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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읍취헌 박은朴誾과 용재 이행李荇의 우정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3.28|조회수40 목록 댓글 0

 

한시로 읽는 역사이야기 16

 

조선전기 읍취헌 박은朴誾과 용재 이행李荇의 우정

 

 

조해훈(시인·고전평론가)

 

 

 

읍취헌 높은 누각 오래도록 주인 없어

지붕 위 밝은 달에 그 모습 생각나네.

이로부터 강산에 풍류가 다하였으니

인간 세상 어느 곳에 다시 시가 있을까?

 

挹翠高軒久無主 읍취고헌구무주

屋梁明月想容姿 옥량명월상용자

自從湖海風流盡 자종호해풍류진

何處人間更有詩 하처인간갱유시

 

위 시는 용재(容齋) 이행(李荇·1478~1534)의 「읍취헌의 시를 읽고 장호남의 옛 시에 차운하다(揖翠軒詩用張湖南舊詩韻·읍취헌시용장호남구시운)」로, 자신의 문집인 『용재집容齋集』 권8에 수록돼 있다.

좌의정 이행이 김안로(金安老·1481~1537)와 사이가 좋지 않아 54세인 1531년 무렵에 평안도로 유배를 떠나기 직전에 지은 시로 추정된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었다.

첫 구에서 높은 누각에 오래도록 주인이 없다고 읊었다. 높은 누각의 주인은 이행의 친한 벗이었던 박은(朴誾·1479~1504)이다. 벗 박은이 죽은 지 거의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지은 시이다.

박은은 26세 때 갑자사화에 사형당했다. 갑자사화는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의 복위 문제가 발단이 되어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여하튼 박은이 어떤 일로 사형을 당하였는지 조금 더 들여다보자.

본관이 고령인 박은의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으로 경상북도 고령에서 아버지 한성부판관 박담손朴聃孫과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이이李苡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은은 1495년(연산군 1)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재였다. 소년급제였다. 같은 해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선발에 뽑혔다. 그 뒤에 곧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를 받고 홍문관에 선택되어 정자가 되고, 수찬에 있으면서 경연관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20세의 약관으로 유자광(柳子光·1439~1512)의 간사함과 성준成俊이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탄하는 소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앞의 다른 글에서도 언급이 된 유자광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다.

유자광은 부윤府尹을 지낸 유규柳規의 서자로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1467년(세조 13) 왕실의 호위병인 갑사甲士로 있다가 하번下番하여 고향인 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무렵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세조에게 글을 올려 자발적으로 출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세조는 그의 글을 보고 반기며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시애를 토벌할 방책을 묻고는 자신을 호위하는 겸사복兼司僕으로 삼았다.

필자 개인 생각이지만 유자광은 정치력이 아주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조와 예종에 이어 성종 때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유자광은 1498년(연산군 4)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을 내세워 무오사화를 주도하였다. 1506년 유자광은 그해에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반군이 궁궐에 진입할 수 있게 도왔다. 이때의 공으로 중종이 즉위한 뒤에 1등 공신으로 책봉되어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 유자광은 김종직의 잔당이 자신을 중상하려 한다며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을 하겠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예견처럼 조정의 요직에 있던 사림들은 유자광을 탄핵하였고, 중종은 결국 이를 받아들여 유자광을 평해平海로 유배하였다. 유자광의 아들인 유방과 유진, 손자 유승건·유승곤 등도 모두 유배되었다. 유자광은 1512년(중종 7)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유방도 스스로 목매어 목숨을 끊었다. 영욕에 너무 사로잡혔던 유자광의 말로는 결국 좋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직언을 꺼린 연산군은 1501년(연산군 7) ‘사사부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23세였던 박은을 파직하여 옥에 가뒀다. 그러던 중 1503년(연산군 9)에 어려운 가정을 힘겹게 꾸려나간 아내 신씨가 25세로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박은은 동래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다시 압송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결국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행이 벗 박은의 유고를 모아 『읍취헌유고』를 내게 됐던 것이다.

한편 박은을 위해 위의 시를 지은 이행은 1495년(연산군 1) 증광 문과에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예문관 검열·봉교·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문사였다. 이행 역시 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다. 여기서 함안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가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홍문관교리로 등용되어 다시 환로에 들었다.

이행은 중종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병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 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판중추부사로 좌천되고, 이어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었다. 이행은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다음은 박은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기라도 한 듯 20대 중반에 지은 시 「복령사에서(福靈寺·복령사)」를 보겠다.

 

절간은 도리어 신라의 옛것이요(伽藍却是新羅舊·가람각시신라구)/ 천개의 불상은 다 서축에서 온 것이네.(千佛皆從西竺來·천불개종서축래)/ 예부터 신인도 대외에서 길을 잃었다더니(終古神人迷大隗·종고신인미대외)/ 지금의 복스러운 땅은 천태산과 같구나.(至今福地似天台·지금복지사천태)/ 스산한 봄기운에 비가 오려는지 새가 우는데(春陰欲雨鳥相語·춘음욕우조상어)/ 늙은 나무 정이 없어 바람이 절로 슬프다.(老樹無情風自哀·노수무정풍자애)/ 인간 만사 한바탕 웃음거리도 못 되나니(萬事不堪供一笑·만사불감공일소)/ 푸른 산에서 세상을 보니 절로 먼지에 떠 있네.(靑山閱世只浮埃·청산열세지부애)

 

2연에서는 황제가 구자산에서 대외大隗, 즉 대도大道를 찾으려 하였는데 양성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장자』의 고사를 끌어들여 복령사를 찾아 올라가는 길이 험준함을 말하고 있다. 또 한의 유신劉晨과 원조阮肇가 천태산에 약초를 캐러 가서 길을 잃고 굶주리다가 아름다운 두 여인을 만나 사시사철 봄 경치를 즐기며 살았다는 「대평광기」의 고사를 끌어들여 복령사가 별세계임을 은유하였다. 특히 3연에서는 이십대 중반의 젊은이 입에서 나온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후대 시화에서 이 구절을 들어 박은의 죽음을 예견했다고 하여 시참詩讖이 되었다. 시참대로 박은은 26세의 아까운 나이로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용재집』 번역본에 박은의 묘지명이 「朴仲說墓誌銘」 제목으로 실려 있다. 글이 길어 그 중 아주 일부만 원문 없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 박 군이 귀양 간 지 백일이 안 되어 서울의 옥사獄舍로 잡혀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결국 형장으로 나갔는데, 이해 6월 15일이었다. 죽음에 임하여 정신과 안색을 변치 않고 두 번 하늘을 우러러보고 웃을 뿐이었다. 매우 애통하다.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인가, 땅이 그렇게 한 것인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가산을 모두 몰수하고 아들을 금고禁錮시켜 서울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박 군과 교유한 시람들을 기록하여 먼 곳으로 귀양 보냈으니, 애통하다. 하늘이 그런 것인가, 땅이 그런 것인가? 선에 대한 화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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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훈 | 1960년 대구출생으로 국제신문 기자, 동아대 홍보팀장 등을 역임했다. 1987년 《오늘의 문학》,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사십 계단에서』, 『생선장수 수리공』 등 여러 권을 펴냈다. 최계락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지리산에서 고전박물관 〈목압서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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