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 본 자료는 중국 인터넷 자료를 번역한 것으로 일부 내용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2. 항일의 선봉에서
1930년 연변지역의 오주(五卅)폭동 및 추수봉기, 춘황투쟁이 진압된 후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1932년에
1934년 3월에 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동만(东满) 각 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그러나, 이러한 항일통일전선에서 출발한 전략은 오히려 독립사단 지도층의 좌경인물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자위단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적에게 투항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최현은 정치지도원의 직무에서 해임되었으며 또한 “민생단”의 첩자로 몰렸다. 그 당시 이것은 언제든지 처형당할 수 있는 것을 의미했다. 1933년 반”민생단” 투쟁에서 2,000여명의 조선인 공산당원과 유격대원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다행이 최현은 사단 정치위원 왕덕태 (王德泰, 1908-1936 산동 출신)의 헌신적인 변호를 받았다. “만약 최현 동지가 민생단이라면 우리 2군에서 민생단이 아닌 사람은 누가 있는가?” 이렇게 해서 단지 전사로만 강등되었다. 왕덕태는 최현이 암살당할 것을 걱정하여 그를 1년동안 군수처장에 임명하여 자기 신변에 있기 했다. 1935년말에 최현은 다시 제1중대장에 복직 되었다.
1936년 2월 9일, 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고, 부대 편제를 확대하였는데 한편으로 간부층이 부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간부들이 “민생단” 꼬리표가 붙어있어 임명되지 못했다. 왕덕태, 김일성 등은 반”민생단” 투쟁의 지도층에 단호히 반대하며, 대담하게 신임하고 대담하게 발탁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수많은 “민생단” 덫에 걸린 간부들은 해방시켜주고, 그들은 각 부대 간부에 복직시켜 주었다. 최현도 중대장에서 1사단(동년 7월 4사단로 변경) 제1연대장으로 승진했다
1938년 7월,최현은 항련제1로군 제3방면군 제13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최현은 기지가 넘치고 용감하며, 대담하면서도 세심하며, 위급한 상황에도 냉정했다. 1930년대 후반기 최현은 소탕하 전투(1936년 11월 하순, 만주군 7기병연대 및 교도대와 교전), 사문구 전투(1936년 12월,만주군 8연대 매복습격), 간봉산 전투(1937년 6월 30일 ,일본군 19여단 74중대 및 만주군 장조국대대 매복습격), 동청구 전투(1936년 10월 10일,만주군 7여단 10연대 매복습격), 목기하 전투(1939년 3월 11일, 이해산 산림경찰대 섬멸), 대사하 전투 (1937년 4월 24일,이도선 치안대 섬멸), 대양차 전투(1936년 11월 4일,만주군 교도대 2개 중대 투항)、한총구 전투(1936년 4월 7일, 돈화현 일본군 수비대 및 만주군 경찰대 매복습격)등 300여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탁월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재능과 비할데 없는 용감한 정신을 충분히 발휘했다. 일본군은 최현을 “흉악한 대장부”라고 불렀다. 최현은 자기 휘하의 연대를 이끌고 능숙하게 싸움을 잘하였으며 용감하게 공격하여 그 명성이 자자했다.
최현은 군사작전의 명수였으며 또한 노련한 정치공작원이자 선동가였다. 그는 다른 군사세력에 대한 군사외교 및 통일전선 조직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적군 와해공작에도 능숙했다. 그는 만주군속에 자기의 조직을 심어놓고 유격대로 무기탄약을 빼돌렸을 뿐만 아니라 자주 군사정보를 제공받았다
적배후의 생활은 매우 고생스러웠다. 장기간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유격전을 벌이던 중 최현은 장티푸스에 걸려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이 되었다. 밀영으로 후송되어 요양을 받았으나 밀영내 의약품이나 식량사정이 매우 열악했다. 죽 한끼 먹기도 어려워서 겨우 곰팡이 낀 옥수수 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으나 이마저도 금방 떨어지곤 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최현은 부상병을 이끌고 돈화 부근의 친일 지주를 습격하여 많은 양식과 고기를 노획했다. 이 덕분에 환자와 부상병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어보게 되었다. 최현의 아내 김철호(金哲镐)는 금방 출산할 시점에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다른 대원들과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아기를 받아줄 조산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눈 속에서 아기를 낳고 스스로 아기 탯줄을 끊었다. 그리고 나서 계속 추격해 오는 적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다행이 유격대 증원군이 도착하여 그녀와 갓난 아기 모두 구조되었다. 김철호는 동북의 전투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해방후 조국에 귀국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자녀들에게 매월 두번씩 옥수수 찌꺼기로 만든 죽을 만들어 먹였다
1940년대초,적군의 “중점토벌” 때문에 제3방면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활동했다. 최현은 13연대를 이끌고 주력부대를 떠나 연길현 사방대, 화전현 대포시하, 교하현 관지 등 적의 거점을 연속해서 공격했다. 이후 왕청현으로 돌아와 계관립자와 노모주하 등 집단 부락을 공격하였으며, 5월 5일에는 천교령, 대전자 거점을 습격했다. 그리고 나서 포위망을 돌파하여 동녕현으로 이동했다. 제3방면군 주력부대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고 오상현(五常县)으로 안전하게 이동했다.
항일련군은 1940년말까지 유지되었으나, 전체 제1로군은 이미 거의 붕괴되었다. 제1방면군의 총사령 조아범(曹亚范, 1911-1940,북경 출신)은 이미 희생되었으며, 각 부대도 전멸당했다. 경위여단과 제2방면군의 잔여부대는 연속해서 소련으로 들어갔다. 제3방면군 총사령 진한장 (陈翰章, 1913-1940,길림 돈화 출신)과 제15연대장 이용운(李龙云)도 연달아 희생되었다. 제1로군 본부와 이미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제3방면군 참모장 안길(安吉, 조선인,?-1947)이 통솔하는 13연대, 14연대가 훈춘 일대에서 월경하여 소련으로 퇴각했으며, 1941년 1월 중순 하바롭스크 근방의 남야영에 도착했다. 2월 25일,항련 지도자 주보중(周保中)과 김책(金策)이 남야영 시찰을 나와 간부회의 소집했다. 간부회의에서는 부대 개편과 중공당 도남특위 조직을 결정하고 최현을 후보위원에 임명했다. 8월 11일 저녁 계청(季青, 흑룡강 출신), 최현이 인솔하는 1지대 16명은 중소 국경을 월경하여 녕안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1941년 8월 1일,소련으로 퇴각한 각 항련부대는 소련적군 편제에 따라 항일연군 교도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소련 적군소속이 되었다. 제1로군 출신들은 제1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최현은 이때 대위로 제1중대장에 임명되었다.
3. 승 과 패 (계속)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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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知天命 작성시간 11.04.23 기다려던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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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론직필 작성시간 11.04.23 아주 귀중한 자료인데......
알아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당시 항일독립투사들의 움직임과 일제 만주군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 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전혀 없는 내용들이지요.
친일매국노들이 만든 교과서이니....그에 대한 내용이 있을 턱이 없지요.
한 가지 아쉬움은.....당시 김일성이 어떤 위치와 활동을 했었는지가
아직 안나오는군요. 위 글로만 판단해보면 당시 김책이나 최현 등이
당시 김일성 보다 더 상위의 직책이었던 것 같네요. -
작성자민들레 작성시간 11.04.24 추천꾸욱.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