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훈 문장으로 만나는 사람들(7월)
글자의 운명, 문학이 남기는 흔적
- 지속하는 문학이 묻는 것
1.
시 비평을 업으로 하다 보니 아무래도 시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이 여느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그렇다고 시 비평가의 눈이 좀 더 정확하다거나 예리하다는 말은 아니다. 동시대 현장에서 꾸준하게 생산되는 시를 읽고 비평을 하면 우리 시대 시의 지평이 어떤 모양새로 어우러지는지 대략 알게 된다. 대체로 청탁을 받은 시집이나 시편을 읽는 편이라, 일부러 시간을 내어 시인들의 작품을 읽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문학의 위기’를 오래전부터 말해 왔고, 이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인문학 열풍이 드세게 타올랐다. 한쪽에서는 종이 문학의 위기를, 또 다른 쪽에서는 인간문화의 얼개와 줄기를 이루는 인문학 광풍이 들이닥친 역설의 시대를 우리는 지나고 있다. 이 모순되는 현상이 전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삶의 지혜를 고전에서 찾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이 말해주듯, 언어로 기록된 문학의 실효성의 한계가 두드러진 현대에서 사람들은 문학이 지향하는 가치와 의미를 망각해 버리는 경향이 점점 짙어진다. 스마트폰과 노트북만 있으면 거의 모든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 이 ‘편리한’ 세상에서 종이책을 일부러 사면서 읽는 사람이 줄어든 현실은, 역으로 말해 문학의 기능이 그만큼 다양해졌으며 소통방식 또한 더욱 넓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징후에서 우리가 ‘시’나 ‘문학’에 접근하는 방식과 아울러, 그러한 문학작품이 현실과 조응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이 글의 방향이다. 무크지 『잽(jab)』이 기획한 주제 ‘지속’에 관한 청탁을 받고 여러 생각이 스쳤다. 주제가 막연하고 광범위한 데서 비롯하는 난관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 ‘지속’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각종 사업이나 문화 프로젝트가 머릿속을 산만하게 두드렸다. 여기에 내가 보탤 말이 무엇이라도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없지 않았다. ‘지속’은 가치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지속’이란 낱말에는 우리 사회의 온갖 ‘위기 담론’을 돌파하거나 헤쳐나갈 해법이라도 숨어 있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지속’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속 가능한-’이라는 수사가 붙은 문구가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는 최근 접어들어 팽배해진 문명사회의 위기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각종 고갈, 기근, 재해, 위기, 전쟁, 난민, 오염, 배출 등이 야기하는 세계적인 위기감이 그 해결책을 마련하는 가운데 도출된 방안을 떠받치고 있는 ‘정신의 공분모’가 된 듯한 느낌이다.
이런 흐름에 동참해서 ‘지속 가능한 문학’이란 말을 쓸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따져 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이제까지 문학이 사람들에게 어떤 기능과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는 작업이다. 근대문학은 일종의 징후였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이 무엇인지 캐묻고, 반성하고, 전망을 그리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문학작품은 사람들에게 감동 이전에 현실을 반추하는 기능을 도맡는다. ‘현실이 이렇다’가 아니라 ‘현실이 어떤가?’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문학이 한다. 여기에는 분노와 절망도 가득하지만, 사랑과 행복으로 가는 조건이나 길도 제시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심연의 늪에 잠겨있는지 알게 한다.
이것은 물론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타자의 표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고, 진리나 이치가 무엇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궁금해한다. 문학은 우리에게 그런 물음에 대한 정답을 주지는 않는다.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다양한 언어 형식으로 이 세계를 말해 왔다. 그 속에는 한계성을 띤 인간이 한계에 직면해 이를 어떻게 타개하고 받아들이는지 고민의 흔적이 가득하다. 군데군데 웅덩이처럼 빠지곤 하는 인간의 길에서 끝내 길을 잃지 않고 가야만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제 나름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2.
문학은 언어가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영역의 가치생산 활동이요,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한 언어의 드높은 성채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말을 글자로 받아쓸 수 있다는 것은 천양지차다. 전자는 소통의 범주이지만 후자는 소통을 넘어서 창조와 거듭남의 계기를 주는 행위다. 글자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글자는 문학 언어로 조합되고 직조될 때 단순히 문자의 기능을 넘어선다. 오래전부터 인간이 ‘시’를 만들어 내고 창작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한다. 노래로 불리다가 문자로 정착된 시는 그 전달 매체나 형식이 바뀌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본질적인 기능은 바뀌지 않았다고 본다. 고대인들은 시를 일종의 예언의 기능으로 받아들였다. 시인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인간이 어떤 상황에 빠지게 되는지, 그래서 당대의 세계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어떤 면모로 놓여 있어야 하는지 읊조렸다. 전쟁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시는 신과 영웅의 서사를 사람들에게 들려줌으로써 고귀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리고 마땅히 수행해야 할 윤리적 의무와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했다.
이 같은 기능은 단순하게 시를 교훈의 영역으로 얽어매는 인식을 낳았다. 요즘은 그런 시의 기능보다는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 상황과, 이로써 맞닥뜨리게 되는 존재의 굴레를 탐색하는 데 더욱 주력하는 형국을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의 시선을 굴절하고 뒤틀면서 중심과 주변의 공고한 경계를 무너뜨렸다. 목소리는 어떤 상황과 맥락이 뒤따르냐에 따라 다성적(多聲的)이 되거나 초점을 일그러뜨린다는 사실을 20세기 후반 문학예술의 흐름에서 제기되었다. 인간과 세계, 주체와 타자, 중심과 주변 등 굳건한 경계로 갈라졌던 이분법적인 존재 이해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가 야기한 이러한 탈 중심성은 글쓰기의 영역에서 해석의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기존의 문학 독법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물음은 문학 글쓰기의 전통적인 형식이 과연 오늘날에도 합당한 것인지에 관한 의문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고전이나 잘 알려진 작품이 제기한 세계 해석을 다양한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가능성을 안겨다 주었다. 이 점은 그동안 충분히 논의되었다. 이 논의의 타당성 여부는 여기에서 따져 볼 수 없다. 우리는 ‘언어’ 자체가 해석을 조건 짓는 틀이나 기반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매개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후기구조주의나 해체주의의 철학적·사회 구조적 담론이 횡행했던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특히 시에서는 메시지나 정서의 전달이 주축을 이루었던 이전의 서정시나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시와는 색다른 작품이 속출하였다. 문학이 은유나 환유적 메시지의 일종이 아니라 ‘징후’의 일종이라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었다. 문학을 징후의 하나요 그 발현이라고 보았을 때 우리 문학은 작가와 무의식에 대한 열풍이 일던 시기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무의식과 언어의 관계를 정신분석학으로 치밀하게 논증하려 했던 프로이트나 라캉에 대한 재읽기 열풍이 한동안 사그라지지 않았던 정황도 이와 관계가 클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자본주의의 정교한 침투와 변형된 메커니즘은 ‘인간’의 조건이 마냥 탄탄하지만은 않고, 오히려 세계 전체로 번지는 어떤 ‘절멸’의 상태를 예감하기도 했다. 특히 요즘 들어 생태계와 관련해서 기후 위기 담론이 부쩍 늘어난 데서 오늘날의 문학이 어떤 방향과 각도로 창작에 임해야 하는지 일러주는 신호로 들리기도 한다. 기후 위기의 시대라고 해서 문학도 기후 위기의 소재를 다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학의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소재를 가져올 때 자칫 놓치게 되는 중요한 부분이 있어서다. 왜냐하면 문학은 소재를 가져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이긴 하지만, 그 소재와 관련된 메시지가 문학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3.
‘지속’은 상태개념이다. 끊이지 않고 꾸준하게 이어지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이다. 문화와 관련해서는 ‘전통’과 밀접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다른 뜻을 내포한다. 전통은 형식의 일종이요, 지속은 상태의 일종인 셈이다. 이 지속을 문학에 적용하면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 특히 시로 좁혀서 말하면 ‘지속’이 산출하는 시적 방향이나 세계의 얼개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 시에 국한해 보자. 근대문학 초창기 때인 일제강점기에 저 악명 높았던 ‘이식문학론’을 비판했던 주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 조선 후기에 맹아로 발현한 ‘근대성’이었다. 왕조 체제를 떠받쳤던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농업 위주의 경제에서 상공업 종사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자본주의적인 생산 관계가 형성되었다. 문학도 이러한 생산력과 생산 관계와 무관하지 않게 서민의 감정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사설시조와 가사가 널리 창작·생산·소비되면서 정형화된 문학 형식의 틀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변혁에 가까운 사회체제의 변동은 문학 제도와 형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체제가 바뀌고 사람의 인식도 점점 바뀌었다. 자연과 산수山水를 노래하던 시가는 어느덧 현실의 실상과 함께 인간이 누려야 하는 개인적인 권리와 행복, 그리고 체제 비판으로 확장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수용된 서구 문예사조의 범람과, 이를 모방한 작품이 대량으로 창작되면서 ‘문학’의 개념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형성되었다. 문학은 곧 서구문학을 말하게 된 것이다. ‘문학’이란 단어 자체가 서구 번역어였고, 이러한 문학 개념은 창작자(작가)의 사고방식을 틀 지우는 옥쇄가 되었다. 기존 조선의 ‘시가’가 서구문학의 ‘서정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작가 의식은, 서구 지식인들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겪었던 정신적 혼란과 아울러 병폐와 혁명적인 작품세계를 손쉽게 받아들이는 ‘열린 구조’로 돌변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피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의 문인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문학의 세계가 협소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낭만적인’ 작가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낭만성은 서구 지식인들이 계몽주의 이후 지성계를 휩쓸었던 낭만주의와는 결을 달리했다.
서구 지식인들에게 낭만주의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하나였다. 다시 말해,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연을 소박한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식보다 감성을 우위에 둔 채 창작된 수많은 낭만주의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는 예술창작의 형식이 중요했다. 그것은 세계를 마주 보는 인간의 고귀하고 숭고한 실존 의식이기도 했다. 운명이나 전통적인 굴레에도 굴하지 않고 앞서 나아가려는 미학적 인간의 탄생인 셈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지식인에게 낭만주의는 곧잘 현실 외면과 도피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더러 수작이 나오기는 했지만, 당시 조선의 문인들이 유토피아로 설정했던 세계는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꿈의 세계’였다. 이 세계에는 고통이나 절망, 비극이나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를 건너뛴 상황에서 받아들이는 요소가 전면화되었다. <백조> 동인이 추구했던 세계도 바로 이런 세계였다. 이후 <백조> 동인 중 몇몇은 사회주의 문학 계열인 카프(KAPF)를 결성하거나(박영희, 김기진의 경우) 이상화의 경우처럼 민족문학 계열로 나아가거나, 박종화의 경우처럼 역사를 위주로 한 문학창작의 길로 나아갔다. 이들이 사분오열되면서 각자 자신이 선택한 형식으로 창작의 길을 걸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에게 장르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 가지 장르만 고집해서 쓰는 작가는 별로 없었다. 시인은 소설도 썼으며, 소설가는 시도 썼다. 그리고 비평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두고 장르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였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고 논하는 연구자도 있다. 대부분 이 진단에 동의하고 있다.
문학에서 장르 분화는 ‘문학’ 형식의 분화와 함께 작가 의식이 세계와 대면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작가의 어조와 세계관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깊다. ‘한국문학’에서 장르가 분화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1910년대부터였으니, 이제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를 통시적으로 보면 문학의 장르가 세분화되는 과정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바야흐로 근대문학이 그 정신을 오롯이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4.
근대문학의 정신이 드러나는 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근대문학과 글쓰기는 밀접한 상관이 있다. 글쓰기는 개인과 자아의 발견에서 촉발된 문화 양식이다. 글 쓰는 행위는 시간을 분배하고, 노동을 구획 짓고, 범주화된 세계 표면에 균열을 내는 일과 같다. 이 과정에서 자의식이 어떤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알게 된다. 자의식은 구조의 일종이라는 점과, 개인의 의식은 사회적 의식과 마치 상동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프로이트에 와서는 글쓰기가 정신 병리적 징후의 일종일 뿐이라는 논거가 제시되기도 했다. 글쓰기는 징후이며, 동시에 치유라는 점은 오늘날 정신분석학적인 비평의 관점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사실이다.
근대정신의 확립과 확산에 기여했던 근대적 글쓰기가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글쓰기는 인간이 지금까지 만든 모든 문화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복잡한 메커니즘의 지배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정신작용이 문자 체계로 전이되는 공정(과정)을 수반한다. 언어가 곧 의식 혹은 마음이라는 말은 보통의 사람들도 맏아들이고 이해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서구문학이 도입되면서 장르 분화가 이루어졌고, 다양한 갈래의 글쓰기를 행하던 작가들이 어느 정도 자신의 전문 분야 하나에 주로 매진하는 글쓰기의 분화 및 정립 이후, 장르 혼합이나 파괴 혹은 장르 경계의 완화가 이루어지는 오늘날에도 ‘문학적 글쓰기’는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예전처럼 베스트셀러 작가가 꾸준하게 나와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시대와는 다르다. 대중이 아직도 문학에 열광하고 꾸준히 독자로서 한 작가, 혹은 한 장르에 대한 애정을 쏟는 이유는 문학이 그 무엇을 ‘지속’하고 있다는 방증이 된다.
상상력이 창작을 추동하는 힘이 됨은 두말해서 무엇하랴. 이러한 상상력은 작가 개인의 체험에서도 비롯하지만, 현실을 통해 현실 너머를 생각하고 유추하는 사고능력에서도 비롯한다. 하지만 상상력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펼치는 현란한 세계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그 재기발랄함과 엉뚱한 언어 기술은 잠시 관심을 받다가 사라질 운명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한때 ‘미래파’가 득실거렸던 적이 있었다. ‘득실거리다’는 표현으로 이들을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건 아니다. ‘미래파 현상’이 마치 한국 시단의 새로운 길이나 방향처럼 너도나도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에는 상상력만 가득했을 뿐 현실은 지워져 있었다. 이것은 미래파의 창작 방법에서 연유한다기보다는 미래파에 속했던 시인들의 현실 인식에서 세계를 받아들이거나 수용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 인식의 고리가 상당히 약했기 때문에 비롯했다. 미래파 시인의 시 세계를 구체적으로 천착해서 분석을 하지 않은 마당에 쉽사리 일반화할 우려가 없지 않지만, 당시 미래파가 바라본 현실은 피상적이고 주관적이었다. 이들이 전통적인 창작 문법을 깨트리면서 자신들의 시 세계를 추구한 점은 일면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대안을 제시할 해법이 묘연한 가운데서 이들의 창작은 ‘팬’들의 열렬한 환호와 응원을 받으면서 자신만의 ‘상상’과 ‘현실’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더러 난해한 문서 같은 시들이나, 무의식의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듯하면서도 해독이 어려운 난장 같은 작품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미래파란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당시 미래파가 알게 모르게 기획하고 설정했던 시의 방향을 넘어 훨씬 앞서간 시를 쓰는 시인들이 속출했다는 사실만 확인하자.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미래파가 몰락했다거나, 미래파의 기획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래파의 등장과 작품 성향에서 글쓰기 측면에서 지속되는 문학의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문학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이나 ‘내용’의 문제와 밀접하다는 사실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내용이나 본질이 문학에서 중요하다고 해서, 그런 요소가 문학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문학과 관련한 글쓰기의 문제는 ‘문학’ 자체의 형식과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은 결국 현실 세계를 말해야 하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글쓰기는 그런 현실과 존재 혹은 세계를 그리는 수단에만 머물지 않는다. 글 쓰는 행위는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세계를 조망하며,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곱씹는 행위에 포함되는 실천적인 태도다. 따라서 시인뿐만 아니라 작가의 운명은 곧 작가가 쓰는 언어의 운명에 직결되는 것이다.
시인을 그가 쓴 시와 직결하는 일은 수긍하기 힘들지만, 한편으로 시인의 윤리적 패러다임과 시의 미학적 패러다임은 일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시인이 ‘진실되고 정직하게’ 시를 쓴다는 전제로 해서 그렇다. 진실되고 정직하게 시를 쓰는 일은 시인으로서 세계를 향해 던지는 실존적인 물음이자 대응 형식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쓴 시를 보면 시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시와 시인이 별개가 아니다. 시인이 뱉는 말이 시로써 형상화된다. 그리고 시는 시인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말 자체다. 여기에서 ‘지속’의 의미가 도출된다. 지속은 가치의 전승이나 전달을 함의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부정적인 의미도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지속’은 변형이나 탈피, 혹은 혁파에 움찔거릴 수밖에는 없는 말처럼 들린다. 물론 그런 역동적인 인식과 사고의 전환이나 탈경계 의식을 포괄하는 지속이면 더할 나위 없다. 무엇을 지속하느냐가 아니라 지속해야 하는 어떤 것이 있느냐의 문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면서도 아직 우리에게 되비치지 않은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인 셈이다.
글쓰기는 그런 숨겨진 존재의 얼굴을 찾는 행위다. 지금까지 수많은 글이 시인의 손에서, 혹은 다른 장르의 작가 손에서 써졌다. 우리는 ‘고전’에서 글쓰기의 순금을 찾는다. 이 시대의 고전은 무엇인가. 고전은 다시 새롭게 쓰여야 한다. 잘 팔리는 시집이나 인기를 누리는 시인들은 많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우리 시대 새로운 고전으로서 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아마 전통적인 의미의 고전이 오늘날에는 통용되기 힘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전은 당대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에 판명이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섣부른 욕심일 수도 있겠다.
문학의 지속, 혹은 지속하는 문학은 글쓰기의 운명이 무엇인지 거듭 생각하게끔 한다. 단순하게 감동을 주거나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문학의 표면만을 바라보는 인식이다. 글쓰기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우뚝 서기 위한 최선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글쓰기를 앞에 둔 시인(혹은 작가)의 마음은 자연 겸허해질 것이다. 이는 자신의 창작 행위가 가져다주는 의미를 올바로 인식했다는 말이며, 자신의 글쓰기가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것인지 어렴풋이 알았다는 의미이다. 글쓰기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속하는 문학의 운명을 시인은 미리 알아차려야 한다.
(2024)
------------------------------------------
정 훈|1971년 마산 석전동(현 창원시)에서 태어나 창원(현 성산구 성주동)과 의령(유곡면·궁유면)을 거쳐 중2 때부터 줄곧 부산에서 살고 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김지하 미학 연구」로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재학시절부터 연구 및 비평 활동을 시작하면서 차차 외연을 넓혀 신학과 동학에도 몰두하고 있다.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약시와 투시, 그 황홀한 눈의 운명-기형도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 『두 사람이 걸어오는 저녁』, 『사랑의 미메시스』, 『시의 역설과 비평의 진실』과 시집 『새들 반점』을 펴냈다. 동아대, 동의대, 부산교육대, 부산대, 부산외대, 영산대, 한국해양대 등의 대학에서 문학과 교양을 가르쳤다. 현재는 계간 《사이펀》 및 인문무크지 《아크》 편집위원과 계간 《작가와사회》 편집주간, 요산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