는 북쪽 말과 남쪽 말이 서로를 더듬어

낙엽처럼 뒹굴다가 낙엽처럼 붉어져서

벌거벗은 몸 위에 이국의 언어를 필사하다가

통음과 통정으로 마침내 한통속이 되었으면 좋겠다

속으로 하무뭇하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쌀을 안치는 애인에게 한다는 말이

그런데 애인아, 오랑캐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하지 화를 낼 줄 알았던

오래된 애인은 기꺼이 처음 만난 오랑캐가 되었으니

쌀이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무에 상관이랴

오늘 밤은 오랑캐의 말을 반드시 배우리라

캄캄한 오슬로 숲이 크엉 크엉

오랑캐의 울음소리로 저물어가다가

달 하나를 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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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안녕, 오타 벵가』, 『뜻밖에』, 『푸르른 소멸』 외 , 산문집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외, 번역서 『어린 왕자』 외 다수가 있다. 현재 달아실출판사 문장수선공으로 일하고 있으며 강원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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