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장군

작성자방장|작성시간11.02.17|조회수684 목록 댓글 3

이글은 중국인터넷에 무정장군에 대한 내용이 있길래

번역한 것입니다.

일전에 서프 국제방에 올렸는데 몇일뒤 삭제되었습니다.

무정장군의 생몰과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알수 있는 자료여서

다시 올립니다.(특히 무정장군의 최후는 우리가 배운것과는 약간 다르더군요)

 

 

인민해방군 포병 창시자 : 조선 명장 武亭(무정)장군

 

武亭은 일찍이 김일성과 함께 전기적인 군사영웅이었고 유명한 반일유격대 지도자였으며, 중국공산당 홍군내의 조선인 지도자였다. 武亭은 중국 공산당 군대의 포병과 조선의용군을 지도했다. 그는 중국과 조선에서 전기적인 군사업적을 창조했다. 武亭은 줄곧 신비한 인물이었고 그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역사학자는 매우 드물다. 武亭과 그의 조선의용군은 일찍이 대단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북조선의 정치무대에 등장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마치 밤하늘의 유성처럼.

 

武亭은 일찍이 1946년에 북조선공산당의 2인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지위는 매우 빨리 무너졌다. 새로 수립된 국가에서 그는 단지 순수 군사적 자리에만 임명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군사 지위도 1950년 조선전쟁으로 불명예스럽게 끝났다. 비록 그가 사망한지 이미 50여년이 지났지만, 그에 관해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매우 적다. 중국 연변출판사는 1994년에 武亭장군전을 출판했다. 그러나 발행부수가 매우 적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조선은 최고영도자를 제외하고는 기타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선전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은 그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역시 모든 평가를 보류했다.

 

武亭은 1905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 그의 본명은 金武亭이다. 武亭은 서울에서 줄곧 주경야독으로 학업과 생활을 유지했다. 14세때(1919) 그는 유명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혁명생애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당시 조선 최고 명문인 중앙고보에 합격하였는데, 가정형편을 고려하면 매우 쉽지 않는 것이었다. 武亭은 여기서 서울 고려공산당 조직의 지도자인 여운형(吕运,1885-1947)을 만났고, 그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3(18)에 武亭은 혁명활동을 위해 학교를 그만뒀다. 그 해3월 조국 광복의 길을 찾기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 만주를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당시 그는 아마도 이 오래된 나라에서 장장 20여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武亭은 먼저 문화대학에 입학하여 중국어를 배웠다. 1924년 북방군관학교(일명 동북강무당)에 입학하여 포병교육을 전문으로 배웠다. 武亭은 아직 군사학교 학생신분으로 중국 북방군벌들간의 남구(南口)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곧이은 천진공격전에서 공을 세웠다. 졸업후 포병대위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뛰어난 군사재능으로 겨우22세때 포병 중좌로 승진했다. 1925 20세때 武亭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는데,당시 중국공산당은 당원이 채 1,000명도 안되는 소규모였다. 그 후 武亭은 군벌부대의 직위를 버리고 제1차 국내혁명 및 북벌전쟁에 참전했다. 1927년 장개석은 공산당을 진압하고 그를 포함한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武亭은 어쩔수 없이 지하로 잠입하여 지하 비밀활동을 하였다. 武亭은 한구()로 이동하여 계속 활동하였으며, 얼마후 무창(武昌)에서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았다. 다행히 무창 법원의 공산주의 법관의 도움으로 중국 공산당 본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할 수 있었다.

 

상해에서 武亭은 다시 공산당의 정치공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그는 조직원으로서 상해노동자 폭동을 참가했다. 武亭은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그의 군사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총지휘자로 선출되었다. 폭동이 진압되면서 그는 영국군대에 체포되었으나, 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석방후 武亭은 잠시 홍콩으로 갔다가, 그 후 다시 중국내륙으로 잠입하여 제2차 국내혁명(토지혁명)에 참가하였다. 武亭은 처음에 팽덕회 장군(중화인민공화국 건국후 원수 추대)의 휘하에 있었는데, 武亭은 이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팽덕회의 자서전>에 의하면 악주를 점령한 후 영, , 일 수병들이 여전히 황석항(石港)에서 창궐하고 있었으며 성안에 포격을 가했다. 우리는 은밀하게 포대를 설치하고 (당시 단지 나와 조선의 동지 武亭만이 포를 다룰 수 있었다) 적의 접근을 기다리다가 몇 십발 포사격을 가했다. 대략 10여발이 적 군함에 명중했고, 그 후로 감히 적들은 성안으로 포사격을 하지 못했다이 전투가 武亭이 중국홍군에서 가장 일찍 세운 전공이다. 서술은 간단하지만 분명히 전과는 찬란한 것이다.

 

홍군3군단은 1930년 7 31 호남성 평강(平江)에서 군단 포병 중대를 창설했다. 당시 활동했던 노병은 武亭이 그 해 겨울 소련에서 포병기술을 배우고 귀국했다고 회상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역사적 증거는 없다). 武亭은 처음에 포병교관 업무를 한 후 포병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 5, 홍군중앙위 포병단이 강서성 피두()에서 창설되었는데 武亭은 그해 6 2대 포병단장에 임명되었다. 홍군시기에 武亭은 혁혁한 전공으로 매우 빠르게 승진했다. 나중에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에 진입했다. 정치적 배경이 전혀없는 외국인에게 이것은 확실히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1930 12월부터 1934 10월까지 장개석은 홍군에 대해 5차례 포위공격을 했다. 5차 포위공격때 중국공산당 소비에트지구는 대부분 장개석 군대에 점령당했다. 중국공산당은 강서성 서금(瑞金) 부근의 안전지대를 찾기 위해 근거지의 이전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25천리 대장정으로 1934 10 14 시작하여 1935년 12월 12 연안(延安)에 도착한 대행군이었다. 武亭은 중앙군사위 직속 포병부대 지휘관으로 공격뿐만 아니라 고립시에는 광범위한 화력지원업무를 담당한 전형적인 별동대였다. 확실히 武亭은 팽덕회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다

 

대장정은 하루도 쉬지않고 계속해서 장개석 군대와 500여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거친 기아와 고난의 행군이었다. 당시 대장정이 막 시작했을 때 홍군부대에는 36명의 조선국적 혁명가가 있었다. 그러나, 연안에 도착했을 때는 武亭과 양림() 2명만 살아남았다. 더구나 양림은 얼마후 전투중에 희생되었다. 따라서 武亭은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武亭은 일찍이 절친한 친구 양림에 대해 회상했다. “대장정이 끝난 후 우리는 19362월에 황하를 도하했다. 그때 양림과 나는 유일한 조선인 군관이었다. 양림은 황하도강의 돌격부대장으로 선발되었는데 이것은 죽음을 무릅쓴 위험한 임무였다. 돌격부대는 돌진하여 강을 건넌후 상륙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양림은 총상을 입고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장렬히 전사했다.

  

  역설적으로 양림의 영웅적인 희생은 武亭의 생명을 구했다. 武亭은 회고했다 양림 희생후 팽덕회는 당회의에서 많은 외국인 혁명가들이 중국 혁명 사업을 위해 희생됐다. 만약 우리가 계속 그들을 중국에서 죽게 한다면 누가 남아 그들 조국의 혁명사업을 위하여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쓰러져간 동지를 위해 무엇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외국 동지들의 생명을 다시 낭비해서는 안된다. 팽덕회의 호소로 군사위에서 휴식 명령을 내렸고, 나에게 교육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武亭은 위장병이 악화되어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팽덕회가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가 되었다.

 

1936년 武亭은 홍군대학에서 전략 및 당역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홍군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군관학교에서 수업도 받았다. 홍군대학 졸업후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말 팔로군 포병부대 재건 임무를 부여받은 후 그는 팔로군 총사령부 포병처 주임으로서 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1938년초 팔로군 총사령부 포병단장에 임명되었다. 홍군에서 武亭은 포병의 최고 권위자였다. 

 

武亭은 재차 과로로 건강을 해쳐 사령부에서 다시 휴식 명령을 받았다. 건강 회복 후 그는 새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대일작전을 위해 연안에 온 조선청년들을 모집시키는 업무였으며,조선의용군의 창설 업무에 착수했다. 즉 토지혁명시기에 참여했던 10여명의 조선 혁명가들을 골간으로 하여 연안의 조선청년,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조선청년, 또는 동북에서 활동했거나 모스크바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을 모집한한 후 철저한 훈련을 시켰다. 1939년 팔로군 전방사령부(산서성 )에 도착하여 팔로군과 함께 항일 전투에 참가했다. 1941년1월10 조선독립연맹의 전신인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설립되었고 武亭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동년 6월에 중경()의 조선의용군부대(광복군) 대원들이 잇달아 화북 항일근거지로 탈출하였으며, 武亭은 그들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편성하여 팔로군과 함께 작전에 참가했다. 8월 산서성 동욕() 팔로군 총사령부에 항일무장투쟁의 군사간부의 교육양성을 위한 조선의용군 간부 훈련반이 설립되었고 武亭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10 26일 개최된 동방 각 민족 反파시스 대회에서 武亭의 초상화는 외국항일지도자로서 모택동과 함께 걸렸다.

  

  이와 같이 武亭은 이미 외부적으로 조선반일역량의 지도자였으면서도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에서 그의 지위는 변함없이 팔로군 장령이었다. 중국공산당은 武亭에게 조선의용군의 조직 창설을 맡겼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 광범위한 국제항일통일전선의 모범으로 여겨 국민당휘하의 보다 많은 조선인을 끌어오는 것을 보증할 수 있었다. 동시에,일본군대내의 조선인 사병들을 대상으로 선전을 하여 역시 동일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武亭의 전기적 이미지는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져서 원래 국민당 통제하에 있던 조선의용군(광복군) 89% 대원들이 낙양()、중경() 등지에서 산서성의 태행산(太行山)으로 대거 귀순해 왔다. 그들은 화북지대 각 분대로 재편성된 후 하북성, 산서성 태행산 등지에 전진 배치되어 적후에서 일본군에 대한 유격전과 와해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항일유격지 기층 당조직 건설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武亭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의 명망은 계속 높아져서, 조선의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김두봉(金枓奉)도 중경에서 태행산으로 왔으며, 멀리 조선 국내의 여운형도 연락원 김명시(武亭의 연인)를 서울에서 연안으로 파견하여 武亭과 건국과 관련하여 연합방안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사실,武亭의 명성은 크레물린까지 알려졌다. 1941 7월 스탈린은 연안에 항공기를 보내 武亭을 소련으로 데려 갈려고 했다. 명의상은 武亭의 비범한 포병기술을 인정하여 그가 소련 전선의 포병부대를 지휘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안전을 이유로 소련으로 파견을 거절했다. 비록 소련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스탈린의 항공기 지원 사건으로 武亭은 국내외에서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1942711,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창립되었다. 동맹중앙집행위원 및 의용군사령관으로서 武亭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의용군 창설방면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는 포병단장직을 사임하고 언젠가 그들을 이끌고 자기 조국의 광복을 이루는 그날을 믿으며 간부 양성하는데 전념했다. 당시 의용군 출신중 소수의 조선인만 조선독립의 희망이 있다고 보았으며, 대다수는 조선이 오랫동안 피점령 상태에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武亭은 낙관적이어서 머지않아 조선이 독립할 것이란 믿음을 견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武亭은 1937년부터 부대 관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독립후 조선이 모든 애국정파의 연합정권의 국가로 건국되기를 희망했다. 이것은 분명히 당시 중국공산당의 연합정부 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연안의 조선공산당내 좌파인 최창익(崔昌益) 등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독립동맹의 정치지도권을 좌파에서 장악하고 있었다.(武亭은 군사부문 지도). 동맹은 武亭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확실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19448월,일본제국주의의 몰락은 이미 명확해졌다. 武亭은 이때 소련이 조선을 통제할 것으로 예상하며, 황하에서 희생된 양림이 더욱 애석해 했다. 양림은 러시아어에 유창하고 의지가 강하며 정치지략이 뛰어났다. 武亭은 소련인과의 관계를 양림이 충분히 처리할 것으로 믿었다.

 

194512월 추운 겨울날,낡은 증기기관차에 70여명의 승객이 평양기차역에 도착했다. 승객중에 武亭、최창익、한빈() 및 기타 연안의 조선독립연맹 간부들이 있었다. 환영 고적대도, 환영깃발도 없었고, 귀국하는 혁명가를 환영하는 군중도 없었다. 단지 몇 명의 영접인원이 기차에 올라와 그들과 악수했다. 인사말도 없이 그들을 역에 대기하고 있던 차량으로 옮겨타게 했다. 소련군 또한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조선입국을 저지하기까지 했다. 소련은 그들이 군인이나 정당의 신분이 아닌  비무장”,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을 허용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주력부대가 중국이 내전에 돌입하면서 중국에 부득이 잔류하게 된 것이다.

 

1945811,팔로군 총사령관 주덕(朱德)은 武亭, 박효삼(朴孝三), 박일우(朴一禹)로 하여금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신속히 북상하여 소련군의 조선 해방에 협력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일본이 3일만에 항복함으로써 조선의용군은 자기 조국을 해방하는 영광의 기회를 놓치게 했다. 일본의 항복선언 2일후 武亭은 100여명이 장병들을 이끌고 태행산(조선의용군 주둔지)에서 연안에 도착한 후 귀국 준비를 하였다. 武亭과 기타 간부들이 귀국준비를 하였으나 시간이 매우 촉박하여 기본적으로 어떤 세부적인 귀국 계획도 없었다. 단지 어느 지점에 집결한 후 산해관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간단한 계획만이 있었다. 모두가 긴장했고 그들 대부분은 처음 귀국하는 것이었으며 연장자들도 20여년 이상의 세월을 외국에서 기다린 사람들이었다.

 

 300명의 선봉대가 9 5일 연안을 출발했고, 이어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뒤따랐다. 동북에 도착했을 때 이미 3,000여명으로 증가하였으며 모두 적후 근거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단지 2대 마차 분량의 보급품을 가지고 있었고, 武亭과 김두봉 및 기타 소수인원만 말을 타고 대부분은 걸어서 긴 행군을 했다. 60여일의 힘든 행군후 부대는 심양에 도착했다. 이때가 이미 1945 11월초였다. 간부들은 병영에 숙소를 정했고, 기타 인원들은 민가에 분산되어 휴식을 취했다. 117일,의용군은 조선인학교에서 의용군 군인대회를 개최했다. 武亭은 소련과의 교섭결과를 대원들에게 통보했다. “즉 소수 간부만 귀국허용, 잔여인원은 중국공산당 동북국 지시에 의거하여 7개 지대로 편성(실제 4개지대 편성)하여 한편으론 중국혁명에 참여하고 다른 한편으론 귀국 기회를 기다린다.” 1지대가 남만()에서 신속하게 창설되었다. 지휘관은 김웅(金雄), 방호산(方虎山), 최인(崔仁);제3지대는 북만()에 창설되었고 지휘관은 상조(李相朝), 주덕해(朱德海);제5지대는 연변()에 창설되었고 지휘관은 이익성(李益星), 박일우(朴一禹), 7지대는 길림(吉林)에 창설되었고 지휘관에 박훈일(), 최명(崔明)였다. 후에 이 부대들은 대부분 개인 신분 또는 소규모 부대로 속속 조선으로 귀국했다.

 

  11 20일 귀국길에 오른 간부단은 중조 변경도시 단동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입국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 후 평양 소련군은 비무장, 개인자격으로 입국을 허용하는 통지를 武亭에게 보냈다. 武亭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0일후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고, 소련군은 열차 한대를 그들에게 배차하여 평양으로 후송해줬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평양역에서 차량으로 태평양여관에 잠시 여장을 풀었다. 이때 조선독립동맹 지도자들은 매우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 그들은 평양의 정치분위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미래 계획이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은 자기의 국가에서 군대를 보유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은 잠깐 머무르는 손님 같은 신세였으며 소련군의 안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 인사들은 계속 직책을 부여받고 여관을 떠났다. , 대다수는 여전히 그들의 알 수 없는 운명을 기다리며 여관에서 대기상태였다. 하루는 김일성과 소련 대좌가 여관에 도착하여 최창익 등과 회담하였다. 김일성은 그들에게 미군이 남조선을 점령했고 철수할 계획이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안배할 것인지에 대해 회담했다. 1946 1월에야 귀국자중 마지막 인사가 직책을 부여받고 여관을 떠났다.

 

 武亭은 조선인민의 영웅이었으나 소련군은 武亭을 싫어했고 그와 조선의용군에 대해 매우 냉담했다. 그 이유는 소련군이 武亭에 대해 잘 모르는데 오히려 높은 명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군인보다는 문인이 조선의 지도자가 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설령 군인이어야 한다면 차라리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김일성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武亭이 귀국하기전 19451028,북조선5도 행정국이 설립되어 선거가 있었는데 武亭은 서열2(행정국 부위원장, 위원장은 민족주의자 植)로 선출되었다. 武亭은 1946 4월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19464월 선거에서 武亭은 지도층에서 배제되었고, 武亭과 동시에 귀국한 저명한 학자 김두봉이 서열1위 지도자로 선출되었고, 김일성이 서열 2위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武亭은 인민보안간부학교 포병교무장을 맡았다. 1948년,그는 제2대 인민보안간부학교의 학교장으로 임명되었다. (注:인민보안간부학교는 조선군 간부양성학교뿐만 아니라 당시 미공개 조선인민군 사령부로 武亭의 교무장 직책은 사실상 인민군의 포병사령관임)

 

  武亭은 정치투쟁능력이 매우 부족하였으며 권력투쟁에 별로 뛰어나지 못했다. 武亭은 매우 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연안시절에 여러 번 독립동맹의 지도자들과 의견충돌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대다수 독립동맹 간부들과 화합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마지막에는 중국 공산당이 내분을 피하기 위해 武亭을 부득이하게 군사부문만 책임지게 했고 독립동맹의 정치지도권은 비교적 화합적인 인사인 김두봉에게 맡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후 수상 김일성 및 부수상 박헌영()이 모두 자기 정치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세력이 없는 武亭은 실의에 빠졌다. 1946년 제1차 간부회의 석상에서 武亭은 결국 오랫동안 억눌렀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는 자기 옷소매를 찢어 놀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총상 흔적을 보여줬다. “이 총상흔적을 봐라. 이것들 모두 조선을 위해 지불한 댓가다. 왜 너희들은 오로지 한사람(김일성 지칭)만 찬양하나?” 너무도 분명히 이런 감정의 분출은 그의 정치 생애에 매우 유해한 것이었다.

 

 19482월,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고 武亭은 정식으로 중장계급으로 포병사령관에 취임했다. 같은해 99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武亭은 민족보위성 副相 겸 인민군 포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조선전쟁 발발 후,1950710,계획집행이 순조롭게 되지 않아 그는 김광협을 대신하여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다. 평양은 중국홍군 출신 용장이 국면을 전환시키기를 희망했다. 武亭은 한편으로 국지포위 및 우회 퇴로 차단 등의 전술을 동원하여 소백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8군단을 격퇴했다. 다른 한편으로 7월말 전후로 김천-상주-예천-안동-영덕방향으로 전진하여 낙동강 도하를 준비했다. 당시 한미군은 부산방어선을 구축한 후였으며, 일성 원수는 미국본토에서 증원되는 부대가 막 부산에 도착한 상황을 보고받고 충주남쪽 수안보 최전선사령부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을 하달했다. :  조선해방 5주기인 8 15일 이전에 반드시 부산을 점령한다. 적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말고 낙동강을 도하하여 부산을 점령하라

 

  미군과 근 1개월의 전투를 통해서 武亭은 미군과 인민군과의 실력차가 매우 크다는 것을 깨닫고,  “8월공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사실 배수의 진을 치고 임함), 武亭을 인민군 동부전선 사령관에 임명하여 6(1,5,8,12,13,15) 사단을 지휘하게 하고 8월 공세의 주공 임무를 부여했다. 즉 김천 북쪽에서 영덕 방향으로 전진하여 대구, 영천, 포항을 점령하는 계획이다.

 

이에 따라 武亭은 766유격단에 울진방향에서 출발하여 안강리 다리를 파괴하도록 특별명령을 내렸다. 전투는 85일부터 24일까지 계속되었다. 인민군이 영덕, 군위를 해방하고, 왜관을 일시 점령하고 인민군의 포탄이 대구시내에까지 도달했다. 12사단은 가장 잘 싸웠는데 한국군 3사단 1만여명을 포항에서 포위하였다. 그러나 해상봉쇄를 할 수 없어서 한국군이 해상으로 의기양양하게 철수하는 것을 눈뜨고 볼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일정부분 승리했지만, 산악지대 작전과 연합군의 공습으로 후방작전이 크게 방해받았다. 동부전선의 인민군 부대는 8 12일 이후 쌀 한 톨 보급이 없었으며 산악지대에서 자체 조달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816일 이후 전투 능력이 없었으며, 어떤 경우는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부득이 무리한 작전을 감행하였다. 武亭은 766유격단에 유일한 희망을 걸고 유격 작전으로 청도 터널을 파괴하고 연합군의 후방도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766유격단장은 분산침투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고 또한 남한 경계방을 뚫을 수도 없기 때문에 반드시 정규작전으로 돌파전을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뛰어난 유격전 부대는 안강리 지구에서 정규작전으로 심한 타격을 입었으며 분노한 武亭은 유격단을 해체하여 12사단에 편입했다.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 및 병력의 계속적인 반격으로 힘에 부친 인민군은 낙동간 외곽으로 물러났다. 8월 공세 실패후,인민군은 사기가 저하된 상황에서 다시 전진을 위해 9월 공세를 준비했다. 객관적으로 전쟁형세는 역전되었다. 인민군은 이미 전면적 공세를 취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으며,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사실 도박에서 올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였으며, 이번에도 武亭은 주공을 맡았다.

 

  92일 밤,武亭은 대규모 야간공격을 지휘했으며 전쟁은 매우 순조롭게 개시되었다. 특히 12사단은 한국 수도사단 및 5사단을 연이어 격퇴하고 연합군 동부전선에 약 12KM의 돌파구를 뚫었다. 95일에 이르러 미군1기병사단 및 한국군 3사단의 양방향 공격을 격퇴시키고 포항 동쪽을 점령하였으며 8일에는 영천을 점령하였다. 8군 및 한국군사령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 인민군은 오히려 격퇴당했으며 모든 압력이 동부전선으로 집중되어, 武亭도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그가 사방팔방으로 진력을 다해 반격을 가하려고 할 때쯤인 9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로 남쪽에 있는 인민군은 완전히 포위되게 되었다.

 

인민군은 부득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대대적인 철수 명령을 받자 유격전술에 익숙한 武亭은 각사단의 퇴로를 안배한 후 모든 무선통신망을 단절시켰다. 결과적으로 미군뿐만 아니라 평양도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武亭은 큰 타격없이 안동의 사령부에서 원주를 거쳐 삼팔선 이북의 김화로 철수했다,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13사단을 제외하고 武亭 휘하의 나머지 사단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북쪽으로 철수했으며, 간부 역량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평양을 매우 분노하게끔 했다. 왜냐하면 평양은 오랜시간 동안 그들의 행방을 몰랐고, 소련 군사고문은 공개적으로 이를 개인주의경향으로 비판했다. 계속해서 武亭은 평양방어를 명령받았으나 만명 미만의 2개 예비사단밖에 없었다. 그는 전멸 또는 포로가 되고 싶지 않아 인민정부가 북쪽으로 철수한 후 가벼운 저항만하고 부대를 인솔하여 철수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정확했다. 왜냐하면 연합군이 이미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수가 제때에 이루어져서 단지 1개 연대의 손실만 입었다. 그러나 쉽게 수도를 포기한 행위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여기에 武亭은 간부를 임명할 때 정당한 행정절차를 거치지 않는 것까지 더해졌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비군단인 7군단장으로 전보 조치되었다. 군인으로서 명예실추였다. 19501221-23일의 조선노동당 제2 3중전회석상에서 그는 전쟁중 엄중 과오처분을 받았다. 武亭의 성격상 그는 분하고 답답함을 억제할 수 없었으며, 정치상으로 그리고 전장에서의 이중의 실패는 훗날의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다.

 

 당시 7군단이 만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하루는 武亭이 부상당한 군관을 데리고 야전병원에 왔는데 그 군관은 팔로군 시절의 부하였다. 武亭은 매우 바쁜 군의관에게 그의 부하를 보살필 것을 요구했다. 매우 불행한 군의관은 그 자리에서 武亭에게 반박했다. : 부상병이 너무 많다. 반드시 순서를 기다려라. 오만한 태도에 격분한 武亭은 권총을 꺼내 군의관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이 죄행은 엄중해서 그는 즉시 지휘권 및 계급을 박탈당했다. 얼마후 그는 대장정 시절의 위장병이 갑자기 도졌고 중국인민지원군 팽덕회 사령관은 즉시 그를 만주의 가장 좋은 병원으로 후송했다. 그러나 회생할 가망이 없었다. 武亭의 최후 소망은 그의 고국 조선에서 죽는 것이었다. 따라서 1952 10월 그는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며 얼마후 군인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후 조선 정부는 성대하게 그의 장례를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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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론직필 | 작성시간 11.02.17 그가 유능한 군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절차]를 무시하는 독단적, 독재적 발상을 가진 자로서
    절차를 중시하는 행정권력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그저 게릴라식의 무법적 전투방법만 이해했던 사람인듯....ㅉㅉ
  • 작성자知天命 | 작성시간 11.02.18 [핵심단어]:절차 !
  • 작성자知天命 | 작성시간 11.02.18 節次(절차):
    ★節-마디 절/단계:대나무의 마디를 생각하고 막솟아난 죽순을 보세요.
    아무리 작은 죽순이라할지라도 이미 그 속에는 작고 많은 마디가 촘촘히 형성되어있지요.
    ★次:버금 차 /차례 다음:시작부터 마무리까지는 " 다음"이라는 단계가 꼭 있지요.

    죽순 속의 마디하나라도 이상이 생기면 그 죽순은 완전한 대나무로 성장하지 못하지요~
    매번 과정 단계의 연속은 완성을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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