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0. 토요일. 비. 평년기온. 시원하다.
일을 하는 사람. 일을 안 하는 사람. 일을 많이 하는 사람. 일을 적게 하는 사람. 일을 꼼꼼히 하는 사람. 일을 설렁설렁하는 사람. 사람은 다양한 성격과 다양한 능력과 다양한 생활의 의욕을 보인다. 성격이 다른 이유는 타고난 것이 가장 클 것이지만, 대부분은 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부유한 집이라면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고, 서둘러 할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당장 먹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면, 무엇이든 가리지않고 나설 것이다. 성격탓이라고 하지만, 가진것의 차이는 많은 것을 갈라놓기도 한다. 무시하는 태도, 무시를 당하는 처지. 고압적인 태도에 굴욕적인 포기. 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모두 양날의 칼과 같다. 잠깐 생각을 바꾸면 천사가 되고, 악마가 되는 순간순간이 전쟁과 같을 수도 있다. 그 짧은 순간에 각자가 처한 상황정리를 하며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은 고달프다. 잠시 내 일이 많아졌다면 누군가는 내가 한 만큼의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내가 일을 하지않고 쉬는 시간이 있었다면 누군가는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만큼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지 모른다. 보통의 가족에서 일어나는 흔한 사례를 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딸 하나씩 2명. 한 가족 4명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가 할 일을 안 하고 놀면, 아버지가 감당해야 할 일을 나머지 3명이서 나눠 짊어져야 한다. 거기에 자식중 아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다면 어머니와 딸이 네 사람 몫을 감당해야 한다. 비교단위를 좁혀서 가족단위로 설명을 하면 쉽고 이해가 빠르다. 넓게 국가 단위로 생각하면 대상이 많아지는 만큼 희석이 되고 만다. 물 한컵에 잉크방울 한 방울을 넣은다면 컵안은 온통 잉크색으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단위를 넓혀서 한강에 잉크방울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고 해서 변함이 있을까. 전혀 반응이 없을 것이다. 비교대상이 커지면 커질수록 양도 비례하여 반응하기 마련이다. 슬픔은 희석되는 경우가 많다. 가족중에 한 사람이 죽었다 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슬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사회에서 노숙자 한 사람이 죽었다 한들, 무슨 슬픔을 보일수 있을까. 정서적인 것도, 노동의 양도 측정하는 대상의 크기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일을 많이 했으면 내일은 쉬어도 될까. 오늘 놀았으면 내일은 죽어라 일을 해야만 할까. 일도 사랑도 행복지수도 모두가 공평할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크기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것도 있고, 크기에 반비례하는 것도 있다. 재산이 많아서 부유한 사람은 나태한 경우가 많다. 얻을것을 이미 얻었으니 위험을 감수하며 더 취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 얻어 낼 필요가 없으니, 모든것이 자유롭고 느긋하고 느릿할 수 밖에 없다. 몸에 베여 가면서 성격도 만들어 지는 것이다. 어느 마을에 함께 나누라고 천만원을 기부하고 갔다고 하면, 우선 마을사람 모두가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고마움은 언제 느낄까. 각자 몫으로 돌아 온, 10만원이라도 받아야 실감을 하게된다. 하지만 그 10만원을 전체가 아닌 나 혼자만 지목해서 직접 받았다면 같은 돈이라 할 지라도, 온전히 나를 위한 관심받기로 기쁨은 배가 될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나누면 희석이 된다. 세상의 모든 위기와 고통에 대한 측정치는 나누면 나눌수록 긴장이 풀어진다. 사바나초원에 한 무리의 사슴종류인 임팔라떼가 풀을 뜯고있다. 다 같이 모여있으면 긴장과 공포를 나눔으로 인하여,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걸 이용하는 포식자들이 한발 앞서 있는듯 하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하지만, 위험은 나눌수록 더 위험해 질수 있다. 생계가 급한 사람은 생명의 위험도 감수하며 작업장으로 뛰어나가 필요한 것을 취해야 한다. 재산과 생명의 위험을 바꾸는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앞에 다가오는 것은 맨 먼저 유흥이 찾아오고, 방탕함과 오만함이 찾아 와 병들게 한다. 이를 감지하고 자신을 바로 잡아 줄 능력은 누가 키워 줄수 있을까. 하나를 주면 하나를 뺏어가는 신의 영역이 아닐까. 위험을 감수하면서 뛰어다니다 보면 체력이 키워져 오히려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것을 손쉽게 얻어서 편안하게 누리고 사는 것이 대부분의 소망이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왜 일까. 점점 더 생활이 좋아지기 때문에 더 즐기고 더 누리고 살고 싶은 것이다. 개똥밭에 살더라도 이승이 낫다고 하는 속담이 있다. 저승에서 살다 바로 이승으로 왔다는 사람이 없다.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사람이 없으니, 온갖 경우의 수가 혼돈의 세상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없으니 무서운 가시밭길의 세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승에서 잘 살았으면 저승에서는 잘 살까? 저승에서 못된일을 하고 다시 태어난 사람은 현실에서 잘 사는 사람일까. 아무도 모른다. 어느 한쪽이 무거우면 어느 한쪽은 가벼워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이 시소의 법칙일 것이다. 두 대상의 무게가 딱 맞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엔 한쪽이 무거우면 한쪽은 가벼워서 무거운쪽으로 기울게 되어있다. 그것이 보통의 질서다. 물은 흐르다 낮은곳에 이르면 채우고 떠난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구해주고 싶고, 어딘가 불편하면 도와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느 한곳이 모자라면 채워주는 것이 세상의 시소게임의 원리다. 내가 일을 좀 잘 하면 나 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내가 더 많이 얻었다면,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것을 내가 더 가진것일 수도 있다. 잘못하면 공산주의 사상이 될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혼자 잘 사는거 보다는 같이 잘 사는 것이 훨씬 더 행복지수가 높음을 알아야 한다. 한 마을에서 한집만 잘 살고, 모두 거지같은 행색을 하고 산다면, 가진자는 행복에 겨워 할 것이다. 어쪄면 지배자의 행복일 것이다. 그건 혼자만의 한 사람만의 행복일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고통스럽게 살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두집, 세집, 열집..같이 잘 사는 사람이 늘어간다면 함께 모여서 함께 놀고 함께 즐기면 행복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을까. 내 일이 힘들다고 절망적인 생각을 하지 말 것이고, 내가 힘들다고 모두를 원망해서도 안 된다. 내가 힘든만큼 누군가는 나로 인해 즐거울수 있으려니, 힘든일을 할 수록 기분좋은 행복의 기부자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