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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인문산책

김흥수와 마광수와 나는 9-기록되지 못한 순간을 붙잡습니다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26.09.17|조회수65 목록 댓글 0

김흥수와 마광수와 나는-9

 

기록되지 못한 순간을 붙잡습니다

 

김종희 작가

 

선묘각에 닿은 시간은 오후 4시였습니다. 태백산맥을 빠져나온 바람이 소백산맥 능선으로 출렁거립니다. 중년의 배처럼 편안한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나도 기대어 앞서간 사람이 남긴 발자국에 밑줄을 그어봅니다.

한때 같이 걸었던 사람은 녹아버린 눈처럼 사라졌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지 모를 한때의 그 사람 이름을 부르며 아미타부처님 손가락 끝에 앉았습니다. 죽어 정토 말고 살아 정토라고 역사와 설화 사이 선묘각을 봅니다. 살아 이루지 못한 사랑 죽어 정인의 그림자에 들어본들 만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요.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궤적을 온전히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 합니다. 대상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혹은 찰나의 감정이든 내 인생의 특별했던 한때를 영원 속에 박제하고 싶은 갈망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유한하며 망각은 필연적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덧없는 순간을 붙들기 위해 애쓰는 건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붓을 들어 캔버스를 채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한 편의 그림을 단순히 시각적 기호로만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예술 작품은 당대의 사회문화적 공기뿐 아니라 작가의 치열한 사유 방식과 삶의 무늬가 응축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사회적 맥락과 개인의 실존적 고뇌가 맞물린 지점에서 작품을 읽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깊이와 넓이를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한 광학적 수용을 넘어서 있으니까요. 그것은 대상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작가의 내면적 진실과 조우하는 고통스러운 성찰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환하게 뜹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갑니다. 어쩌면 사랑은 가장 부드러운 시간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기억도 부드럽습니다. 바람에 눈뜨는 모과나무 겨울 눈이 둥글게 말아 올린 장밋빛 고요로부터 푸른 눈의 수사로 걸어 나올 유일한 언어가 사랑입니다. 온통 황홀한 세상을 걸어가는 것도 사랑할 때의 눈빛입니다. 순간순간의 애틋하고 아찔한 감각들이 잊혀질까 연필을 잡고, 붓을 잡는 것이겠지요.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목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삼키느라 타는 가슴을 쥐고 전화기를 만지고 또 만지작거립니다. 손끝에 닿은 금속의 차가움도 사랑할 때는 부드럽고, 핏기 잃은 잇몸도 사랑할 때만큼은 그윽해집니다. 한낮의 빵집에서 한낱의 반대말을 찾다가 뜯다만 빵을 풍경에 적셔 마시고 있습니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나를 다른 사람이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오만과 편견>을 퍼 올립니다. 오래되어도 살아있는 문장은 노랗게 익습니다.

 

태양의 열기가 연못의 수면 위에서 눅진하게 녹아내리는 한낮입니다. 바람 자는 연못 연대가 꼿꼿하게 흔들립니다. 연잎은 저들끼리 몸을 비벼 바람을 일으킵니다. 바람에 덜석거리는 연뿌리가 적막을 밀어 올립니다. 사람 없는 뒤뜰에 적막이 터집니다. 적막은 물방울소리로 터집니다. 연못 바닥에 오랜 시간 쌓여있던 점액질 침묵은 과육처럼 부풀어 올랐을 겁니다. 마침내 몸을 비벼 바람을 일으키는 존재가 있어 팽팽한 긴장을 아찔하게 터트리는 건지도 모릅니다.

목이 긴 얼굴에, 아몬드 반개를 씹은 입술을 꽃봉우리처럼 오므린 여인이 툇마루 끝에 앉아 있습니다. 한 발은 댓돌 아래로, 한발은 댓돌에 올린 가채 쓴 여인이 한 손에는 장죽을, 다른 한 손은 생황(笙簧)을 잡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입술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었을 생황은 여인의 온기를 머금은 채 여인의 품에 있습니다. 악기에서 흘러나왔을 가락은 이미 공기 중으로 흩어졌으나, 악기를 더듬던 감각은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습니다.

치맛자락 아래로 살짝 고개 내민 하얀 버선, 묘하게 벌어진 다리는 야릇한 상상계로 자극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살결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이자,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올 듯한 어떤 도발일지도 모릅니다. 깊게 빨아올린 담뱃대의 연기가 붉은 입술 사이에서 가늘게 흩어집니다. 허공을 유영하는 연기는 연꽃의 향기와 뒤섞입니다.

 

- 신윤복 . < 여속도첩 > ’ 연당의 여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넌출거리는 연잎들이 치마폭처럼 너울거립니다. 그 거대한 잎사귀 아래 물속에는 숱한 생명체들이 은밀하게 물살을 가르는데 잎사귀 사이로 불쑥 솟아오른 연꽃은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겹겹이 벌어진 분홍빛 꽃잎 부드럽게 붉습니다. 활짝 피어난 연꽃이 누군가의 시선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 채 유혹하는 원숙한 육체라면, 그 곁에 아직 피지 않은 봉우리는 팽팽하게 차오른 욕망의 전조라고 할까요. 단단하게 다문 봉우리는 금방이라도 쏟아낼 붉은 기운이 신호를 기다리는 러너처럼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쾌락에 대한 은유이며, 소용돌이치는 억눌린 정념의 결정체입니다. 활짝 핀 꽃이 발산하는 농염함과 봉우리가 간직한 금기된 긴장감은 연못 위에서 기묘한 대비를 이루며 말초신경을 자극합니다.

정지한 화면 속 공기는 끊임없이 일렁입니다. 넌출거리는 연잎의 곡선과 여인의 목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생황의 직선이 충돌하며 묘한 에로티시즘으로 존재합니다. 신윤복은 <연당의 여인>에서 단 한 점의 노출도 허용하지 않았으나, 여인의 표정과 소품이 가장 은밀한 방 안의 풍경보다 더 지독한 관능을 표출합니다. 신윤복의 그림은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을 동원해 욕망의 초상을 뜨겁게 담아냅니다.

사랑을 온전히 품어내지 못하는 기녀의 생. 연당 여인은 연꽃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읽습니다. 화려하게 피어났으나 시들어 가는 고독, 피지 못한 봉우리처럼 가슴속 깊이 박힌 채워지지 않는 갈증.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실 때 폐부 깊숙이 금침을 깔며 웅크린 감각을 더 깊이 밀어 넣는지도 모릅니다. 입술에 닿은 담뱃대의 차가움, 목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삼키는 가슴은 끈적한 침묵의 순간과 맞닿아 있습니다. 사랑은 떠나고 나서야 사랑인 줄 알게 된다는 어느 문장처럼 연당의 여인, ‘지금의 부재를 통해 한때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한낮의 대기 중으로 하얗게 스며들었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새벽. 지난밤 켜둔 채로 잠들었던 오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의 첫 말이 툭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가슴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위해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라는 가수의 허스키한 음색이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시트에 몸을 가둔 채로 한동안 있었습니다. 가슴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찾아 설원에 묻힌 사람들처럼 시간이 녹아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꽃을 피우려는 의지 풍경을 만들듯 내가 만들어 가는 풍경을 걷습니다. 피는 밤엔 불을 켜지 않아도 된다지요. 꽃잎 한 장 한 장에 내려앉은 어둠이 찰박찰박 물길이 된다고요. 미닫이를 열면 꽃잎에 내려앉은 강물이 쏟아져 들어온다고요. 월인천강은 강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꽃잎에 매달린 달빛 흐르는 강이지요. 배꽃에 흐르는 강은 흰 물살로 흐르고, 사과나무에 흐르는 강은 푸르게 굽을 만들었어요. 노란 은행잎을 적신 강물은 어떤가요. 한꺼번에 쏟아지는 수천 마리 나비처럼 파닥거리지 않던가요. 저마다의 빛깔로, 저마다의 향기로 시간을 받아들이는 풍경을 보며 나도 풍경으로 서는 오묘한 아침입니다.

 

- 김흥수 . < 여심 >.80×155.1981-

여자의 마음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일으키는 주제입니다. 오묘한데 선명하고, 선명한데 알 수 없고, 보이는 데 읽을 수 없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고요. 그러니 그 기저에 깔린 리아스식 해안 같은 길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잖아요. 한마디로 오묘한 세계니까요. <여심>이라 명제한 김흥수의 작품은 그야말로 여심의 세계를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심이란 인간으로서의 여심이며 살아있는 육체 속에 숨어있는 수수께끼인 것이다. 풍만한 육체를 표출하고 있는 섬세한 선의 율동은 오히려 마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백색이 지닌 여체의 매력은 오히려 사실적으로 표현된 여체에서 느낄 수 없는 전율마저 감돌게 한다. 여성의 백일몽이다. 짙은 녹색과 강한 적색으로 이루어진 추상화면과 요염한 여체 사이에 그려진 색동의 밀어는 여심을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든다그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반자인 장수현의 해설입니다.

때마침 벌새가 날아왔습니다. 사소한 바람에 꽃대궁이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휘청이고 있습니다. 찰나의 날갯짓이 남긴 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꽃이 온몸으로 써 내려간 긴 문장의 마침표였을지도 모릅니다. 벌새는 그 문장을 입에 물고 빛의 속도로 사라졌으나, 꽃의 흔들림은 이내 잔잔한 물결이 되어 공중을 떠다닙니다. 잿빛 나비가 그 고요한 틈을 타 팔랑거립니다. 정적 속에 숨겨진 생의 속도를 실감하게 됩니다.

백색의 몸이 밀어내는 색동이 미세한 진동으로 와 파장을 일으킵니다. 그러다 이명이 되어 고막을 두드립니다. 소리는 어느덧 형체 없는 언어로 우화합니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가슴골 깊숙이 파고든 바람이 나를 웃게 합니다. 꽃이 이뻐도 사랑할 때만 못하고, 물이 부드러워도 사랑하는 그대만 못합니다. 절정으로 있던 꽃들이 바닥으로 내려 앉습니다. 생의 습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밤은 무겁고 눅눅합니다. 건조되지 못한 채 늘어진 젖은 슬픔을 거친 바닥에서 떼어내 바람에 맡깁니다. 손가락 사이로 꽃을 풍장 시키듯, 눅눅한 잔해들을 허공에 뿌렸습니다. 붉고 선명했던 생이 하얀 재로 부서질 때, 존재는 비로소 비대했던 무게를 덜고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한 날의 생이 마르고, 가벼워진 몸으로 우리는 굴러갑니다.

새벽이 한 번도 뜨겁지 않은 때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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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선생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9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수필이 당선 등단했다. 수필집으로 나는 날마다 신화를 꿈꾼다, 돌탑에 이끼가 살아있다, 사랑도 기적처럼 올까, 슈만의 문장으로 오는 달밤』, 아버지는 위대한 문장이다  있으며 인문채록집 기억 장소 그리고 매축지 1, 2, 구술생애사로 경험하는 인문학등이 있다. 현재 문화예술공간 빈빈문화원을 운영하면서 전국 미학강사로 바삐 활동하는 가운데, 국제신문 인문학 칼럼과 계간 사이펀편집위원으로 왕성하게 즐거운 늙음을 베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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