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작소시집

정일근 - 골목, 아날로그 외 4편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6.09.17|조회수51 목록 댓글 0

신작소시집 정일근

 

정일근 시인

 

골목, 아날로그 4

 

 

 

그럴듯해 보이는 내 명함의 뒤편 같은

감추어 둔 저 골목에 은밀한 옛날이 숨어 있다

 

어두운 골목으로 파고들던 청춘의 시간

담벼락에 너를 밀어 세우면

아직 설레는 붉은 입술이 있고

 

나를 쫓아오던 요란한 발소리와

밤을 가르는 시월의 호루라기 소리가 있다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지다 사라지고

세월도 흘러 흘러 휘어지고 굽어지는데

 

여전히 나를 앞장서 데리고 가는

저 오래된 아날로그 사진첩

 

마산의 골목이 찍어 보관하고 있는

내 흑백사진 몇 장

 

1979년 시월 어느 날에.

 

-----------------------------

수국이 피는 골목

 

 

 

바짝 말라 막혀 버린 혈관 같은

오래된 이 골목에 사람이 살고 있을까.

이제는 사라진 이름, 마산이 새겨진

녹슨 하수도 뚜껑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이 골목 저 골목이 늘 궁금했는데

가끔 드나들었지만 사람 본 지 오래다.

대문마다 창문마다 굳게 닫혀 있었다.

주인이 버리고 떠난 길고양이와

유해조수로 전락한 비둘기들이

가끔 나를 앞질러 기척을 낼 뿐이었는데.

새벽길 나서다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집에서

오래된 보일러 돌아가는 묵직한 소리에

나는 왜 이리 가슴 뛰도록 반가운가.

그건 사람이 살고 있다는 뜨거운 신호

누군가 보일러 돌려 아침을 준비하고

그 옆집엔 또 누군가 요란하게 비질하며

어딘가를 향해 거친 욕설을 퍼붓는다.

오늘은 술 취한 목소리의 그 욕마저 반갑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악수를 청하고 싶다.

지난 계절 노랑 분홍 분꽃이 피고 지던

어느 집 앞 커다란 플라스틱 화분에

수군수군 사는 이야기를 걸어오듯

수국이 피고 있다.

 

 

-----------------------------

마산, 망상어

 

 

 

 

마산을 바닷가 생선으로 치자면

이 바다서 흔한 망상어쯤 될까

낚시꾼들이 묵직하게 낚아 올렸다가는

이내 실망하고 바다로 다시 던져버리는 생선

잡어 축에조차 끼지 못하는 망상어

한때 날렸던 왕년만 남은 마산처럼

제법 감성돔 닮은 덩치에

바다 상어 이름까지 슬쩍 빌려와서는

이 바다서 흔한 회나 구이

서비스로 나오는 얼큰한 매운탕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마산의 삼월이나 시월 같은

시퍼런 용맹 한 번 보여주지 못한 채

이름값 하지 못하는 슬픈 생선

바다에 숨어 떠도는 망상어여

네 이름에 희망과 같은 형제 항렬인

이 자랑처럼 붙어 있지만

기다린들 더는 올 내일이 없는

마산을 꼭 빼닮았구나

침묵하는 조용한 바다를 끼고

대책 없이 늙어가는 마산의 오늘이나

그 바다에서 할 일 없는 허깨비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서글픈 신세 망상어나.

 

------------------------------

마산의 억지

 

 

 

몽골 공화국이 중국 이름이어서

몽고(蒙古)란 표기를 싫어한다고 해서

물 좋은 마산의 몽고 간장이

몽골 간장이라 부르겠는가

아카시아가

꽃아까시나무라고 해서

아카시아꿀을

꽃아까시나무꿀이 되겠는가

왕년에 왕년에 전국 7대 도시였는데,

마산 인구가 60만이었는데

어허 왜 그래, 마산 창동 땅값이

서울 명동 뺨쳤는데, 그뿐인가

창원, 진해를 부속 도서처럼 거느렸는데

지금은 창원특례시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로 갈라져 쪼그라든

인구 35만의, 옛날 마산의 큰소리

나날이 인구 소멸로 바람 빠지는

노인 인구 독거 가구가 대다수인

젊은이들이 떠나가는

마산의 억지.

 

-----------------------------------

저마다 상처, 저마다 푸른 잎

 

 

 

마산 어시장 근처 피부과 대기실, 그 병원 단골인 한 노인이 들어서자마자 푸념을 늘어놓는다.

 

며칠 전 시장에서 고구마 모종을 샀는데 잎이 하나도 없어 그것이 어떻게 살아 뿌리내리겠냐며 화가 나 있다.

 

환자들 가운데 농사꾼이 있어 고구마는 심어 놓으면 산다며 위로 삼아 거들지만, 노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사실 노인의 화는 고구마 모종이 아니라 사람에게 향해 있다. 사람이 문제다.

 

잎이 없다고 항의했더니 미안함은커녕 걱정조차 없이 심어 놓으면 산다는 말만 남기고 등을 돌린 장터 늙은 상인이 괘씸한 것이다.

 

사람의 상처도 그러하려니, 따뜻한 말이 있을 때 열매를 부르는 푸른 잎을 스스로 다는 법인데.

 

그때 나는 보았다, 대기실 환자들이 저마다의 상처에 푸른 잎이 무성히 돋아 주렁주렁 열매가 달리는 똑같은 꿈을 꾸는, 같은 줄기의 고구마라는 것을.

 

대기실을 꽉 채운 한 이랑의 고구마처럼, 두둑 빼곡히 들앉아 자기 차례의 호명을 기다리는.

 

 

 

--------------------------

정일근경남 진해 출생. 1984년 무크 실천문학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경주 남산,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소금 성자, 혀꽃의 사랑법, 시 한 편 읽을 시간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지훈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했으며 현재 경남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