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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essay

안병진 - 노을, 별을 품다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5.12.22|조회수115 목록 댓글 0

poem essay

노을, 별을 품다

 

 

안병진

 

 

아이는 물 빠진 모래톱을 헤집으며 조개잡이에 여념이 없다. 진득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곳저곳 호미질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팔짱을 낀 젊은 남자가 그런 아이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가물가물 수평선을 끌고 가는 몇 척의 선박과 바다를 아우르는 산자락들이 연출하는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그의 뒤태가 듬직해 보인다. 나는 멀찍이 솔밭공원 그늘에서 아들과 손자가 연출하는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나는 이제 등장인물 3 정도로 비중이 줄어들었을 것이나, 그마저도 뿌듯하다. 간만에 3대가 낙동강 하구에서 저마다의 추억 한 컷을 곱씹고 있는 중이다. 고작 다섯 살짜리 손자에게는 오래된 추억이 있을 리 없다. 며칠 전 보았던 조개잡이 영상이 고작일 것이다. 숨구멍을 찾아 소금을 넣고 기다리다 고개를 내미는 이란 가재와 맛조개를 주워들고 환호성을 지르던 또래 아이들의 영상이었다. 오늘은 다시 내일의 추억이 될지니, 영상 속의 주인공이 마냥 부러웠던 손자는 물에 퍼질러 앉아 가장 열심히 추억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마도 아들은 손자 나이 때쯤 넓은 백사장에서 텐트 치고 놀던 추억을 되새기고 있지 않을까. 유난히 물을 무서워했던 아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두려움을 잊고 마음껏 풍덩거렸다. 수심이 얕아 고만고만한 아이들에게는 최적의 놀이터였다. 다양한 조개잡이 체험을 한 곳이라 적지 않은 추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들은 손자의 조개잡이가 소득이 없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죄 서툰 고사리손의 호미질에 걸려들 조개가 어디 있겠는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을 빌렸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줄 것이다. 그러다 손을 보태면서 그 옛날 아버지의 모습을 대물림하지 싶다. 저물녘의 우수 때문일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귀소본능으로 허둥거리게 되는 시간, 생각의 촉수가 자꾸만 유년의 어느 한 시절로 치달아 간다. 나는 낙동강 칠백 리 허리께에 자리 잡은,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 거름강이라는 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친구들과 멱 감고 장난치며, 조개를 잡던 추억을 그곳에 남겨둔 채, 고향의 기강나루 나룻배를 타고 부산으로 떠나왔다. 그런들 어제는 다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일 따름이니.

아들은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손자까지 안겨 주었다. 손자의 재롱을 볼 때마다 가을걷이만은 풍성하게 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해진다. 손자로 인해 웃고, 손자 덕분에 삶이 더욱 진중해진다. 그 귀엽고 앙증맞은 목숨 하나가 얼마나 큰 에너지원이 되는지, 때로는 세상을 향해 만석의 풍요를 외치고 싶은 치기까지 생긴다. 바다가 강물을 포근하게 안아주듯, 나도 손자와 아들을 계속 품 안에 두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그러했듯, 따스하고 포근한 둥지를 찾은 새가 옛 둥지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다. 현실을 빨리 깨닫는 것이 노년을 편히 살 수 있는 방편일지니. 그저 손자를 볼 때마다 눈과 귀를 열어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저장하느라 남모르게 분주할 뿐이다. 다대포하구는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전국 유일의 하구이기 때문이다. 일출의 광경은 보지 못했지만, 일몰의 아름다움은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궁둥이를 붙이고 앉는다. 어느새 조개잡이를 끝낸 손자도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내 곁으로 다가온다. 조가비 같은 손을 잡아 무릎에 앉히고는 서쪽을 향해 자세를 고쳐 잡는다. 산자락으로 노을 색이 짙어간다. 조금 남은 햇살은 일렁이는 강물에 아지랑이처럼 번진다. 그 위로 붉은 물감이 풀리고 동양화 한 폭 같은 풍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일출이 생동감이라면 일몰은 장엄함이다. 온종일 대지를 달구던 태양은 하구를 물들이는 것으로 쇠락해지고 있다. 제 소임을 끝내고 돌아서는 태양의 등은 허무한 비감보다는 숙연함을 불러일으킨다. 점점 희미해지는 노을 속에서 내가 가야 할 바를 추스르게 된다. 어스름한 하늘에 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태명이 큰 별이었던 손자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닮은 별이다. 다가오는 내일은 손자가 밝혀 나갈 시간이다. 저 작은 별이 사방을 환히 비추는 것처럼, 손자도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눈을 닦고 귀를 열어주는 것이 노을로서의 내 소명일 것이다. 느릿느릿, 걸음걸이마저 나를 닮은 손자가 내 손을 꼭 잡고 별을 맞는다. 세월로 노을이 된 내 어깨 위로 별빛이 내려앉는다. 콧날이 시큰해지도록 따뜻한 이 순간, 다대포는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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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진

2025한국수필등단했으며 수필집 노을, 별을 품다, 산문집 편지 그리고 사랑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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