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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essay

백문현 - 인생 옴니버스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4.03.15|조회수51 목록 댓글 0

poem essay | 백문현

 

 

인생 옴니버스

 

 

 

​​ 미당 서정주의 ‘신록‘이란 시는 아는 자만이 아는 명시다. 온 천지가 푸르게 물들 때 사랑에 빠졌던 고백을 하고 있다. 사랑하기엔 너무 늙어버린 사람들끼리 풋풋한 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다. 저마다 옛날을 떠올리고 있는 게 얼굴에 드러났다. 어이할 거나, 한 번은 기찬 사랑을 한 것이다. 지그시 눈을 감으며 산사山寺 앞 그늘진 곳에 앉아 있던 소녀의 얼굴에 혼이 빠졌던 날, 그런 날이 있었다. 불안해하면서도 꿈이 많던, 연두색 잎이 푸르게 변해가던 때다. 그때 소망했던 것들, 그때 소중히 여겼던 가치가 그렇게 대단한 거였는가를 퍼즐 맞추듯이 꿰어 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른이 되면 엄청난 일을 할 줄 알았다. 개뿔.

 

몇 년 전인가, TV에서 황순원의 ‘소나기’를 방영했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절절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있은 소년과 소녀의 청순한 사랑 이야기다. 윤 초시의 손녀딸이 죽어가면서도 소년과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소년도 평생 그러하리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겨울에 소년과 소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단팥죽을 호호 불며 사랑을 나누었다. 통금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첫사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종착역은 아담스인(Adam’s inn)이었다. 사랑하면 결혼하는 줄 안, Love equals marriage인 줄 알던 때다. 어느 날 ‘제비’란 노래 가사만을 쓴 편지를 보내 왔고 한 마리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 서울역 다방에서 애꿎은 시민을 위협하며 변심한 애인을 찾아 달라고 인질극을 벌이는 군바리를 한심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 무모한 용기를 부러워했다. 사랑도 변하는 것임을 알고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한 청춘이 시리게 울었다. 첫날밤에 갑순이처럼 달 보고 울었다고 고백했다. 한참 후에 들었다. 이수일과 심순애를 떠올렸다.

 

알파벳도 모르고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접한 영어가 신기했다. 학창시절이 끝날 때까지도 외국인과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외국 길거리에서 치마를 입은 남자를 만나게 되어 불쑥 스코틀랜드사람(scottish)이냐고 물었다. 거꾸로 경상도 사람이냐고 되물어 놀랐다. 서울서 학원 강사를 해서 발음만 듣고도 알았다. 스코틀랜드 전통 옷을 알아준 나를 보고 반가워했다. Are you kyungsangdo people? 빈정댄 건 아니지만 칭찬은 아니었다. 그 영어로 외국에서도 살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을 때 직장인들이 흔들흔들했다. 그때는 해외 전자매장 뒷자리에 삼성과 엘지 제품이 있었다. 어느 날부터 역전되었다. 현대자동차가 세계를 누빈다. 해외 오지에서도 삼성전자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있다. 지금은 밖에 나가면 자랑스럽고 인천공항으로 들어서면 더 자랑스럽다. 단군 이래 최성기를 누리고 있다. 내가 이 발전에 무엇을 보탰는가 자문할 때가 많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 단칸방부터 시작하여 스무 번 가까이 이사를 하고 아들딸 낳고 기르고 살았다. 나를 위한 것이 나라를 위한 것, 글쎄다.

 

차디찬 윗목 구석에는 고구마를 담은 가마니가 있어 조금씩 목이 쳐지고 제풀에 넘어지면 봄이 왔다. 고구마가 겨울 양식이었다. 호롱불 그을음으로 코가 까맸다. 공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는 것이 교과서에 자랑삼아 버젓이 실렸다. 이십 리 정도는 걸어 다녔다. 빨랫줄에 걸린 옷을 훔쳐 가는 도둑도 있었다. 이렇다고 사랑을 못하랴. 사랑의 기억은 평생을 따라 다녔다. 그 높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봉 베이스캠프(ABC)까지도 따라 왔다. 나마스테라고 빙벽을 보고 외쳤다. ‘내 그리움 선 채로 산이 되어/ 한생이든 반생이든 지내고 싶던/ 가슴 저리게 외로운 날들/ 그대가 눈부신 꽃이든 날들/ 그런 날이 있었지’. 어느 시의 일부다. 그래, 그런 날이 있었다. 중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제비가 되어 창공으로 날아갈 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것이 인생이다. 왕자와 결혼한 신데렐라의 그 후 이야기는 없다. 다한 인연은 가슴 속에만 있으면 족하다.

 

우리 세대를 전후한 사람들이 옛날이야기를 할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는 것이 고단한 삶의 역정이다. 조실부모, 지독한 가난, 가정불화, 질병으로 인한 고통 같은 것들이다. 군 입 하나를 덜려고 일찍 시집을 가야 했던 처녀, 기구하게 살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주변도 더러 있었다. 그들이라고 푸른 시절이 없었으랴. 사랑의 산물을 맡기고 고향에 발걸음을 끊은 열여섯 살 어린 처녀도 일흔 살이 넘었겠다. 그 당시 대다수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가난했다. 똑똑해도 가난이 원수인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혜택을 받은 것이다. 초등학교 앨범에서 먼저 죽은 친구를 고르니 삼십 퍼센트가 넘었다. 제대로 쨍하고 해 뜰 날도 못 봤다.

 

얼마 전 노인대학에 갈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 칠팔십 대 노인들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고 묻고 답했다. 씨줄 날줄로 엮어 돌아보았다. 이 시대에 태어나 여기에 올 정도면 인생 우등상을 받을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크게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건강한 장수로 상위 1% 이내에 들자고 격려하고 다짐했다. 썰이 끝나고 간 식당 앞에는 줄이 길었다. 한 끼 이천 원이었다. 행복은 내 마음에서 피어나는 것, 가진 걸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나 생길까. 잃은 것과 없는 것으로 늘 괴로워하지는 않는가. 엄청난 이름을 남기지 못할 바엔 건강한 장수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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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현

2014년 《에세이스트》로 등단했으며 수필집으로 『물 속의 달』, 『거울 속의 꽃』, 『아내와의 재혼』, 『40년 삶의 시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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