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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암 시인-문장으로 만나는 사람들(6월)

작성자사이펀|작성시간11:21|조회수16 목록 댓글 0

정보암 문장으로 만나는 사람들(6월)

 

 

정보암 초대시인이 독자에게 사인을 하고 있다.

 

늦은 귀가 4

 

 

아버지의 빛바랜 일지첩은

첫 장부터 눈동자를 적셨다

 

어릴 적 서울내기 생각난다

내 첫사랑 민수

난생처음 달콤한 아픔을 준 아이

사변 때 총 맞아 죽었단 말도 있고

슈샤인 보이 소문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야음 틈타 들른 집에서

딸의 사랑통 엄마께 들었나 보다

이렇게 다정한 분이

가족을 팽개치고 월북이라니

한때는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연좌제가 목을 죌 때마다

억하심정 풍선처럼 부풀었지만

어쩌겠는가 숙명인 것을

 

전쟁 나던 해

사상 찾아 떠난 아버지는

너덜너덜한 유품 한 권으로

속초에서 이복동생 손 잡고

꿈처럼 시공 건너뛰어

늦은 귀가를 했다

엄마도 동생들도 없이 나만

상처 딱지 겨우 앉은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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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

 

 

내지인 조선인 판이하게

도조 매기고 거기다

소작까지 떼어 버리는데

찍소리 한 번 못하고

까부라질 사람 어디 있겠노

 

흉년 들면 임금님도

세금 줄여 달래 주었다

마당 매기 돌 짐에

물값 비료값 얹다니

작인은 굶어 죽으란 말이냐

 

기가 찬 것은

오히려 소작료 인상 탄원서

농간 부렸던 놈이 마름이라니

벼룩의 간을 빼어 먹어라

이웃사촌도 모르는 거머리들

 

기생충 불태워 없애야지

마름집 사랑채 꼬시르고

시퍼런 삽날끼리 부딪치니

쪼그라진 마름 벌벌 떠는 꼬락서니

지주도 수긍이야 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피눈물 적셔 올린 횃불

한순간 어둠은 밀쳐 내었어도

영원한 빛 되기에는 부족한 모양

송진 가지는 근원적 한계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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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

나도 상급학교 진학하면서

이웃 볼 수 있었고 세상 알았다

 

금융조합 막내에게

농민들은 묻기조차 어려워한다

글자 모르는 죄인이라

납부금 이자 영문도 모른 채

억지 춘향이로 내거나

어린 내게 하소연하거나

 

한 줄기 빛 브나로드

민중 속으로 상록수처럼

농사도 배워야 잘 짓는다

산업도 알아야 잘 만든다

뭣이라도 알아야 발전이 있다

 

우리는 쉬운 한글 있으니

김해에 한글 선생님 많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가능성 충분하다

매달 급료 받아 기생 치마폭 꽂지 말고

내 고장 들판에 브나로드 희망 꽂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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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

 

 

유학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제일 먼저 야학을 세웠다

글자를 가르치고 창가도 불렀다

 

주재소 훼방에 일 년을 못 넘기고

부산으로 임시 피신했다는데

아버지는 희한하게도 창가 선생과

거기에서 딴살림을 내었단다

내가 태어나기 두어 달 전쯤이다

 

사실 아버지는 야학보다

나의 탄생 먼저 시작한 셈이지만

그 시절 조선에 자식은 후순위

부모 강권에 혼인한 아내

이혼 말 오가다 사단이 난 것이다

 

영웅호색이란 말 무색하게

어려운 시절 여자 들인 것도 별났지만

부산 부둣가 노동자들 함께 책 읽고

평등한 세상, 인민들의 낙원 혁명

수상한 말들을 한다는 소문 돌았다

 

나중에는 특무과 순사에게 걸려

부산형무소 물고문 전기고문

몰골이 완전 망가졌다는 소식 들렸고

삼 년형 감옥살이 받았다는 재판 통지서

 

떠듬떠듬 설명해 주는 고모 말에

어머니는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었단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바깥양반

무슨 일로 받은 벌인지 상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서방님 걱정 앞섰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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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가슴

 

 

요시찰 인물 쫓기듯 떠나면서

백 선생 동행했다

무턱대고 따라붙는 황소고집

뿌리칠 수 없었다

애초에 창가 선생 야학 동참

나를 향한 연정 앞섰으니까

 

읍내 사람들 수군거림

뒷덜미를 타고 오른다

어머니의 어이없다는 표정

무뚝뚝한 내자의 강짜 철벽같았지만

백 선생님 매몰차게 보낼 수 없었다

 

이혼 요구에도 묵묵부답 집사람

억지 혼약 부모님 못마땅했지만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 무거운 짐 잊기 위해

나는 부산에서 독서동지회 도맡았다

상부의 지침, 발간지 함께 읽으며

동지들의 노고와 불만 꿈

함께 나누고 펼치느라 하루가 짧았다

 

와중에 스치는 풍문

진영 어머니, 동생, 아내

불온사상범 정기영의 거처 대라고

주재소 사흘 멀다며 불려 가

오뉴월 개 맞듯 몽둥이질 당하고

만신창이 돼 쓰러졌단 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게 했다

 

영토 확장에 혈안 되어

부딪치는 나라마다 전쟁 일으키는

일선동조 야마토 무리들

오르막 있으면 내리막 있다던데

언제쯤이 그날일지 가슴 팍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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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암경남 산청 출생으로 1997창조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창조문학 대상(2014)을 수상했다. 시집 오늘은 어제의 내일, 시향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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