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아 시집 '너만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작가마을) 발간
◉출판사 서평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순아 선생이 시집 『너만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사이펀현대시인선 23)을 펴냈다. 이번 시집 『너만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는 ‘시간 너머’의 화자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시인이 기억하고 찾아내고 추출하는 시간은 모두 우리의 시간이다. 김순아 시인이 자신에게 투영된 화자를 통해 모든 독자의 시간들을 찾아 그 앵글에 맞추어진 서정성을 보여준다. 마치 고요한 폭풍우가 지나간 듯 그녀의 시들을 읽다 보면 잔잔한 파장의 물결을 느낀다. 그 물결은 또다시 大海의 파고로 변한다. 오밀조밀 채워진 언어의 비늘들이 광활한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느낌이다. 그만큼 잘 직조된 시편들이 시집 『너만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에 가득 채워져 있다 하겠다. 이러한 독자의 마음을 대변하듯 정훈 문학평론가가 그 속내를 들여다봐준다. “김순아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지금 이곳에서 이미 흘러간 시간 속에서 자신이 보았고, 체험했고,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더듬는다. 추억이라고 하기엔 부족하고, 미련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청승맞아 보이는 옛시간들을 소환하면서도 점점 낯설어지는 자신과 세계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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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시평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 이 상투적인 말이 김순아 시집에 오롯이 중심추처럼 놓여 있다면 어떨까. 때로는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때로는 진작에 무엇을 찾으러 나섰다가 갑자기 길을 잃어 방황하는 나그네처럼 김순아의 시는 우리 눈을 향해 진자처럼 멀어졌다 가까워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 자신조차도 시간을 거슬러 왔던 길 헤집으며 돌아다닐 것만 같다. 시인은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다. 고향을 잊은 현대인에게 시인이 찾는 고향의 풍경을 가늠할 수 있다면, 아마 시간의 물결이 요동치는 마법의 공간 틈바구니에서 잊은 듯 다시 태어나는 존재들이 손짓할 것이다. 손수건처럼 나부끼면서, 나뭇잎 살랑살랑 흩어져 가는 수많은 ‘나’들이 내게 말을 걸 때까지, 그런 나를 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정훈(문학평론가)
김순아 시인의 시에는 거친 듯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에 투영된 시인의 자화상이 물스미 듯 녹아나 있다. 하지만 그 자화상은 단순한 연대기적 자화상이 아니다. 언어의 결속에 오밀조밀 틈없이 매워진 이슬 같기도 하고 광활한 바닷가 모래알처럼 끝이 없기도 하다. 이처럼 김순아 시인은 긴 낭하의 끝에서 울리는 자신만의 새로운 시 세계를 펼친다.
-배재경(《사이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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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약력
김순아 시인은 1966년 경남 양산출생으로 2001년 《한국문인》 시, 2017년 《시와 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 『슬픈 늑대』, 『겹무늬 조각보』, 『푸른 파도에게』, 에세이집, 『인문학데이트』, 비평집 『현대시로 읽는 식인食人의 정치학』 등이 있다. 현재 부경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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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의 시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다
모든 안은 문을 통과해야 이른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거나 잘 못 누르면
그대로 벽이 되는 문
생각해 보니 그간 수많은 문을 통과해 왔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밤비처럼 서성이며
쾅쾅 거칠게 밀어붙이기도
힘겹게 들어가
따스한 아랫목에 손을 넣고
말기에 이른 네 슬픔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드나듦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까무룩 잊는다
활짝 열린 문은 바람에 쉬 닫힌다는 것
사람의 비밀번호는 늘 바뀐다는 사실을
익숙하게 드나들던 네 방문이 오늘은 굳게 닫혀 있다
도둑처럼 은밀하게 번호키를 눌러도
발길질하며 온몸으로 부딪쳐도
완강히 거부하는 문 앞에서 새삼 깨닫는다
충분히 열려 있다고 안심하는 순간
문은 차디찬 벽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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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하나
입에 혀같이 나의 구미를 맞추는 숟가락
그것이 날라다 준 음식을 씹으며
문득 생각한다
우묵하게 패인 숟가락
가문 저수지 바닥처럼 금 간 안쪽
가만히 들여다본 적 있는지
쏙 들어간 안쪽 뒤집으면 볼록하게 솟는,
어머니의 가슴 같은 그 뒷면에
찌그러진 내 얼굴 비춰본 적 있는지
그렇게 스쳐 갔을 그 누군가의 얼굴도
생각해 보았는지
진눈깨비 날리는 출출한 겨울 골목 포장마차
붉게 언 생강 같이 터진 손으로 어묵국에
숟가락 꽂아 내밀어주는
아주머니의 뜨듯한 마음 받아본 적은 있는지
숟가락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얼마나 많은
혀와 혀끝이 스쳐 지금 내 혓바닥에 와 닿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숟가락으로
때론 차고 때로는 뜨거웠을 국을 떠먹었는지
숟가락질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지
숟가락 하나로 떠올리는 무수한 국물
숟가락 하나에 담긴 낱낱의 밥알들
나를 먹여 살리는 숟가락 주인이 누구인지
나는 과연 누구를 부양한 적 있는지
하루 세끼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가
누대를 건너갈 지존의 숨줄이란 걸
수많은 입술을 스쳐 갈
목숨壽 복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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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풍경
기장군 연화리, 빛바랜 바다 무늬들이 엉겨 붙은 어물전 모퉁이, 아픈 다리 지탱하느라 한쪽 다리 절, 뚝 굽혀 앉은 한 늙은 여자 물간 생선 손질하다 대뜸, 야이 웬수야 그냥 콱 뒈져 뿌지 따라오기는 와 따라오노, 산 아랫마을 뒤로 하고 차들 질주하는 길 건너로 기우뚱 리어카를 끌고 온 노인, 움푹한 두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 이마의 땀을 쓱 훔치며 늙은 여자 곁에 쪼그려 앉습니다. 웬수 같은 양반 젊을 때는 애먼 년 눈 맞춰 나 버려두고 밤도망질…, 늙은 여자 가래침 칵 뱉어냅니다. 저 웬수 뒤치다꺼리하다 내가 죽겠네, 바닥에 생선을 패대기치다가 다시 주워 손질합니다. 발길 뜸한 어물전 푸념처럼 비릿한 한숨이 흘러나오고, 노인은 그녀의 곁에서 가만가만합니다. 잠시 쏴아아- 파도 소리만 높아지는 해 질 녘 고요, 이윽고 여자가 생선을 주섬주섬 거두어 안고 리어카에 탑니다. 노인도 넙치 같은 손 오므려 힘껏 리어카를 끕니다. 장딴지 힘줄 파르르 떨며 끙차, 리어카 손잡이를 들어 올리는 노인, 그의 등을 밀물이 가만가만 밀어줍니다. 파도가 리어카 두 바퀴를 슬쩍 받쳐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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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벽에도 서늘하게 출렁이는 연못이 있습니다. 못이 박힐 때 움푹 팬, 못이 뿌리 내린 벽의 안쪽에 핏물 같은 물이 고여 있습니다. 그 물의 힘으로 못이 자라고, 자기보다 몇 배 무거운 사물들을 들어 올립니다. 벽에도 연못이 있어 물 위에 꽃이 핍니다. 때로 수련 잎이 가슴을 말아 하늘로 밀어 올리면 폴짝 참개구리들이 올라앉고, 그런 날 잎은 더없이 싱싱하고 푸릅니다. 잎에서 잎으로 몸을 날리며 제 존재의 자유로움을 맘껏 즐기는 참개구리들, 어떤 놈은 두 발로 잎끝을 잡고 상체만 빼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퉁방울 같은 눈으로 나를 보며 깊은 밤까지 개골개골, 잠 설치게 합니다. 가만히 중얼거리면 입 안에 푸른 물이 고이는 몯, 벽에도 있어 들여다보면 거칠고 야윈 손들이 보입니다. 가슴에 수많은 못을 꽂고 진흙 바닥에 엎드려 연잎을 따는, 딱딱하게 못 박힌 손바닥들이 눈물겹게 만져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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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렸다와 버려졌다 사이
누가 사과 하나를 골목에 버리고 갔다
누가 인형 하나를 골목 모퉁이에 버리고 갔다
그렇게 버려지는 게 사과와 인형의 꿈은 아니었겠지만
그렇게 쉽게 버리려 했던 것이 사람 마음은 아니었겠지만
눈금 한 칸의 온도 차 사이에서
크레바스보다 좁고 깊은 온도 차 사이에서
그러나그래도그래서그러므로그럴수밖에없어 버려야 하는 사연도 있는 것이어서
자식을버리고부모를버리고반려자를버리고……,
버렸다와 버려졌다 사이에 얹혀 있다
어느 쪽이건
환한 절벽과 캄캄한 낭떠러지가 동시에 보이는
두 말을
가만히 맞대면
푹, 깨져 쏟아지는 술어들
나는 괴롭다와 외롭다 사이를 한 뼘쯤 지우고
슬프다와 아프다 사이를 한 뼘쯤 지우고
절벽과 낭떠러지 사이에
울음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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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아파트
201호 베란다에서 까치가 담배를 피우는 겨울밤
301호 고무나무가 쿨럭쿨럭 기침하는 겨울밤
401호 너구리가 스위치를 끄고 벽에 기대어 잠든 겨울밤
501호 곰이 실내 온도 조절기를 누르고 돌아서는 겨울밤
601호 고양이가 이어폰을 끼고 막 책상 앞에 앉는 겨울밤
701호 커다란 흰 개가 천장을 노려보며 소리치는 겨울밤
801호 쌍둥이들이 장난감 총을 겨누며 쿵쾅 뛰는 겨울밤
901호 노인이 막 숨을 거두는 거실에 디지털시계 알람이 길게 울리는 겨울밤
1001호 젊은 곰이 이중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오디오를 켜는 겨울밤
1101호 여우가 전자기타를 목에 걸고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는 겨울밤
1201호 여자가 전력이 소진된 남자의 몸에 손을 어색하게 갖다 대는 겨울밤
1301호 재스민과 아이비가 껴안았던 손을 풀고 각자의 몸으로 돌아가는 겨울밤
1401호 소녀와 소년이 각자의 스마트폰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겨울밤
1501호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하얀 눈이 푹푹 내려 쌓이는 겨울밤
1601호 펭귄이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며 컴퓨터를 재부팅하는 겨울밤
1701호 수달이 TV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침 흘리는 겨울밤
1801호 돼지가 유튜브 먹방을 보며 손가락을 쭉쭉 빠는 겨울밤
1901호 인공지능 로봇이 청소하다간 발랑 뒤집어져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 겨울밤
2001호 창에 붙박여 있던 달이 창백한 몸을 열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돌아가는 겨울,
101호 반지하 방에서 두 시가 찢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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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목차
김순아 시집
제1부
시간이 지나면
1년 후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다
글쓰기 강의 목차
오른손과 왼손
배운 사람
신발론
보수주의자 고양이
숟가락 하나
국그릇 속에 떨어진
불후의 풍경
돌탑
못
붉은 연꽃
구룡지 전설
실패를 위하여
눈가에서
귀를 접다
옷
제2부
철길
저물녘
말의 풍경
1번 출구
줄
말씨
누군가
흰 발을 보여줘!
2시 30분
사이에서
버렸다와 버려졌다 사이
빈방 고양이
벌레가 되다
일요일
사생활
동시에
반쪽
숫자에 갇히다
본색
제3부
청년의 희망
사진의 매혹
늑대
겨울밤 아파트
본적
수 백마일 떨어진 곳에서
홀로그램
연옥의 시간
도플갱어
공모자들
시민
안드로이드
낮잠
비정기적 보고서
사물통신의 세계
밤낮
오늘의 채널
팬옵티콘
건너간다는 것
제4부
하필
목의 표정
타다만 몸
귀갓길
등 뒤에서
작은 개
사인
은빛 늑대
최초의 언어
입을 열면
수제비를 끓이다
이명耳鳴
미래가 두렵다
시간의 미로
아이덴티티 카드
복도에서
어떤 귀향
죽은 친구에게서 온 편지
불귀
◆해설: 정훈(문학평론가)-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