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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대한'민국이 나를 고문했다 - 1974년 탈북 인민군 중대장 김관섭

작성자정론직필|작성시간15.02.03|조회수1,099 목록 댓글 1

"'자유 대한'이 나를 고문했다"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귀순용사' 김관섭은 왜 피켓을 들었나 <1>

성현석 기자 2015.01.19 10:16:57


그는 반공교육 강사였다.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행복합니다." 30년 넘게 외쳤다. 

지금도 한국자유총연맹 소속이다. 


'자유 수호'를 입에 달고 다니던 그는, 고문 피해자다. 

'자유 대한'이 그를 고문했다. 41년 전 고문 후유증이 아직도 괴롭힌다. 

하지만, 그는 고문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분단체제에선 인권보다 안보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믿고,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남한과 북한이 서로 간첩을 보낸다. 간첩을 잡으려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간첩인가 해서 고문했는데, 아니었다면? 

"사과해야 한다.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 


'독거노인' 된 '귀순용사'…"나는 고문당했다" 


하지만 그를 혹독하게 고문했던 '자유 대한'은 41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런 사과가 없다. 그 사이, 그를 고문했던 신문관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때리고, 잠을 재우지 않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에 들이붓던 이들도 집에선 아빠였다. 그들 역시 자식들이 결혼할 때면 청첩장을 돌렸다. 고문 후유증이 여전한 다리로, 결혼식장에 찾아가 축의금을 냈다. '자유 대한'에서 살아가려면,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자유 대한'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이 그들이었으니까. 


올해 81살이 되는 '귀순 용사' 김관섭 씨의 사연이다. 

그는 원래 북한군 전방 부대 중대장이었다. 남한이 보낸 북파 공작원도 여럿 잡아낸 유능한 장교였다고 한다. 그가 남한 사람이 된 건 1974년 8월 26일 아침이다. 전날 밤 북한을 출발해서 7시간 수영 끝에 강화도 해안가에 도착했다. 열하루 전,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를 저격했다. 살벌한 시국이었다.  


그날 이후 김 씨가 한국에서 살아온 시간을 소개한다. 폭력적인 가부장을 닮은 국가권력이 제 발로 찾아온 적대국 사람을 어떻게 때리고 달래서 길들이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김 씨는 81살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기억도 멀쩡했고, 말에 조리가 있었으며, 농담도 곧잘 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살아갈 날이 길지 않다는 걸, 총기가 흐려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프레시안>은 경기도 안산에서 가족 없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아가는 그를 여러 차례 만났다. 그의 머리가 녹슬기 전에, 그의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 일부 '귀순용사'에게 행해졌던 고문 사실을 밝혀주길 요구하는 김관섭 씨



곳곳에 간첩 신고 포스터…"북에서 왔습니다" 

  

41년 전 그날 밤, 썰물이 빠지는 방향을 믿었다. 권총 한 자루를 쥐고 고무 튜브에 몸을 실었다. 남으로 향하는 해류가 그를 내려놓은 곳은 경기도 강화군 양사면 교산2리 해안가.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서 걸어 나왔다. 이른 아침, 멀리 논두렁에서 참새를 쫓는 노인이 보였다. 소리쳤다. "나는 북조선에서 온 사람입니다. 지서가 어딥니까?


노인의 뒤를 따라가던 중, 다른 농민 조 모 씨를 만났다. 

  

"북에서 온 사람이래!"  


총알을 뺀 권총을 조 씨에게 맡기고, 조 씨의 집으로 갔다. 김 씨는 젖은 속옷 한 벌만 걸친 채였다. 그 사이, 마을 주민들이 조 씨의 집으로 모였다. 동네 아낙들이 보는 앞에서, 홀딱 벗었다. 조 씨가 건넨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부끄럽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얼마 뒤, 순경이 총을 겨누며 들어왔다. 그들을 따라 경찰서로 갔고, 그리 찾아온 군인을 따라 서울로 갔다.  


훗날 알았다. 그가 처음 봤던 노인이 그를 간첩으로 신고했다는 걸. 간첩 신고 포상금이 적힌 포스터가 전국 곳곳에 붙어 있던 시절이다. 노인은 자신이 김 씨를 발견했다고 경찰에 이야기했다고 한다.


"오늘, 김 선생은 고문을 받습니다" 


김 씨를 태운 차량이 멈춘 곳은 서울 신길동 대성공사. 국군 정보사령부가 운영하는 기관이었다. 거기서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향긋한 치약 냄새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북한에선 치약이 귀했다. 대신 치분을 썼다.


점심 식사 뒤, 신문을 받았다. '귀순 동기'를 한참 동안 설명하고, 대성공사 안에 있는 숙소에서 잠이 들었다. 오랜 긴장 속에서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권 모 신문관이 찾아왔다. 책을 두 권 건넸다. <나는 공작원이었다>, <나는 여간첩이었다>


'왜 이런 책을 보라는 걸까.' 영문을 모른 채 책을 듬성듬성 읽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974년 8월 28일 아침. 권 신문관이 다시 찾아왔다.  


"오늘, 김 선생은 고문을 받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포승줄로 상반신을 묶은 뒤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입과 콧구멍에 수건을 덮고 고춧가루 탄 물을 주전자로 들이부었다.  


"너, 문세광 사건 알지? 너, 남한에 왜 왔어?


그제야 전날 받은 책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책 내용은 일종의 모범 답안이었다. 그대로 대답하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하리라. 


결국 허위 자백을 했다. "박정희 암살하려 왔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보낸 45일 


고문이 끝났다.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는데, 고춧가루 냄새가 확 끼쳤다. 29일 오전, 김 씨가 늘어져 있던 독방 문이 열렸다. 밤새 그를 고문했던 신문관들이었다. 중앙정보부 소속이던 그들이 김 씨를 끌어내 차에 태웠다. 차가 나가는데, 문 앞에서 누가 가로막았다. 대성공사 간부였다. 대성공사는 국군 정보사령부 소속이다. 따라서 김 씨는 정보사령관의 허락을 받아야 나갈 수 있다는 거였다. 중앙정보부 신문관들은 뿌리치고 그냥 나갔다.     


남산 중앙정보부에서도, 독방에서 지냈다. 도착 첫날, 한 간부가 찾아왔다. 남한에 와서 처음 듣는 친절한 목소리였다.  


"정말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러 왔나?


털썩 무릎을 꿇었다. 펑펑 울었다. "어젯밤에 너무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는 귀순하러 왔습니다."


간부는 말없이 나갔다. 그리고 다시 고문이 시작됐다. 약 45일 간, 중앙정보부 독방에서 별의별 고문을 다 받았다. 우선, 잠을 재우지 않았다. 자리에 누우면, 눈 가까이에 백열등을 밝혔다. 빛과 열 때문에 눈을 감아도 잠을 잘 수 없었다. 간질이는 게 고문의 한 방식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자리에 눕혀놓고, 온몸을 간질인다. 그게 지속되면,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댄다. 더 이어지면, 비명이 터지고 통곡을 한다. 그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박 대통령 죽이러 왔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하면 때리고, 그렇다고 하면 멈췄다. 그러니까, 김 씨는 고문당할 때는 '박정희 죽이러 왔다'고 하고, 고문이 멈추면 '실은 귀순하러 왔다. 아까는 무서워서 그렇게 말했다'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그를 부축해서 화장실로 데려가던 헌병이 속삭였다. "오락가락 대답하면 안 돼요. 솔직하게 말하세요." 


어느 날, 다른 신문조가 들어왔다. 분위기가 편안했다. 족발에 소주도 곁들여졌다.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더는 고문이 없었다. 김 씨는 중앙정보부에서 나왔다.  


자살 시도를 감추다 


다시 대성공사로 이송됐다. 거기서 그를 처음 고문했던 신문관들이 나타났다. "여기서 전에 신문받을 때, 고춧가루 냄새는 안 났었지?" 목소리가 딱딱했다. 고춧가루 탄 물로 고문당했던 사실을 부인하라는 압력이었다. 오줌에서 풍기던 고춧가루 냄새를 어찌 잊겠는가. 하지만, 또 고문을 당할까 겁이 났다. "생각이 잘 안 납니다."


그래도 고문 받았다. 이번엔 다른 신문관이었다. 대성공사 소속과 중앙정보 소속이 함께 고문했다. 그들은 김 씨에게 소주를 억지로 먹여서 취하게 한 뒤, 마구 때렸다.  


계절이 바뀌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김 씨는 특수독방으로 옮겨졌다. 콘크리트 맨바닥이었다. 이불도 없었다. 식사도 없었다. 그렇게 이틀을 굶고 나서, 김 씨는 자살을 결심했다. 속옷을 찢어 끈을 만들고 그걸로 목을 맸다. 자살에 실패했다. 겁이 덜컥 났다. 독방에서 자살을 시도한 게 들키면, 또 고문을 당할지 모른다. 허겁지겁 하수구에 끈을 감췄다. 사흘째 되던 날, 독방 문이 열렸다.  


'대한민국 만세' 외쳤더니… 


헌병이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때,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다른 헌병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죽기 전에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세요. 그래야 삽니다." 


도착한 곳은 식당. 한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오늘이 김관섭이의 마지막 날이다. 준비해라." 


식사가 끝나자 헌병들이 옷을 벗기고 몸을 묶었다. 그리고 포대자루가 씌워진 채, 차에 태워졌다. 몇 시간이나 돌아다녔을까. 어디선가 차가 멈췄다. 포대자루가 벗겨졌다. 차 안에서 목청껏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방으로 끌려갔다. "너 이 새끼, 간첩 맞지. 진짜 귀순자면 그렇게 맞았는데 '대한민국 만세'라는 말이 나오겠어. '대한민국 개새끼'라고 할 거 아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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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잡았는데, 간첩 아니면 책임질 겁니까?"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귀순용사' 김관섭은 왜 피켓을 들었나 <2>

성현석 기자 2015.01.20 13:40:10


고문이 끝났다. 김관섭 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결론은 언제 내려졌던 걸까. 포대자루를 벗은 김 씨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순간? 중앙정보부 신문관들이 푸근한 분위기에서 족발과 소주를 권하던 때? 아니면, 김 씨가 중앙정보부에 들어오던 첫 날? 


간첩 아닌 것 같다면서도 고문했다면?


고통스런 질문이다. 김 씨가 귀순자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 있는데도, 고문이 그치지 않았다면, 그 고문은 대체 무얼 위한 건가. 김관섭 씨의 말이다.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때려잡았다. 그래서 간첩이 맞으면 상을 받는다. 그건 좋다. 그렇다면, 반대 경우엔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때려잡았는데, 간첩이 아니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다. 간첩이 맞으면 좋고, 아니어도 책임질 일이 없고, 이런 경우가 어디 있나." 


1974년 8월 26일 강화도 해안가에 도착한 전직 북한군 중대장 김관섭 씨는 서울 신길동 대성공사에서 하룻밤 고문을 받고, 남산 중앙정보부로 옮겨져 45일 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대성공사로 이송돼 고문을 받았다. 대성공사 특수독방에서 사흘을 보내고, 포대자루를 뒤집어 쓴 채 차로 한참 돌아다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뒤부터는 고문이 없었다. 김 씨를 담당한 신문관은 왜 욕을 하지 않고 만세를 외치느냐고 캐물었지만, 사실상 김 씨가 간첩이라는 의심은 풀린 상태였다. 그때가 1974년 11월이었다. 


"신문관들이 북한을 몰랐다…진급에 눈 멀어 때려잡기만" 


이듬해, 김 씨는 목에 화환을 걸고 귀순용사 환영행사를 했다. 간첩이 아니라고 판명됐으니, 김 씨는 자유를 얻었을까. 그건 아니다. 김 씨는 1978년 3월까지 대성공사에 갇혀 있었다. 만 3년 반 동안, 대성공사에서 지낸 셈이다.  


왜 이렇게 오래 갇혀 있어야 했을까. 김 씨도 모른다. 중앙정보부 인사 문제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고문이 끝난 뒤엔 대성공사 생활도 할만 했다. 외출도 허용됐다. 신문관들과 외식도 종종 했다. 술도 마셨다. 윤락여성과 성관계도 했다.  


당시 그가 주로 한 일은 북한군 정보 제공이었다. 500여 건쯤 넘겼다. 이 가운데 129건이 군 당국에 의해 고급정보로 채택됐다. 당시만 해도, 북한군 전방부대 지휘관이 남한으로 넘어온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남한 정보당국이 보유한 북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북한 군인들은 '승리' 담배를 피웠다. 남한 군인들이 피우는 '청자' 담배보다 맛이 좋았다. 그런데 나를 고문한 신문관들은 북한 담배 이름도 몰랐다. 한마디로 '전문성'이 없었다. 진급에 눈이 멀어서 그냥 때려잡기만 한 거다." 


"다른 귀순자들을 회유했다" 


다른 '귀순자'들을 회유하는 일도 당시 그가 한 일이다. 자발적으로 남한에 왔지만, 북한 정보 제공에는 소극적인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설득해서 정보를 내놓게끔 하는 일을 김 씨가 했다. '귀순' 이후, 다시 북한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일도 했다. 이런 일들이 김 씨는 보람 있었다고 한다. 그를 고문했던 신문관들은, 대성공사에서 지낸 나머지 기간 동안 김 씨의 동료가 됐다. 장교 출신인 김 씨는 서류 작성에 익숙했다. 바쁠 때면, 신문관들이 할 일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서류 업무를 그들보다 더 잘한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기회이기도 했다.  


신문관들에게 김 씨가 느끼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분명히, 친밀감도 있다. 폭력 가해자가 태도를 바꾸면, 오히려 피해자가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지옥의 시간, 소소한 친절을 베풀었던 신문관이나 헌병에 대해서도 고마운 기억이 있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가해자 그룹이다. 그런데도 고맙다.


김 씨는 대성공사에서 나온 뒤에도 신문관들의 경조사를 꾸준히 챙겼다. 정보 당국은 신문관과 귀순자가 함께하는 모임을 꾸리도록 지원했다. 김 씨도 모임에 참석했다. 어찌됐든, 남한에서 맺은 가장 오래된 인간관계다. 그를 혹독하게 고문했던 한 신문관의 모친 상가에 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는데, 오래 앉아있기가 불편했다. "먼저 일어납니다." 상주였던 신문관이 한참 따라 나와서 배웅했다. 김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게다.  


40년 지나서야 고문 공론화 하는 이유 


고문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함께 웃고 밥 먹고 술 마신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분노가 있다. 그러나 김 씨는 나이 여든을 넘기고서야 과거 고문 사실을 공론화할 결심을 했다. 죽을 날이 머지않아서, 무서울 게 없어지고서야 가능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한 세월이 40여 년이다. 그를 고문한 신문관들을 고소할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때마다 참았다. "혹시 모를 역효과와 보복 가능성까지 생각하다보니 4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권력은 자유가 그립다며 찾아온 적성국가 군인을 때리고 달래서 길들이는데 성공했다. 속에 쌓인 분노를 그저 삭이기만 하도록 길들여진 그를, 대한민국 정부는 어떻게 쓰다가 버렸나. 다음 편에서 그 이야기를 다룬다. 



                         ▲김관섭 씨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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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보 빼먹곤 '나몰라라'…왜 항의 못 했나?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귀순용사' 김관섭은 왜 피켓을 들었나 <3>

서어리 기자 2015.01.21 14:26:31



1997년 3월 안양 대안 중학교에서 '북한의 실상과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안보 교육을 한 김관섭 씨



탈북자 김관섭 씨. 그는 1978년 대성공사를 나왔다. 북한을 떠난 지 3년 6개월 만에야 비로소 남한 사람이 된 것이다. 김 씨가 대성공사에 갇혀 있는 사이 다른 탈북자들이 몇 명이나 들어왔다 나갔다. 그가 아는 한, 그는 대성공사 최장기 수용자였다. 왜 유독 자신만 이렇게 오래 갇혀있었어야 했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나서서 따지지 않았다. 항의해서 나갈 수 있는 것이라면 진작 내보내줬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끔찍했던 고문의 기억들도 떠올랐다. 


'모범수'가 되는 길을 택했다. 조사관들을 대신해 열심히 조서를 썼고, 반공 강연 강사로 불려 나갈 때마다 열심히 '멸북'을 외쳤다. 알아서 기었다. 대성공사에서 지낸 3년 6개월은 그를 이렇게 길들였다.


'남한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나' 따지고 싶었지만…'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국가는 사과 한마디가 없었다. 보상도 없었다. 간첩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3년 6개월 만에 남한 사회에 풀려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차디찬 홀대였다. 


탈북자들은 '귀순 용사'라며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대성공사만 나가면 자신 역시 좋은 대접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정착지원금은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고, '귀순 용사'라며 떠들어대는 언론의 환대도 없었다. 보통 군 출신은 경력을 인정받아 군에 들어갔지만 그는 예외였다.


뒤를 봐줄 것처럼 얘기하던 조사관들도 김 씨를 외면했다. 3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가 아는 북한 정보들을 이미 가져갈 만큼 다 가져간 뒤였다. 조사관들이 먼저 연락할 이유는 없었다. 가끔 본인 경조사 때나 전화를 걸었다.  


남한 사회에 풀려 나온 김 씨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나 다름없었다. 태어나서 한 일이라곤 총 드는 일밖에 없던 그가 민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남한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수없이 외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대성공사를 나왔지만,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여전했다. 


"자유민주주의 옹호하는 것과 '간첩 누명'에 항의하는 것은 별개"


맨몸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반공 강연이 겨우 몇 건 들어왔다. 국정 강연이라 벌이가 좋진 못했다. 쥐꼬리만 한 급료 중 일부는 대성공사 직원들이 떼갔다. "우리들이 소개해준 거나 다름 없지 않느냐. 기름값이라도 하자"며 중개료 명목으로 알아서 몇 푼 챙긴 것. 괘씸했지만 백수 처지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일거리가 들어오는 대로 군대, 학교, 촌 동네 할 것 없이 찾아가 외쳤다. '북한은 나쁘다'고. 


'북한 인민군 중대장 출신' 꼬리표 덕에 그의 반공 교육은 입소문을 탔다. 대성공사에서 나온 이듬해인 1979년에 했던 강연만 200번이었다. 30년이 흘러 강연 횟수를 헤아려보니 4000회, 수강 인원은 130만 명이 넘었다. 그동안 그의 명함에 찍혔던 직함도 여럿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국민홍보위원, 통일부 통일교육 전문위원, 민방위소양강사, 한국자유총연맹 통일전문위원…. 안보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남한이 옳고 북한이 그르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수없이 안보 강의를 하는 동안에도, 고문 당하고 3년 넘게 수용 생활했던 일은 억울하고 분했다고 토로했다.


"제가 남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것과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든 국가에 항의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간첩이 아닌 걸로 밝혀졌을 때 국가가 바로 사과하고 적절한 보상을 했더라면, 죽을 때가 다 된 제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겁니다." 


두 번의 결혼 실패, 아들의 가출…간첩 누명이 가져온 불행 


고문 후유증, 대성공사 장기 수용 사실은 번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안보 강사로 자리를 잡을 무렵, 결혼소개소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했다. 당시 귀순 용사는 인기가 좋아 어렵지 않게 상대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아내는 아들을 낳은 지 4개월 만에 집을 버리고 떠났다. '잘 나가는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돈을 잘 벌지 못해서 도망갔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샜다. 아내가 없으니 당장 아이 키우는 일이 막막했다. 안보 강연에 나갈 때마다 아는 탈북자에게 아이를 맡겼다. 얼마 되지 않던 강연료는 몽땅 보육료로 썼다. 


10년 만에 재혼에 성공했지만, 두 번째 결혼 생활 역시 그리 길지 않았다. 처가 식구들은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수입이 적고 수용 생활이 길었던 그를 수상하게 바라봤다. 그는 아내에게 간첩으로 몰려 고생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이해와 공감을 바라고 솔직하게 터놓은 이야기는 되려 독이 됐다. 아내와 처남은 김 씨를 진짜 간첩으로 의심했다. 처남은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에게도 '네 아버지가 간첩인 것 같다'고 했고, 사춘기가 한창이었던 아들은 결국 집을 나갔다. 


고문 후유증으로 성 기능도 좋지 못했다. 아내의 불만은 쌓여갔고, 그는 다시 이혼 전철을 밟았다. 자신을 떠난 처자식들이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선택이 이해가 됐다.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교통사고 당하고도, 병원 대신 안보강연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1998년 어느 날, 김 씨는 여느 때처럼 강연장으로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직후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병원 대신 안보교육장으로 갔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북한 군대에 대해 설명하던 그는 까무룩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곤봉으로 맞은 후유증 탓에 허벅지 통증을 겪던 그는 지체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나이가 들자 그동안 간간이 들어오던 강연마저 끊겼다. 현재 여든을 넘긴 그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세로 살아가고 있다. 6평짜리 단칸방에서 혼자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혼자 잠이 든다.


"제 인생이 너무 비참합니다. 북에 있는 가족들과도 생이별하고 왔는데 남한에서도 가정이 파탄 났으니…. 이제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잘 걷지도 못해요. 이렇게 어렵게 살 거였으면 왜 왔나 후회가 막심합니다. 내가 간첩으로 몰리지만 않았어도 다른 귀순 용사들처럼 대접받고 잘 살았을 텐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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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캠프 출신, 왜 '종북 변호사' 도움 청했나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귀순용사' 김관섭은 왜 피켓을 들었나 <4>

서어리 기자 2015.01.22 17:06:20



▲김관섭 씨가 북한 이탈주민 후원회를 통해 받은 군 정보사령부의 귀순자 공적확인 결과 문서


(정론직필 주: 위 문서를 살펴보면...김관섭은 정식 인민군대 중대장이라기 보다는

북한 사회안전부 소속, 즉, 아마도 북한 경찰조직에서의 대위 계급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네요.)


나이 40에 남한에 와 내리 30년안보 교육 강사로 지냈다. 이만하면 국가에 헌신한 삶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건 국가였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대성공사에서 간첩 누명을 쓰면서부터였으니. 


주변 귀순자들은 김관섭 씨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김 씨는 지인들의 설득에 용기를 내 지난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에 대성공사 시절 가혹행위에 대한 피해보상과 국가유공자 지정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김 씨를 독려했던 귀순자 모임 '통일연구회' 사람들이 다시 만류하기 시작했다.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받는 지원이 끊긴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진정서를 철회했다. 체념한 채로 다시 또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지난해 2월. '유우성 간첩 조작 의혹 사건'으로 나라가 들썩였다. 지금이야말로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7년간 묵혀뒀던 진정서를 다시 꺼내 다듬은 뒤 청와대에 제출했다. 두 달 후쯤 청와대를 경유해 국정원 측 답변서가 날아왔다. "가혹행위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신문관 중 7명은 사망했거나 소재 파악이 안 되고, 나머지 생존자 3명은 "고문 사실과 인권유린 사항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생사람을 고문해놓고 오리발을 내미니 분통이 터집니다. 엉터리 답이 올 줄은 알고 있었어요. 간첩 증거 위조 사건으로 국정원 존립 자체에 문제가 생긴 판국이었으니까요."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다시 인권위에 보냈지만 여기서도 답변이 신통치 않았다. 인권위는 인권위원회법 제32조 제1항 제4호의 규정에 따라 "1년 내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진정서를 각하, 통보했다.


'종북 변호사’를 찾아가다 


대성공사 수용 당시 고문 사실을 증명해내기는 쉽지 않다. 너무나 많은 시일이 흘렀다. 김 씨를 고문했던 신문관들 중 다수는 이미 죽거나 생사가 불분명하다. 생존한 이들의 경우 혐의를 발뺌하면 그만이다. 이제 와서 '이근안처럼 고백하라'며 설득하기도 쉽지 않다. 


답답한 마음에 그가 찾은 사람은 '간첩 전문 변호사', '종북 변호사'로 알려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의 장경욱 변호사다. 김 씨는 장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조만간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고문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자료는 없지만, 대성공사에 3년 6개월 동안 있었다는 사실은 군에서 보관 중인 귀순자 공적조서에 나와 있다. 장 변호사는 이 '3년 6개월'이 어쩌면 진실을 밝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소송 준비를 위해 김 씨와 몇 차례 만나 면담한 장 변호사는 혀를 내둘렀다.


"평생 안보 강연 다니고 보수단체 간부를 지내신 분이 '종북 변호사'로 알려진 저에게 찾아와 변호해달라고 하다니,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박근혜 캠프’ 출신 탈북자가 정부에 보내는 쓴소리 


김 씨는 80세 노구의 몸을 이끌고 국가를 상대로 한 싸움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 12월에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고문과 인권 유린 사실을 나 몰라라 외면하고 심지어 은폐하는 현실을 보고 국가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며 면담을 요청한 것. 다행히 최근 인권위에서 "김무성 의원실 통해 조사 요청이 들어왔다"며 "검토 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지난 2012년 18대 대선 당시 김관섭 씨가 새누리당으로부터 받은 위촉장. 


 

 그는 "새누리당에서 저를 그냥 무시할 순 없을 것"이라고 했다. 김 씨는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는 데도 제 몫을 단단히 했다. 지난 2012년 18대 대선 당시 김 씨는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 캠프에서 위촉장이 날아왔다. '100% 대한민국 대통합위원회 지역통합본부 수도권통합본부 남북소통위원회 고문', '경기도위원회 고문'에 임명됐다. 그는 탈북자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1번’을 권유했다. 


탈북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박 대통령은 거듭 '통일 준비’를 주문하고 있다. 김 씨는 통일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정부가 나서서 자신과 같은 고문 피해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일까. 그는 "통일 국면에서 탈북자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면, 최고로 좋은 일은 탈북자들이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대한민국, 남한 사람들이 참 좋다’고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 말고도 억울하게 고문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대한민국이 나를 고문하고, 사과도 않고 힘들게 했다’ 하면 당연히 '오지 말라’ 소리가 나올 겁니다." 


김 씨는 국가가 자신에게 했던 잘못을 까발리는 일이 혹여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은 아닐지 고민이 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뜻은 단호하다. 


"남한을 미워하는 탈북자들이 많아지는 것이야말로 북에 이로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는 오히려 더욱 강하게 정부를 압박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달 안으로는 청와대 앞 1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대한민국, 북한에 천안함 진실 밝히라고 할 자격 있나" 


지난해 12월, 두 번째 인터뷰 자리에서 김 씨는 반가운 소식을 들려줬다. 15년 전 가출 이후 행방불명 상태였던 아들을 우연히 찾았다는 얘기였다. 


"아들이 집에 온다고 해서 청소를 깨끗이 해놨는데, 제 집을 빙 둘러보던 녀석이 저한테 "아빠 불쌍하구나"라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그래도 이번에 만나 얘기하면서 오해가 다 풀렸어요. 아들이 저한테 힘드셨겠다고 하더라고요. 감격스러웠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아줘서." 


그는 자신의 아들처럼, 늦게나마 국가가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알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 진실 제대로 밝히라고 하지 않습니까. 북한에도 천안함 사건을 사실대로 얘기하라고 합니다. 그럼 대한민국도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남한테 진실을 얘기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내부에서 인권 유린하고 고문하는 비인간적인 사실이 지속되는 한 사과하라고 보상하라고 할 명분이 없습니다.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 탈북 귀순자를 무고하게 간첩으로 몰고 고문 한 과거를 국가가 어서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바랍니다." <끝>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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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에 해코지당할까 봐 참고 살았지만…"

[현장] '대성공사' 고문 피해자 탈북자 김관섭 씨 1인 시위

서어리 기자 2015.02.03 15:46:17



▲'대성공사' 고문 피해자인 탈북자 김관섭 씨가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열고 "고문 사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군 조사시설 '대성공사'에서 3년 6개월간 불법 구금 상태로 고문당했던 탈북자 김관섭 씨가 정부를 상대로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김 씨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대통령님, 탈북자 고문 사실 밝혀주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


올해로 여든 한 살인 김 씨는 지난 1974년 도강해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다. 탈북 신고 후 바로 서울 영등포구 소재 '대성공사'에 입소한 그는 조사관들로부터 약 45일간 모진 고문을 받았다. 입국하기 불과 열흘 전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이 일어나 김 씨 역시 대통령 암살 지령을 받고 내려온 간첩이 아닌지 의심을 산 것.


간첩 혐의를 벗은 이후에도 그는 3년 넘게 대성공사에 갇혀 있었다. 조사관들은 북한군 중대장 출신이었던 그에게 북한 정보가 담긴 조서를 작성하라고 요구하거나 반공 강연에 나가도록 했다.


그는 "죄 없이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오랜 시간 동안 대성공사에 구금돼있었다"며 "긴 수용 기간과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가정생활도 모두 파탄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가가 반성하고 과거사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그동안 국정원이나 기무사 측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 참고 살았지만, 죽기 전에 꼭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진상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청와대에 보냈으나 "가혹 행위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는 답변서를 받았다. 현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장경욱 변호사의 도움으로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준비 중인 그는 최근엔 국방부에 "고문 사유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해달라"는 취지의 진정서를 접수했다.


김 씨는 이날 "청와대에 시위를 하러 오니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대성공사 출소 뒤 18년간 국정홍보요원을 지낸 그는 "청와대 초청을 받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다 만났지만 그땐 용기도 나지 않고 발언할 기회가 없어 억울한 사연을 직접 전할 수 없었다"며 "40년 동안 묵혀왔던 과거를 이제라도 털어놓으니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김 씨는 이날부터 오는 6일까지 매일 오전 11시에 같은 장소에서 일인 시위를 열 계획이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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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삐라' 이민복 "나도 국정원 고문 피해자"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국정원 탈북자 가혹행위… 좌우 아닌 진실의 문제"

서어리 기자, 성현석 기자 2015.01.23 14:10:27



                  ▲1999년 1월 16일 <한겨레> 19면.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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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귀순용사' 때려잡던 '대성공사', 사라지지 않았다

탈북자 증언 "총 든 군인 감시에 지하 독방 생활…인권 사각지대"

서어리 기자, 성현석 기자 2015.01.27 07:26:39


탈북자 신문과정에서 인권 침해 논란을 빚었던 '대성공사'가 지난해 10월까지 운영된 사실이 확인됐다.  

'대성공사'는 2008년 탈북자 신문 기능을 중앙합동신문센터에 이관한 뒤 운영이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프레시안>이 단독 입수한 국가정보원 자료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또 '대성공사'에서 벌어진 인권유린 의혹 역시 여전하다. 일부 탈북자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 한다. 국정원 자료 역시 인권 침해 가능성을 인정한다.   


탈북자 신문 과정에서 인권 유린, 사라지지 않았다


대성공사, 운영 중단 알려진 뒤에도 4년 간 비공개 운영 


국정원이 현재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탈북자 조사 시설은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다. 2008년 개관한 이후 지난해 7월까지 '중앙합동신문센터(이하 시흥 합신센터)'로 불렸던 곳이다. 남한 입국을 신고한 탈북자들은 이곳에서 국정원‧군‧경찰의 지휘 하에 탈북 및 국내 입국 경위, 신분 확인, 대공 용의점 등에 대한 조사를 받는다. 조사관들이나 탈북자들은 시흥 합신센터를 정식 명칭 대신 '양지공사'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성공사' 역시 위장 명칭으로, 정식 명칭은 '군 정보사령부 중앙신문단'이다.


"시흥 센터는 '호텔'이었죠. 대성공사는 사람 사는 데가 아니었어요


국정원이 앞선 문건에서 밝힌 대로라면, 대성공사 수용 대상자는 북한 군사정보를 아는 것으로 추정되는 탈북자여야 한다. 그러나 김 씨는 대성공사에 함께 간 이들 중 젊은 여자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고 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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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만 믿었는데…웬 날벼락"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탈북자들은 왜 국가에 이용당하나

서어리 기자 2015.02.03 08:12:48


<프레시안>이 지난 19일부터 소개한 탈북자 김관섭 씨. 그는 탈북 직후 3년 6개월간 '대성공사'에 갇혀 있으면서 수도 없이 북한 정보를 대한민국에 넘겼다. 간첩 누명을 쓰고 고문까지 당했지만, 남북 대치 상태에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성공사만 나가면 고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고, 북한 정보를 넘긴 데 대한 공도 인정받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그는 찬밥 신세였다. 여든을 넘기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대한민국에 이용당한 뒤 내팽개쳐졌다는 걸


김 씨는 "정부나 정보기관은 탈북자들을 보듬고 보호할 국민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는 도구쯤으로 본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김 씨뿐 아니라 <프레시안>이 만난 탈북자들은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탈북자들의 처지에 대해 한탄했다. 쓰고 버려지는 '소모품'. 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공통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었다. 


탈북자들은 어떻게 국가 권력의 노예가 되었나 


이들 탈북자들은 국정원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때로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무엇이 사실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서도 이들은 국정원을 따랐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탈북자 허위 진술의 피해자였던 유우성 씨는 탈북자들의 선택을 '두려움'으로 설명한다. "탈북자들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다음 간첩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유 씨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 한창일 당시, 매주 화요일 민변 사무실 앞에서는 탈북자들이 주최한 집회가 열렸다. 유 씨와 일면식 없는 탈북자들이 "유우성은 간첩이 맞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탈북자들은 밤 늦게 유 씨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유 씨는 "내 사건을 통해 탈북자들은 자신이 간첩이 아닌 증거를 내지 못하면 그대로 간첩이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라며 "탈북자들이 '유우성 추방'을 외치는 것은 '자신은 간첩으로 만들지 말라'는 신호를 수사기관에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이 통합진보당 해산을 주장하며 '종북 몰이'에 가담한 이유도 이런 틀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 씨는 "결국 남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탈북자들의 생존 본능"이라고 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발간한 2013 인권보고서도 김 씨 주장을 뒷받침한다. 인권보고서는 "합동신문 담당자들은 북한이탈주민을 잠재적 용의자로 간주한다"며 "무엇보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에 정착하게 되는 탈북자의 경우 항상 당국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되고 잘 길들여진 지극히 순종적인 '이등 국민'으로 전락한다"고 지적했다. 


"외롭고, 돈 없고, 나도 간첩 될까봐…" 


그런가 하면, <프레시안>이 만난 40대 탈북자 D 씨는 탈북자들이 국가 선전 부대에 편입되는 주요 유인책으로 ''을 꼽았다. D 씨는 "탈북자 열이면 여덟아홉은 선거 때마다 새누리당 찍으라고 전화하지만, 정치적으로 똘똘 뭉쳐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는 탈북자 단체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 경우 얼마간의 돈을 쥐여준다고 귀띔했다. "시위 같은 데 나가면 장갑이라도 하나 주고, 교통비로 쓰라며 용돈도 준다"는 것이다.


실제 한 탈북자 단체는 이명박 정부 시절,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고 조직적으로 인터넷에 정권 홍보성 글을 올린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뉴스타파> 2013년 8월 29일 자 "탈북자 조직 돈 받고 여론전 펼쳐" 보도에 따르면, 탈북자 단체 'NK지식인연대' 회원들은 지난 2009년부터 1년여 동안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사이트인 아고라에 글을 올리고 그 대가로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았다. 한 사람당 5만 원에서 40만 원을 지원받은 꼴로 한 달에 총 2000만 원 가량의 적잖은 돈이 지급됐다. 국정원, 군 사이버사령부의 조직적 댓글 사건에서 드러난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돈의 출처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단체 회원 중 한 명인 한 탈북자는 "배후에 국정원이 없으면 돈의 출처를 설명 못 한다"라고 말했다. 


D 씨 또한 돈의 출처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고 국정원 돈이 탈북자 단체로 흘러들어가는 것 아닌지 추측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시위에 참가하거나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혹은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탈북자들이 노동하지 않고도 용돈을 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남한 정착 초반에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다 보니 그런 식으로 쉽게 돈을 벌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소속감' 문제도 들었다. "남한에서 의지할 곳 없는 탈북자들이 탈북자 무리에 섞여 지내다 무리 내 탈북자들이 시위에 나가면 덩달아 따라간다"는 것. 그는 "뭐가 맞고 틀린지 분별이 없는 상황에서 휩쓸려 다니는 탈북자들이 많다"며 "외롭고, 돈 없는 탈북자들은 정부나 국정원에 기대기 마련이고, 정부나 국정원은 이런 탈북자들의 처지를 잘 이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3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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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가리고 | 작성시간 15.02.03 이인모씨와는 대조적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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