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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으로 탄핵받은 조부 탓에 대과 시험 치를 수 없었던 조술도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6.04|조회수25 목록 댓글 0

조해훈의 한시로 읽는 역사 이야기(18)

 

당쟁으로 탄핵받은 조부 탓에 대과 시험 치를 수 없었던 조술도

 

조해훈(고전평론가)

 

 

가을비가 저녁에 찬 기운 일으키는데(秋雨寒生夕·추우한생석)
가을산은 담담하여 무정하구나.(秋山淡欲無·추산담욕무)
불그스레한 숲속 너머 먼 마을에는(遠村紅樹裏·원촌홍수리)
어찌할 바 모르는 닭이 낮에 우는구나.(可處午鷄呼·하처오계호)

 

위 시는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학자인 조술도(趙述道·17291803)의 「가을비」(秋雨·추우)로, 그의 문집인 『만곡집(晩谷集)』 권1에 들어있다.

위 시에 담긴 뜻이나 의미를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작자인 조술도가 처한 상황을 술회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첫 구의 ‘찬 기운 일으키고’는 시인이 할아버지인 조덕린(趙德鄰·1658~1737)이 당파싸움으로 탄핵되어 유배를 가자 대과시험을 치를 수 없도록 된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것으로 보았다. 둘째 구의 ‘가을산은 담담하여 무정하구나.’는 표현은 노론이 권력을 잡아 소론을 탄핵하는 데도 세상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음을 읊고 있다. 넷째 구의 ‘어찌할 바 모르는 닭이 낮에 우는구나.’는 할아버지의 탄핵 탓에 대과시험을 칠 자격조차 박탈당한 조술도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함을 묘사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위 시를 이처럼 분석한 것은 필자의 자의적인 해석이며, 반드시 그렇게 의미를 분석해야 할 필요는 없다.

 

1786년에 작성된 조술도의 간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면 위 시를 읊은 조술도가 누구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 주실마을) 출생으로, 본관은 한양이다.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곡(晩谷)이다. 할아버지는 동부승지 조덕린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조희당(趙喜堂)이며, 어머니는 장수 황씨로 황종만의 딸이다. 5남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형으로 조준도(趙遵道)‧조운도(趙運道)‧조근도(趙近道)·조진도(趙進道)가 있다. 부인은 김주우의 딸 의성 김씨이다.

당시 선비 집안 자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어릴 적부터 청년기까지 계속 공부를 하였다. 결국 대과를 준비하는 공부였다. 1759년(영조 35) 바로 위의 형인 마암(磨岩) 조진도(1724~1788)가 증광별시로 문과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 병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지평(持平) 이윤욱이 조부 조덕린의 관직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손자가 과거시험을 보고 대과에 급제한 것은 부당한 일이라며 급제를 취소해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이에 김상로와 홍계희가 주청하여 급제를 확인해주는 합격증인 홍패(紅牌)를 거두어 갔다.

조술도도 삭과(削科)되었다. 즉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에서 제외시켜버린 것이다. 조덕린의 손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그는 한동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다. 선비집 자제가 과거시험을 볼 수 없으면 할 수 있을 것은 많지 않았다.

결국 조술도는 과거를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학문에 몰두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그의 학문이 뛰어나 지역 사람들이 조술도를 월과(月課)의 학정(學正)으로 추대하였다. 월과란 달마다 정례로 하는 시험 등 여러 일을 말한다. 학정이란 유생의 풍속을 담당하는 교관직으로 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였기에 자격 기준이 엄격하였다. 조술도는 학정이 되자 상벌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여씨향약에 준해 생도들을 가르쳤다.

그러면 조부 조덕린이 탄핵받은 내용은 어떤 것인지 핵심만 언급하겠다. 1691년(숙종 17)에 대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조덕린은 1725년(영조 1)에 당쟁의 폐해에 대한 내용을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돼 3년간 적소 생활을 했다. 1736년(영조 12)에는 서원이 너무 많이 설립되는 문제를 조정해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1725년 당쟁 폐해를 상소한 문제까지 연관 지어 다시 노론에게 탄핵받았다. 1737년(영조 13) 제주로 유배 가던 도중에 전남 강진에서 세상을 버렸다.(본 연재물 9회 차에 조덕린에 대한 내용을 별도 소개했음.)

 

 

조술도의 문집인 만곡집.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술도는 조부의 신원운동을 위해 수차례 서울을 왕래했으며, 당시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그 결과 1789년(정조 13)에는 신원운동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조부가 소론으로서 노론과의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유배지로 가던 길에 죽자,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조술도는 당시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가장 큰 학자였던 대산(大山) 이상정과 구사당(九思堂) 김낙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62년(영조 38)에는 조술도가 살고 있는 마을인 주곡리에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짓고 형들과 함께 강학을 하였다. 후에 만곡정사(晩谷精舍)를 짓자 채제공이 직접 당호를 써주었다.

만년엔 도산서원장(陶山書院長)을 지냈다. 그는 도산서원 유생들을 위해 「향음주고정의식(鄕飮酒攷定儀式)」을 제정하고,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를 교열하였다. 퇴계 학문을 이어받은 스승 이상정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280여 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호문학단(湖門學團) 가운데 6군자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조술도는 여러 저서를 남겼다. 불교를 유교적 입장에서 비판한 『유석명분변(儒釋名分辨)』, 서학을 유교적 입장에서 비판한 『운교문답(雲橋問答)』, 농민안본(農本安民)을 시책한 『권농의(勸農議)』가 있으며, 문집으로 『만곡선생문집(晩谷先生文集)』 12권 6책이 전한다. 이중 『권농의』가 제법 유명하다. 이 책은 태고부터 농본안민의 시책을 소상히 열거한 글이다.

조술도의 서간도 제법 남아 있다. 그 중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장한 것으로, 1786년에 천사(川沙김종덕(金宗德·1724~1797)에게 보낸 편지를 잠시 보겠다. 조술도가 경북 영양군 주곡에 살면서 그해 윤7월 7일에 작성한 것이다.

조술도가 김종덕에게 자신을 ‘아우()’라고 칭하고 있다. 1786년(정조 10) 7월에 김종덕이 손자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수신자인 김종덕의 아우인 김종경(金宗敬)의 중상(中祥)에 가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있다. 중상은 소상(小祥)이라고도 하는데, 초상(初喪) 때부터 계산하여 13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그러면서 김종덕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원문은 생략함.)

 

주실마을 옥천종택, 출처= 한국문화대백과사전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의 주실마을에 건립된 옥천 조덕린의 옛 가옥인 주곡동 옥천종택이 있다. 이 종택은 17세기 중반이나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덕린의 후손들이 주실마을 내에서 분가하였다. 그러니까 조술도도 조덕린의 종택에서 같은 마을로 분가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할아버지인 조덕린은 그 후 향불천위(鄕不遷位)로 옹립되었다. 알다시피 불천위에는 국가에서 인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발의하여 인정한 향불천위(鄕不遷位, 유림불천위), 문중에서 불천위로 모셔야 한다고 뜻을 모아 지역 유림의 추인 형식으로 인정된 사불천위(私不遷位, 문중불천위)로 분류된다. 즉 조덕린은 지역의 유림에서 발의하여 불천위로 모시기로 한 향불천위이다.

현대 시 「승무」 등을 지은 청록파 조지훈 시인도 이 마을에서 태어난 한양 조씨의 후손이다. 원래 이 마을에는 주 씨가 살았으나, 1630년 조선 중기 조광조의 후손인 한양인 조전 선생이 사화를 피해 정착하게 되면서 ‘주실마을’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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