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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훈-이명희 시집 『나에게 묻는 안부』와 박종숙 시집 『조각조각 붉게 타다』을 읽으면서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6.04|조회수65 목록 댓글 0

 

서평

 

울긋불긋한 생의 그림자에 비치는 글자들

이명희 시집 『나에게 묻는 나의 안부』(작가마을)와 박종숙 시집 『조각조각 붉게 타다』(작가마을)을 읽으면서

 

 

정훈(문학평론가)

 

 

 

시가 주는 위로를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신산한 삶을 그럭저럭 버티면서 어쨌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목적과 방법은 그리 멀거나 높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살면서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행복이나 기쁨 같은 감정들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고통이나 아픔에서 비롯하는 부정적인 감정도 언젠가 아물게 되어 있다. 언제나 지금 이곳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보다 나은 감정과 생활 형편을 기대한다. 비록 궁전과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수많은 물질적인 재화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만족을 느끼기도 하다. 이런 게 인생인가, 하는 자문을 무심코 던지면서 스스로 돌아보면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인생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살이 어느 정도 편차는 있을지라도 다들 엇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스스로 위로하는 감정일 수도 있다.

시는 언제든 솔직한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언어의 표현이다.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감은 어느 정도 면역이 된 체질처럼 우리를 그렇게 놀라게 하지 않는다. 모두가 고독하다고 느끼면 자신의 외로움이나 우울한 감정은 파도처럼 한순간 밀려왔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리라. 이명희 시집 『나에게 묻는 안부』(작가마을, 2023)와 박종숙 시집 『조각조각 붉게 타다』(작가마을, 2023)은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 결이 다른 두 시인의 작품이다. 이들 시집을 읽으며 느낀 단상을 적어보려 한다.

 

 

자의식의 한복판

- 이명희 시집 『나에게 묻는 안부』(작가마을, 2023)

 

이명희의 시는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체험을 페이소스(파토스) 짙은 언어로 표현한다.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아이러니가 복합되어 시인의 감정을 휘돌아 나오는 세계를 보면 누구나 시인처럼 느꼈던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 여기에는 세계의 본질적인 부분을 궁구하거나 파헤치기보다는 절로 몸과 마음에 따라오는 세계의 표피를 매만지는 시인의 손길이 있다. 때로는 비극적인 형식으로,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형식으로 시인에게 다가서는 세계는 우리가 숱하게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요 세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신의 눈에 비치는 이런 형식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날것 그대로 표현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솔직한 시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글자가 다르게 보인다/ 거르지 않은 생각이/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흔들어/ 생각이 생강이 되고/ 정신이 정선이 되고/ 그대가 그래가 되는/ 내 의지와 무관한/ 혼돈의 퍼즐”(「글자가 다르게 보인다」 부분)처럼, 명확성이 불분명한 형식으로 시인에게 다가왔을 때 생기는 순간의 착시를 숨기지 않는다. 글자가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은, 역으로 말해 세상이 보여주는 표면이 한순간 거짓일 수도 있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진실과 거짓 사이는 한 끗 차이의 공간만이 놓여 있다는 인식이다.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이 세계의 불완전함을 시인은 바라본다.

세계의 불완전함은 인간이 지닌 유한성에서 비롯한다. 유한한 인간은 절대적인 세계에서 절대적 시공간의 안락함만을 상상할 뿐이다. 여기에서 그리움이 솟아난다. 그러니까 그리움의 대상은 언제나 저 멀리 달아나는 노루처럼, 혹은 파도처럼 눈앞에 와서는 사라진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그리움을 품고 있다. 이런 세계가 아닌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못한 부조리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불가해하고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만을 겪는다. 시인은 오래전부터 그리움을 향한 노래를 불러왔다. 이명희는 끝내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의 세계를 아이러니한 현실 모퉁이를 응시하면서 예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낌새는 언제라도 시인을 괴롭히는 칼날처럼 현실 여기저기에 웅크리고 있음을 시인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꽃이 떨어지는/ 나무 밑을 걸어간다/ 저녁에 집에 와서야/ 이팝나무 밑을 걸어간 것을 알았다./ 의심스러운 세상,/ 나무의 이름이 꽃잎처럼/ 나부껴 흔들린다.”(「이름이 흔들린다」 부분)처럼, 사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름이 시인의 머리에서 사라지는 경우를 생각한다. 이름이 생각났다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는, 달리 말해 이 세계가 보였다가 보이지 않는 이치와 같다. 블랙홀처럼 모든 기억을 빨아들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흔들리거나 좌절한다.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벌어지는 이 같은 거대한 동공(洞空)과 마주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없다, 는 말도 가능한 것이다. 확연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도 조금만 돌이켜보면 불확실성의 덩이에 묻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소용돌이 되어 시인을 향해 진군하는 불가사의한 세계의 형식은, 시인으로 하여금 언어를 하나씩 가져와서 그 세계를 기록하려는 의지와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이런 경우가 발생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마 ‘자의식’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시인은 자의식을 조금씩 파먹는 벌레 같은 존재다.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세계를 의심하고 회의하는 자리에 시인이 놓인다. 세계가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시를 쓸 수 없다. 모든 것이 자명한 자리에는 얼얼한 시공간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시인은 꿈을 꾸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계가 주는 지복한 공간과 시간에 아이처럼 파묻히면서 행복을 느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러한 이중 분열의 상황에서 흔들리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시인인 것이다. 이명희는 날로 새로워지는 이 세계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개미가 지렁이를 먹는 거리,/ 물웅덩이 옆에서 개미 떼들은/ 즐겁게 새까맣고/ 나는 지렁이처럼 발길을 휘어서 걸었다// 살아기는 일이,/ 내게 희망인가/ 절망인가/ 나는 정말 모르겠다.”(「나는 모르겠다」 부분)의 경우처럼, 시인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자신도 모른 채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계가 주는 희망이나 절망의 깊이를 알고 있는 자다. 희망이 주는 기쁨이나, 절망이 안기는 슬픔이나, 어쨌든 이러한 희비극의 세계에서 떠오르는 글자를 조합하면서 시로 일구어내는 시인인들 여느 사람이 느끼는 불안과 회의를 간직하지 않을 리 있을까.

괴로움의 진원은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데 있다. 괴로움의 깊이는 생각과 사고의 연상작용에 따른 언어의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 낸다. 이명희는 날마다 마주하는 현실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과 감정의 결을 따라 조금씩 세계를 알아가고 인식한다. 시집 「나에게 묻는 나의 안부」는 그런 시인의 복잡하면서도 어찌 보면 단순한 세계 인식이 들어 있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진중하게 사물에 다가서는 시인의 손끝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본질과 현상이 어떤 모습으로 형형색색의 빛깔로 다가오는지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시의 힘이고 시의 특징이다. 사는 일이 가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내막을 살펴보면 우주의 시간만큼이나 기나긴 고뇌의 무게가 들어차 있다. 그 무게의 질감을 시인은 바라보고, 의심하고, 매만지는 것이다.

 

 

2. 이미지가 보내는 풍경에 잠기다

-박종숙 시집 『조각조각 붉게 타다』(작가마을, 2023)

 

박종숙의 시는 해가 질 무렵의 따뜻한 바람과 땅 내음처럼 천천히 번지는 체온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시인이 삶을 살면서 다가왔던 특별한 순간을 지우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언어로 재생하려 했던 이미지가 들어 있다.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그림으로 기억하기 마련이다. 감각 중에서 시각이 대체로 오래가는 법이다. 한 번쯤 떠올리면 그 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기에 아름답다. 아름답기에 지울 수 없어 글자로 남긴다. 박종숙은 그런 그리움이 남긴 언어를 시로써 갈무리한다. “곰 한 마리 물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네/ 부끄러워 얼굴 빨개지며/ 별에게 속삭이네// 서산에 목맨 붉은 해를 아쉬워하는/ 호수는 금빛으로 출렁이고/ 나는 황혼이 아쉬워/ 산 그림자 쫓아 뜀박질 치네”(「산 그림자」 부분)처럼, 산과 화자와 석양이 지는 풍경을 떠올리며 아련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때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기억에 남아있는 사진 같은 이미지와 영상은 인간의 삶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고 몸에 각인되는 체험의 일부분이다. 시간이 남겨놓은 흔적을 먹으면서 사람은 살아간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세계를 그리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난 시간이 남기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시간은 이미 흘러가 버린 강물처럼 지나간 자리만 선연하다. 그 자리를 들여다보면 지나온 존재의 풍경이 흔들리면서 손짓한다. 지금 이곳의 삶도 언젠가는 흔들리면서 손짓하는 풍경의 추억처럼 과거가 된다. 시인은 꽃이거나, 겨울이거나, 산이거나, 사람이거나 시인의 눈에 보이는 존재들이 언제라도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는 태세로 서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존재를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슬프기 때문에 기억에 집어넣고, 기억에 잠들어 있는 존재의 풍경을 언어로 되살린다. “하루를 만나는 일이/ 이슬로 닿아도 천천히 견딘다// 물 마른자리에/ 남은 꽃대 하나/ 언젠가 시선 끝에 지고 나면/ 가는 길 먹먹하게 흔들리겠지// 그 길 지나며 만나는 바람/ 애타게 찾는 꽃 있으리라”(「바람꽃」 부분)에서 바람과 꽃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가는 길을 막아서는 존재처럼 아리다. 여기에는 지극한 슬픔이 숨어 있다. 생명이 자라고 없어지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생명의 비밀이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인이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질긴 생명의 운명이다.

나고 지는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움에는 젖은 속내처럼 흐느끼는 존재의 고독이 있다. 이 고독을 헤아리면 존재가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을 생각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한 이 세계의 이면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숱한 사연이 제각각의 입술로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시인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관심을 주는 사람이다. 작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은 것과 작은 현상들이 남기는 잔상은 오래 남는 법이다. 훗날 떠올렸을 때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러한 작은 것들이 소리내는 풍경이다. 박종숙은 시집 곳곳에 조용히 나타났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이 선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관심으로 하여금 세계의 의미를 귀띔한다. 그것은 산 너머로 지는 시간이며, 그 시간이 흘리며 남기는 어둑어둑한 빛깔이다. 그래서 시인의 망막에 들어오는 것은 환영처럼 반짝거리면서 시간을 잠식하면서 어둠 넘어로 사라진다. 이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기울이는 자가 시인이다. “너는 조용히 온다지만/ 막 잠든 거리를 깨우고/ 진한 향기로 바람을 깨운다// 낭만이 숨 쉬는 거리/ 빛나던 시절이 아니어도 좋다/ 욕망을 쏟아내려 찾아온 군상들이/ 술잔에 인생을 걸고 한걸음 느린/ 몸짓으로 우정이 되고 사랑이 되어/ 거리를 어루만진다”(「어둠이 내리면」 부분)에는, 한때 왁자지껄했던 기억 속 얼굴들이 자리했던 풍경이 시인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낭만과 술이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존재의 그림자에는 시인이 오랫동안 눈길을 주었거나 눈길을 거두었던 시간과 공간이 맺혀 있다. 사람이 어우러지면서 만드는 모든 문화에는 시간의 지층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빛깔의 이념과 의식이 들어 았다. 맑거나 흐린 날씨에도 새싹이 돋아나거나 어떤 생명이 목숨을 다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듯이, 시인이 보았던 모든 풍경에 웅크리고 있는 저마다 사연들을 하나씩 건져내면 이 세계가 얼마나 다양한 존재가 군무를 그리며 세상을 이끌고 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런 회한이나 기쁨으로 보일 수도 있고, 슬픔이나 감정의 무한한 흐느낌으로 다가설 수 있다. 시간은 이렇듯 우리에게 멈추지 않는 시각과 언제라도 되돌릴 수 있는 인식을 제공한다.

시집명인 『조각조각 붉게 타다』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세계는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혹은 아라베스크의 산란하는 듯한 빛 무늬처럼 곳곳에서 이룩하는 존재의 역사를 현미경처럼 보여준다. 시인은 흐느끼기만 하지 않고 결국 말로써 세계를 가늠하고, 희망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박종숙의 시편을 음미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이미지들의 향연이 어떤 체온의 그리움으로 다가올 때 세계는 시인에게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자신의 속내를 조금씩 알릴 것이다. 그 전언을 받아쓰는 시인에게 세계는 무한정 새로운 낯으로 다가온다. 울긋불긋한 빛이 남기는 그늘 속에 점점 뚜렷해지는 글자의 조합이 비로소 세계를 인식하는 감성적 실천을 위한 조그만 소식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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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 문학평론가, 시인.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사랑의 미메시스』,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과 시집 『새들반점』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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