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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시인

황형철-능소화 자동차 외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6.03|조회수23 목록 댓글 0

사이펀 신작시|황형철

 

 

 

 

능소화 자동차

 

 

 

아구야, 아들 왔구나

 

쇠약한 나귀 한 마리 꼬깃꼬깃 용돈을 꽂고 과자 떡을 담은 봉지도 걸어두었다 내 빨간 자동차만 머릿속에서 검은 연기를 내뱉을 뿐

 

오래된 새미도 새터시장 쩌렁쩌렁한 호객도 이름난 시인이 낮술을 하고 앉았다는 돌층계도 모든 걸 지우는 병이었다

 

명정샘은 옛날처럼 맑지 않아 아무도 물을 길어 올리지 않고 비탈진 미로 골목 굽은 허리로 조금만 거동해도 숨이 차고 어지러워 나날이 꿈자리마저 사납지 않았을까 누가 알은체를 할까 봐 홧홧한 눈물 얼른 훔치며

 

어머니 어서 타세요

 

부릉부릉 최고 출력을 내서는 동피랑 서피랑 벼랑도 가뿐히 건너고 경광등이 울기라도 하는 듯 시원하게 뚫린 길 지나 아흔아홉 계단에 열없게 핀 능소화

 

궁지에 몰려 씩씩거리던 식솔이 울다 울다 달아오른 눈두덩이었다 주름살처럼 휜 뱃길 따라 조촐하게 흩어진 섬까지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아구야, 울지 마라

 

뱃고동이 뿡뿡 호수를 닮은 바다를 깨우는 풍아한 어항(漁港)에 굴 껍데기 같은 목소리 잔잔히도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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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

 

 

 

의자보다 더 의자처럼 앉아

밥벌이하고부터

늙은 팽나무 그늘 속에 눕는 건

제법 오래전 시작한 취미

 

그늘은 습하고 어두운 게 통념인데

이끼 하나 키우지 않고

제철마다 만개한 꽃이라도 부럽지 않아

고단한 며칠을 잊고

헐렁하고 느슨하게 졸음에 들어

까맣게 나를 지우는 일

 

젖은 숨이 보송보송 마르는 동안

팽당했던 씁쓸한 기억도 구차하고 말아

푸른 구릉 속에 앉은 바위라도 된 듯이

스스로 넓어지는 도량이 생겨나

뿌리 같은 사람 추억하다가

구름 닮은 사람 호명하다가

 

아무리 큰 나무라도 그만의 적요가 있어

바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열매의 단맛을 아는 새들도 끊이지 않아

 

나의 공부는 힘에 겹지만

옆에 누운 누군가에게 기꺼이

한 그루 나무가 되는 것

 

슬근슬쩍 팽나무 그늘 속에 드는 건 바로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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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형철 199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6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람의 겨를』, 『사이도 좋게 딱』, 『그날 밤 물병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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