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 안경덕
단비와 우산
벚꽃은 아직 입을 다문 게 많다. 비우듬한 언덕에 드문드문 군락을 이룬 노란 개나리꽃과 중턱 길에 새하얀 목련꽃은 만개 시기가 살짝 지났다. 탐스러운 꽃을 때맞춰 보는 것도 행운이겠다. 대개의 사람이 꿈꾸던 일도 때를 놓치는 게 일쑤다. 수백 종류의 꽃나무는 제 꽃 피울 때를, 저만의 꽃 모양을 이리도 잘 아는지.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힘들게 피운 꽃은 짧기만 한 제 생을 안타깝다고 할까. 사람은 꽃의 절정기만큼 짧은 황금기를 아쉬워하지 않은가.
길게 줄 선 벚나무가 구포 낙동강 둑길 양쪽으로, 언덕배기 중턱에도, 대로 가에도 끝없이 즐비하다. 잔뜩 흐린 날씨에 분홍빛 벚꽃이 등불처럼 환하다. 둑이 아프도록 많은 사람이 꽃 잔치를 즐긴다. 꽃으로 둑을 치장해 놓고 둑의 수고로움에 위로해 주는 듯하다. 오랜 가뭄에 꽃피워 준 나무에 비 오길 바라는 간절함을 살포시 얹는다. 나무도 꽃송이로 낭창낭창 대며 화답한다. 저도 단비를 기다린다고.
다소곳한 꽃에 취해 제법 걸었는지 기운이 달린다. 마침 하얀 목련꽃이 우릴 부른다. 키 큰 목련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편다. 몇 가지 샛거리를 자리에 놓고 셋이 둥글게 앉는다. 하늘거리는 꽃잎과 명주바람의 몸짓이 현악기의 떨림 같다. 우리는 저절로 ‘하얀 목련꽃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그 사람’하고 노랠 부른다. 합창 소리 하도 높아 하늘이 놀랐을까. 빗방울을 하나둘 떨어뜨린다.
두 친구는 휴대용 우산을 가방에서 꺼낸다. 우산 안 챙겨온 내가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칠 처지다. 이 정도의 비는 걷는 데 무리는 아닐 테니까. 단비를 자연스럽게 맞아보는 것도 낭만이 있다며 궁색한 핑계를 댄다. 나 때문에 버스 정류장을 서둘러 찾아가야 할 판국에 뜻밖의 우산이 발목을 붙든다. 빨간 동백꽃을 피운 나뭇가지 사이에 우산 두 개가 나란히 누워있다. 우산이 보이는 곳에서 쉼 시간을 가진 게 우연치고 신기하다. 비가 내려 우산이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전 우릴 부른 건 이 우산이었던가 보다. 절실한 시점에 우산이 나타나 준 걸 보면.
갑자기 비가 올 때 갖가지 풍경이 연출된다. 비 맞는 걸 전혀 개의치 않고 빗속을 천천히 걷는 사람, 체면 따위는 주머니 속에 구겨 넣고 달리기 대회 하듯 빗속을 재빠르게 뛰는 사람, 가방이나 상의를, 광고지나 신문지를 둘러쓴 사람, 상가 천막 밑에서 비가 멈출 때까지 하염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일면식이 없을 텐데 둘이 한 우산을 쓰고 다정히 걷는다. 우산을 들어주는 사람이 무척 다감하다. 우산이 정을 솟게 해 주는 모양이다.
우리 가게 앞에 여자중학교가 있다. 등하굣길에 길게 이어지는 알록달록한, 동그란 우산들이 꽃밭 같다. 방싯방싯거리며 함박웃음 짓는다. 그럴 만도 하다. 사람이 우산을 접어 머리 아프게 거꾸로 벌만 세우다가 네 활개를 펴 주지 않는가. 거기에 우산을 떠받들어 환대한다. 비가 내려야 외출할 수 있는 우산, 회색 거리에서 포근하고 나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람과 우산의 협력 덕분이다. 각다분한 세상만사도 우산의 화평스러운 행렬처럼 둥글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우산 두 개 중 작은 우산을 짝 펴는 순간 나도 친구도 우산처럼 활짝 웃는다. 내게 우산이 생겼다는 걸 아는지 빗방울이 더 잦아진다. 큰 우산도 일어서고 싶어 한다. 단짝을 내가 떼 놓은 셈이다. 큰 우산을 거추장스럽다고 여겼으니 작은 우산을 덥석 갖는 게 살짝 민망하다. 우산은 배려, 사랑, 봉사, 양보의 뜻을 품고 있다. 문학 작품 등에서 사랑의 끈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우산처럼 바람막이와 그늘이 되어 준다. 우산을 이 자리에 고이 놓아준 이의 성품이 우산을 닮았을 성싶다. 나는 누구한테 우산 같은, 단비 같은 일을 한 적이 있었는지. 늦었지만 우산 하나 가슴 깊이 간직해야겠다.
우산 덕으로 빗속을 걷는다. 단비가 흠뻑 땅을 적셔 주길 기원하면서. 나뭇잎에, 우산에 우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음악처럼 리듬을 탄다. 경쾌하다. 사방풍경도 운치를 더한다. 말없이 흘러가는 저 강물도 비와 놀고 싶을까. 물결이 살랑인다. 잔뜩 목말랐을 산야도 얼씨구나 하며 흥이 났을 테다. 대로 너머 건물도, 차도에 싱싱 달리는 자동차도 개운하게 빗물에 세수한다. 함초롬해진 꽃들과 나무들이 단비에 고맙다고 인사한다. 우산도 꽃구경, 사람 구경에 신이 나 물방울을 톡톡 튕기며 어깨를 으쓱으쓱한다. 내일이면 물을 양껏 머금은 흙의 베풂으로 꽃들은 더욱 화사하고, 상큼한 생풀 내음도 코끝을 스치리라.
단비와 우산, 어릴 때 교과서에 나온 철수와 영희처럼 친근하고 정겹다. 오늘 이 우산이 내게 천군만마 같다면, 단비는 만물의 생명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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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덕
2000년 《수필과비평》 등단했으며 수필과비평문학상, 수필가문학상 대상 등을 받았다.
수필집으로 『꿈, 화분에 심다』, 『달도 밝다 보름달이거든』. 『엄마는 복덩이』, 『나무들의 왈츠』, 선집 『무단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