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이잠
레몬을 베어 물 때마다 외
레몬을 통째로 씹어먹다가 혀뿌리에 걸린 씨앗
화분에 심어 손바닥 두 뼘만큼 자라 잎을 매달았다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레몬나무에서 꽃도 보고 열매도 보려면
탱자나무에 접붙여야 한다고 한다
먹을 수도 없고 보잘것없는 탱자나무가
대목이 되어야 한다니
탱자나무의 뿌리를 빌려 레몬이 열린다면
먹지 못하는 것의 뿌리는 강하다
열매로 달아나는 심중을 돌이켜 뿌리를 굵혔을 테니
대신 시큰하고 씁쓸한 전생의 습기까지 끌어올려
뿌리에서 가지로 가지 끝 노란 레몬을 빌려 후생을 산다
보잘것없는 것이 뿌리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듯
가시투성이 상처 둘레에 뿌리가 몰려 있다
솟구치는 수액을 탱자나무에서 레몬나무로 이어주어
전생의 풋열매가 후생의 레몬옐로우 빛깔로 익어가는
성숙한 나무 한 그루를 완성한다
레몬을 베어 물 때마다 탱자 향이 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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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계절
잿빛 하늘이 보이는 지붕 유리창에 웅크려
햇볕 쬐는 겨울고양이 나를 보지 못하고
나는 그의 알록진 동공을 보지 못하고
고양이와 나 사이
투명 아크릴판이 놓여 있다
다용도실 갈 때마다 창에 눌린 털을 올려다보며
혀로 똑똑 소리 내 보지만
겨울고양이 다른 곳만 쳐다볼 뿐
추위와 허기로 스며드는 그의 저녁과
실금 터져 번져가는 내 쓸쓸함이 만나지지 않는
불안한 경사지에서
우리는 다른 계절을 같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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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잠 1995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해변의 개』, 『늦게 오는 사람』이 있으며 작가세계 신인상, 단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