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 : 1. 소년 영웅호걸

작성자방장|작성시간11.04.21|조회수2,171 목록 댓글 3

중국 인터넷에 북한 최현장군에 대해 소개한

전기 내용이 있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한번에 다 번역하지 못하고

10 차례 나눠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최현장군에 관한 전기는 중국작가 해경청(海镜清)이

<전쟁의 예술>이란 중국 군사관련 사이트에 연재한 글입니다.

 

 

1. 소년 영웅호걸

 

최현()의 본명은 최득권(崔得)이며 그의 부친은 최화심(崔化心)으로 조선의 유명한 의병장인 홍범도 장군의 부장이다. 그의 부친의 원적은 함경북도 혜산군으로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간도시이다. 일본군대의 진압으로 각지의 의병은 연속 패배했기 때문에 의병 잔여세력은 소련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1907 6 8최현은 중국동북 연길지구 훈춘현에서 출생했다. 1907년은 조선민족에 있어서 비통의 한 해였다. 이조 국왕 고종은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비밀리에 이준(李俊 1859—1907,함경북도 북청군 출신)을 파견했다. 이준은 조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일본의 위협하에 퇴위하고 조선군대의 해산을 선포했으며, 조선과 일본은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차관정치를 강행했다


최현은 어려서 군영에서 자랐다. 홍범도(洪范 1868-1943,평안북도 자성군 출신)임병국(任秉) 독립군 장군들은 그의 스승이었다. 그에게 총검술과 기마술을 전수해 주고 그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 의지를 심어줬다. 그의 나이 겨우 11세때 대한독립군(1919-1921홍범도 장군 휘하의 200여 의병이 주동적으로 설립한 항일독립군 부대, 백두산 밑자락 왕청현 봉오동을 근거지로 함)에 참가하여 통신연락병 임무를 맡으면서 반일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192010-19215월 기간 일본군의 대토벌로 대략 1만명의 조선 혁명가와 주민들이 살해되었다. 최현의 모친도 이때 희생됐다. 최현과 그의 부친은 임병국 부대를 따라 소련 연해주로 철수했다. 연해주에는 약 20여만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소련정부의 암묵적 지원하에 독립군은 휴식 및 정비를 취하면서 계속적으로 연해주와 조소국경을 근거지로 하면서 항일투쟁을 진행했다. 최현은 독립군 한 지대의 통신병으로 임명되었다. 어려서부터 배워서 능숙한 기마술로 인해 최현에게는 통신병은 매우 적합한 직무였다. 이해 겨우 13세의 키 작은 소년은 광야에서 말고삐를 놓고 질주하였는데 평생을 말위에서 생활한 러시아인들도 경탄했다.

 
첫번째 전투에서 소속 지대가 일본군에 포위되자 최현과 다른 3명의 통신병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 본부에 구원을 요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말을 타고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향해 돌진했다. 적의 총탄에 의해 3명의 동료들은 모두 희생되었으며 최현도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총상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제시간에 본부에 도착했다. 임병국은 친히 그의 부상 부위에 붕대를 감아주면서 장차 독립군 장군감이라고 거듭 칭찬했다. 이것은 아마도 선배가 용맹한 전사에게 격려와 위로의 말이었다. 그러나, 비록 최현은 독립군 장군은 못되었지만 오히려 종국에는 조선의 명장이 되었다.

독립군 실패 후최현은 간도로 돌아와서 윤창범(尹昌范, 후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 독립연대장 역임, 1933민생단간첩 누명으로 피살됨)의 소개로 동만청(东满青)총조직에 가입했다. 동만청 총조직 시기는 그가 민족주의 운동에서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 전환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방향 전환은 그가 7년여의 감옥 생활중에 더욱 촉진되었다. 1925봉천군벌당국은 경제모금사건혐의자로 그를 체포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길림 제4감옥(연길감옥)에 수감했다. 그가 감방에 수감되었을 때 별명이 꼴통인 강도살인범이 있었다. 그는 매번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올 때마다 그들의 물건들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만약 누구의 친구나 친척이 사식을 넣어주면 그 꼴통이 빼앗아 자기 배를 채웠다.

 
최현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를 교육시키기로 했다. 최현은 고급 담배를 꺼내 자기가 하나 물고 다른 수감자에게도 하나씩 돌렸으나 일부러 꼴통에게는 주지 않았다. “꼴통은 최현을 한대 갈기려고 했으나 오히려 최현의 수갑 채워진 주먹 한방에 쓰러졌다. 이때부터 그는 감히 다른 수감자들을 괴롭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최현이 꼴통을 꼼짝 못하게 하자 다른 수감자들은 그를 은인으로 여기며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최현 또한 순조롭게 모두를 단결시킬 수 있었으며 자기의 영향력을 다른 감방까지 확대하게 되었다.

최현이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지 얼마 안되어 군벌당국은 빈번하게 용정시(
井市)의 대성중학, 영신중학, 은진중학 등 다수의 학생들을 조직하여 감옥을 참관케했다. 이것은 용정에서 계속해서 각종 반일 반군벌 단체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반동파들은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청년학생들의 혁명사상을 말살시키고 그들의 투쟁의지를 압살하려 기도했다. 최현은 적들의 음모를 분쇄하려고 결심하고 각 감방에 좋은 물총을 사전에 준비하라고 통보했다. 학생들이 감방 참관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인솔한 반동교사들과 간수들을 향해 변기통의 오물을 쏴대었다.  놀란 그들은 학생들을 데리고 감옥에서 도망쳤다. 감옥당국은 주모자를 찾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짜냈으나 모든 수감자들이 자기가 주모자라고 말한 통에 찾아낼 수가 없었다.


길고 긴 감옥생활에서 최현은 감옥 신발제조창의 제조공, 석판인쇄창의 문자배열공, 복장제조창의 양복 재봉사, 목공제조창의 목공 및 이발사가 되었다. 그는 어디에서 일하든 그를 학대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모두 철저하게 보복했다. 어느날 그가 탁의자를 제조하고 남은 나무 조각으로 장기 알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감시공이 이 상황을 목격했다. 감시공은 수감자들을 밥 먹듯이 때렸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감시공이 최현을 때리려고 하자 최현은 의자다리로 후려 갈겼다. 감옥당국은 최현에게 일주일의 독방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그 이후 감시공은 감히 다시는 수감자들게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했다.

 

2. 항일의 선봉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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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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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민들레 작성시간 11.04.22 이준(李俊 1859?1907,함경북도 북청군 출신) 북청은 함경남도임.
  • 작성자방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4.22 감사합니다^^. 일부 지명/인물소개 등은 중국인이 작성한 관계로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가급적 번역시 오류는 정정하겠습니다.
  • 작성자버스노동자 작성시간 11.04.22 후속편 기대하고 있습니다...좋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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