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사이펀 신인상(상반기) - 이재야
물돼지 외 5편
물돼지를 키웠다
물돼지는 밥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셨다
물돼지는 주인의 언어를 이해했고
명령대로 이행했다
물돼지를 이용해
물속에서 사람들을 해쳤다
주인이 기뻐하니
물돼지도 기뻐했다
물돼지의 우는 소리가
해저에 깔렸다
잡으라는 간첩은 잡지 않고
생사람 붙들고 먼지를 털어내던 정보기관 요원들이
주인을 체포했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죄를 물돼지에게 뒤집어씌웠다
수감 중에도 삭힌 홍어를 찾던 건달 두목이
물돼지를 술안주로 삼겠다고 했다
두 번 다시 물돼지를 키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물돼지는 뼈와 살이 분리되며 비명을 질렀다
물돼지 없는 새 삶이 주인을 반겼다
초야初夜를 맞이한 분수대 주위로
물돼지들이 몰려들었다
다시 물돼지를 물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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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소연
소련을 소연이라고 부르면 잡혀간다
문법은 둘째 치고 무시무시한 소련을 미화했다며
사상범으로 체포당한다
소련이 아니라 소연이에요
소비에트 연방이니까 소연이에요
소녀 같잖아요
스탈린 서기장은 시인이었어요
소녀 감성으로 시를 쓰지 않았을까요
심신미약 판정을 받는다
감옥도 수용소도 아닌
정신병원이 반긴다
폐쇄 병동에 갇혀
소련이 아닌 소연을 찾는다
봄에도 눈사람을 볼 수 있는
추운 마을의 소녀 소연을 찾다가 잠이 든다
세월이 지나 민주화를 이루고
쿠데타와 독재자를 역사 교과서에서 보는 날이 왔지만
소련을 소연이라고 부르며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다
소련이 해체되고
소연의 생사를 알 수 없다
머리 위에 하얀 눈을 털지 않는다고
아이들이 비웃는다
여름이 찾아오는데
소련을 소연이라고 부른다
소련도 소연도
이제는 내 곁에 없다
소련을 소연이라고 불러도
잡혀가지 않는다
서기장은 시를 쓰지 않는다
지구 온난화로 눈사람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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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독재자
온화한 독재자는 아름답다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꽃삽으로 꿈속을 휘저어 꽃밭을 어지럽힌다
사람들은 꽃삽을 잘 다루는 독재자의 매력에 빠진다
통제를 바라나 요구하지 않는다
스스로 노예가 되도록 길들인다
통제를 벗어나면 원수가 된다
친구이기를 세뇌한다
친구 따위 필요 없기에 독재자는 잔인해진다
비열함을 미학적으로 해석하는 속물들이 환호한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주권을 생략한 인권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이끈다
충고로 포장한 폭압에 하나둘 기록이 말소된다
진실은 없고
만들어진 사실만 있다
독재자에게 저항하기 위해 꽃삽을 빼앗으려다가
꽃삽에 맞아 기절한다
꽃삽으로 퍼 올린 흙이 몸을 덮는다
꿈결에 다시 친구를 수집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하 호호 웃는 공간에 나는 없다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노예가 멋모르고 자기소개를 한다
꽃삽으로 적은 묘비명에 구체적인 이력이 늘어난다
온화한 독재자가 속삭인다
우리 친구잖아?
꽃삽으로 파낸 새 무덤이 생길 것 같다
정말로 친구가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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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가
인건비를 인권비로 착각했다. 노동자의 인권 처우 개선을 주장하던 가방끈 짧은 운동가는 굴욕을 당했다. 위장 취업한 명문대 운동권 동아리 학생들의 비웃음이 콧구멍으로 설렁탕을 들이켜는 것보다 매섭다. 최저 시급도 못 받던 운동가는 회사에서 쫓겨나고 노조에서 탈퇴했다. 약자에도 급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계층을 창안했다. 선동과 날조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타락했다. 자본가의 착취보다 위선자의 타락을 멸시하던 고독한 운동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무시당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을 되새기며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비상했다. 녹아내린 운동가를 기억하는 노동자는 아무도 없었고 근로기준법 위반을 우려하던 중소기업들은 평소처럼 하청을 맡으며 어두운 밤을 밝히는 색시들을 모아 경제의 구심점이 되었다.
* 이문열의 소설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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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인간
새들이 인간들을 쪼아댄다
부화를 막으려는 인간들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달콤한 말로 설득 하나
들은 체도 안 한다
적으로 규정한 자들에게
예우를 바라는 건 사치다
수치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새들이 명예를 가르친다
불만 쌓인 인간들이
마오쩌둥의 어록을 인용한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
관대하지 못한 새들이 학살당한다
인간들이 자축한다
자책하는 자들도 끌려간다
불편한 동거를 끝낸다
새들이 사라진 하늘에
축포를 쏘아 올린다
하늘은 숨죽인 채
사태를 방관했다
죽은 새들이 하늘마저 원망했다
하늘을 가진 인간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다시 새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실업 급여로 먹고살던 포수砲手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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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봄이 온다고 소리쳤다
봄이 군화를 신고 다가왔다
나와 함께 낙농업이 발달한 초원으로 떠나자
한심할 정도로 낙천적인 봄을
사람들은 반가워했다
순수한 척하는 봄의 사기극을
진심으로 믿는 멍청이들이 불쌍했다
너희는 모두 위선자다
아파도 울지 않겠다는
거짓말을 일삼는 연놈들이다
봄이 얼굴을 찡그렸다
사람들이 반동분자를 기둥에 묶어 세웠다
봄을 찬양하는 노래가 현혹할 때
마을에서 가장 더럽다는 난봉꾼만이
실체를 파악했다
눈감은 나를 향해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봄은 제물로 바칠 대상을 물색했다
도덕 교사가 가장 비도덕적이라고 가르치다가
교직에서 쫓겨난 도덕 교사가
빵점짜리 도덕 시험지를 뿌렸다
여기 도덕적인 악인이 있습니다
봄과 대치했다는 죄명이 뒤늦게 밝혀지며
하나둘 노예를 자처했다
일 년 내내 봄과 마주 보며
금지된 사랑을 속삭였다
시취에 가려진 눈동자들이
날개를 달고 떠돌아다녔다
봄이 왔는데 봄을 기다리는
회의주의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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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 이재야
내 목숨은 내 글을 읽어주는 분들의 것
살려고 썼다. 사는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으로 썼다. 그런데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죽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렇다고 돌아갈 길은 없다.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어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버텼다. 아이브의 「I AM」이라는 노래로 기억한다. 저 구절만 반복해서 들으며 버텼다.
매일 깊은 밤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달리고 시간이 지나도 벗어날 수 없는 밤이었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조차 사치로 느껴질 만큼 내내 길을 잃은 채 달려왔다.
책을 써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시작점에 머물렀다.
이제 벗어나고 싶다.
다시 새로운 시작점에서 출발하겠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럽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다니. 나는 사랑할 줄 모르는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글을 읽어주는 분들의 것이다. 여기까지 와버린 삶이다. 삶에 미련을 가지기에는 삶이 주는 가치가 부담스럽다. 차라리 타인들에게 양도한다.
이제야 겨우 글 안에 삶을 집어 던지고 후련해졌다. 지나온 삶과 현재의 삶 그리고 앞으로의 삶이 글 안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삶을 연장하게 되었다.
열심히 쓰겠다는 약속밖에 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못난 아들을 기다려주신 부모님과 참담한 필력을 선보인 제 글을 긍정적으로 봐주신 계간 ‘사이펀’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재야 antirrhopus@naver.com
-본명: 황윤대.
-1988년 경기도 가평군 출생.
-설악고등학교 졸업.
-소설 《모더니즘 탐정단》, 《신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세계》.
-시집 《시빌런의 비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