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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노르웨이 사미족 연구

작성자태허루|작성시간17.10.08|조회수2,211 목록 댓글 3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시상된다. 상식이 올곧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야만의 세상 속의 인권탄압이나 전쟁, 차별, 폭력은 절망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은 딱딱한 돌을 깨뜨리기 위해 설핏 미련해 보이는 행동을 감행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희망이다. 노벨평화상은 賞이 지니는 영향력으로 세상의 돌을 부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노르웨이에 바이킹의 후예들만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춥디추운 북쪽으로 올라가면 사미 族이 노르웨이인과는 판이한 방식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사미족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스웨덴과 핀란드, 러시아의 Kola 반도 등지에도 흩어져 있지만, 노르웨이에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한다. 이들의 수를 대략 75,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만, 수치상의 수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어떤 기준으로 사미족을 정의하느냐에 따라 수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17세기부터 끊임없이 이들을 따라붙는 동화정책으로 인해 순탄한 역사의 길을 밟지 못한 것도 게르만족과는 상이한 종족이라는데 닿아 있다.

사미족은 우랄알타이어족의 고유의 언어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파생어를 생성하는 특성을 지는 사미語들은 분석적(analytical)인 게르만語와는 달리 합성(synthetic)적이다. 서양인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인해 그려진 지도상의 국경의 개념과는 상관없이 사미어들은 다양하게 사용된다.
siida는 순록을 방목할 땅을 어떻게 배분하고 사냥과 낚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나누는 사미의 공동체이다. 각 siida는 독립된 지위를 누리며 공동체의 모든 생활을 담당한다. siidaisit는 siida의 추장으로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사냥에 대한 결정을 주도한다. 노동이나 경제적 분배는 siida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더불어 결정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사미족에게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투기의 수단이 아니라, 자립적인 삶과 가족 모두의 노동을 통한 생존에 목적이 있었다. 사미 집단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이 노동에 동원된다. 당연히 어린이의 사회화는 자연과 생존법에 관한 노하우를 쌓는데 모아졌고, 후세에 대한 교육은 일에 대한 어린 시절부터의 관여와 책임감에 집중되었다. 결혼적령기에 즈음하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배우며 세대를 이어갔다.
Sami Noaide는 강력한 정신적 힘을 소유한 이들로서 siidaisit처럼 활동했다. 이들은 구성원들의 영적인 문제나 고민을 해결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병 치료와 사회활동.이야기꾼으로서의 역할까지 폭넓게 담당했다. 사미족들은 동물과 야채를 약재로 사용했다.

살아있는 생태학적인 조화를 이루며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북부 노르웨이에서 삶을 이어간 이들의 평화는 이른바 문명사회의 접근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외부세계(노르웨이)의 정치와 사회환경에 깊숙이 영향 받을 수밖에 없는 약자의 입장에 내몰린 이들에게 17세기부터 '노르웨이化 동화작업'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초기부터 사미족들을 완전히 노르웨이化시켜야 한다고 맹렬하게 주장한 탐험가들이나 모험가, 선교사들과 사미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갈라섰지만, 역사의 흐름은 전자에게 실어졌다. 노르웨이인이 '합리성'이라는 미명 하에 현대적인(?) 농업경영과 자본주의적인 사적재산소유를 강요하자 사미족들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땅을 비롯한 자연을 인간탐욕의 재산으로 보지 않는 전통적인 사미문화와는 퍽 이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역'과 '세금'을 도입하는 것으로 인해 순록 떼를 광활한 고원에 방목해서 기른 뒤 고기와 가죽을 하나도 낭비하지 않은 채 성실한 땀과 소박한 삶으로 채워진 이들에게 차츰 식민지화는 찾아들었다. 1852년 벌어진 亂(?)도 전통적으로 술을 금한 사미족들에게 알코올을 음미하게 한 술수와 관련되어 있다. 1850년부터는 노르웨이어를 사미학교의 유일한 언어로 채택해서 사미어가 일상생활에서 사라지게 하기 위한 작업이 병행됐고, 20세기 중반까지도 이런 정책은 중단돼지 않았다.
노르웨이화 작업은 언어에서 출발해서 점차 농업정책과 국방, 교육, 통신, 미디어에 대한 규제로 이어졌다. 1902년에 가해진 토지령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의 자격을 노르웨이어를 구사할 수 있는 노르웨이시민으로 한정해버렸다. 다윈의 진화론적인 사고와 당시 부흥하기 시작한 민족주의는 사미족을 억압하는 또 다른 기재였다. 사미족의 고원에 잔뜩 흩뿌려져 있는 자원에서 돈을 건지고 싶었던 노르웨이의 이주민들과 군사력 행사마저 주저하지 않았던 민족주의적 감정은 문화적·인종적 다양성을 모조리 잡아 먹어버렸다.

1945년 이후 앞서 열거했던 만행들은 공식적으로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집요하게 심어진 상처들은 쉽사리 치유되지 않았다. 사미어가 심각하게 손상돼서 쓰임새 비중이 괄목할 만하게 줄어든 것 외에도 사미족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적잖게 흐릿해진 상태였다. 문제는 일단 빼앗긴 사미문화를 다시금 재생시키기 대단히 어려웠다는 데 있었다. 사미인들의 눈물겨운 저항과 시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48년 UN 인권규약이 제정된 뒤 그 짧은 문서에 담긴 메시지들은 사미족에게도 적용됐다. 문화적 평등을 제창한 시대정신이 노르웨이의회(Storting)의 사미정책에도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1956년에는 사미위원회가 결성되어서 의회에서 사미족에 대한 문제가 광범위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사미문화의 상징에 기여한 기관들은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적 기관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사미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이들은 몽상가나 이상주의자 혹은 극단주의자로 매도될 지경이었다. 1953년 스웨덴의 Jokkmokk에서 사미문제가 대두된 이후 노르웨이의 Karasjok에서 '북유럽 사미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Alta 논쟁'은 사미족과 노르웨이의 환경주의자들이 최초로 연대한 사건이자 사미문제에 노르웨이인들이 비로소 몸을 섞은 성격도 지닌다. 1970년대 수력발전을 위해 Finnmark에 대단위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되자 사미족들은 크게 분노했다. 강 위에 댐이 조성될 경우 사미족의 주요생활수단의 하나인 고기낚시에 치명적인 애로를 입게 되는 것과 순록 떼들이 자유롭게 방목하거나 새끼를 낳아서 기르는 고원 위에 길을 포장한다는 案은 사미족에게 재앙과 같은 사건이었다. 사미족은 댐건설현장과 노르웨이의회 앞에서 단식투쟁을 감행했고 사미 여성들은 수상 사무실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결국 댐은 이들의 투쟁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획대로 완공되었지만, 사미족의 문제가 지역 박으로 활발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사미족을 노르웨이로부터 분리시키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소수민족에 대한 폭력의 학살과 문화말살정책은 티벳트 등지에서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사미족은 가장 핍박받은 소수민족은 아닐 것이다. 영원히 사라진 듯한 사미문화를 재생해서 정성껏 가꾸고 고유한 사미족의 생존법을 현대적 테크놀로지와 결합하려는 움직임은 색안경을 끼고 봐도 그다지 위선적이지 않다.

1. 미디어
최초의 사미 신문은 1873년부터 1875년까지 발행된 Muittal gje였다. 이후 1956년에 Sagat라는 신문이 생겼고, 1979년부터 발행된 Sami igi는 Karasjok에 뿌리를 두고 발행되었다. 오늘날 사미어로 된 신문은 Min Aigi와 As s u가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잡지인 Ga ba,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 Leavedolgi, 젊은이들을 위한 잡지 S , 종교잡지 Nuorttanaste가 사미어로 발행된다.
사미어로 제작되는 방송은 1946년 NRK 라디오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방송들로 인해 사미어가 확산되는데 커다란 기여를 담당했다.

2. 사미 책 출판
1970년대부터 사미족에 관한 정체성을 담아서 출판하는 사미문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1976년 발간되었고, 사미 작가들은 Sami Girjeca lli Searvi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사미출판업자들은 사미교육위원회와 노르웨이 문화부 산하의 사미문화위원회와 친밀한 협력작업을 벌여나가고 있다. 오늘날 사미문학도 전성기를 누리고 있고 사미출판사인 J rg ddji는 10년 동안 무려 150권의 책을 출판했고, Davvi Girji는 40권의 책을 냈다.

3. 사미 문화 진작을 위한 노력들
사미문화를 진흥하기 위한 활발한 노력이 시행되고 있다. 사미문화유산은 문화의 날 행사나 시 낭송, 콘서트, 민속공예품, 문학, 그래픽 작품들, 연극 등에 반영된다. 사미 예술가들은 Sami Daiddagoveddas를 결성해서 서로의 이익을 돕는다. 사미 극단인 Beaivv s Sami극단은 사미의 구술 이야기 전통을 무대 위에 올리는데 성공해서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약속 받았다. Sami 정통음악인 Yoik는 재즈와 다른 나라의 소수민족의 전통음악과 결합하고 있는 수준이다. 작가 Nils-Aslak Valkeap 는 1981년 노르딕 위원회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 교육과 연구
1967년부터 사미어도 사미지역 학교에서 배울 수 있게 되었다. 1976년부터는 사미어와 노르웨이어를 둘 다 배우는 학제로 변경되었고, 사미문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학과정도 생기기 시작했다. 오슬로 대학교에서는 1948년부터 사미학과가 존재했고, 트롬쇠(Troms ) 대학교에서도 사미어를 배울 수 있게 됐다. 1989년에는 Kautokeino에 본격적인 사미연구기관인 대학이 설립되어서 특별히 교사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1974년에 Kautokeino에 설립된 노르딕 사미연구소는 여러 개의 사미연구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5. 사미 여성 단체
사미 여성들은 1988년 소수민족 여성이 지니는 특수한 열악한 사정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인 Sarahhka를 만들었다. 사미여성들은 아이를 양육하면서 문화를 계승하는 역할까지 과중하게 맡은 그네들의 이익을 전개시켜 나갔고 '세계소수민족여성위원회'를 설립하는데 혁혁한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노르웨이 정부의 성평등정책은 노르웨이的 나아가 서구적일 뿐이라며, 자기들만의 고유한 性정책을 펼쳤고 실제 사미족의 여성권한은 강력한 편이다.

6. 순록 산업
약 노르웨이 영토의 40%는 순록 방목을 위해 사용된다. 대개 이러한 방목은 Finnmark에서 이루어진다. 노르웨이 전체 경제상으로는 적은 규모에 불과하지만, 지역경제에서는 높은 영향력을 지닌다. 사미족은 무역에 관한 자율권을 행사한다. 순록 방목을 지속하는 권리는 전통적인 방식에 기초한다. 무역은 갈수록 자율성이 향상되고 있으며 많은 사안이 사미의회에서 결정되고 있다. 생태학적인 방법으로 순록을 방목하는 것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중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미족의 전통적 방목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7. 사미 어업 정책
생존을 지속하는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는 표르드(fjord)와 해안을 따라 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대개 낚시는 조그마한 배를 타고 표르드 주변에서 고기를 낚는 것이다. 이러한 어업과 농사는 사미족의 삶의 근간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동안 이러한 방식은 중단되었다. 왜냐하면 바다자원의 급격한 고갈과 일정수역에서 일정한 양의 고기만을 잡아야 하는 정부 시책과 결부돼 있다. 이로 인해 고기를 잡는 사미족은 급감했고, 이러한 현상은 위의 정책의 예기치 못한 결과인 셈이다. 정부는 이러한 사미어부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으로 대처했다.

8. 사미 지역 농업정책
사미 지역의 대부분 농촌은 다른 무역들과 사업들과 결합해서 운영된다. 농업은 오래도록 열려 있고 유연했다. 사미지역의 농사는 무역과 결합되는 것이 부족했고 노동시장에서 다른 벽감(壁龕)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농부들에게 제공했다. 사미전통과 함께 보존된 그러나 노르웨이 농업정책을 위한 주요한 장소로서 사미지역의 농업은 sectorisation과 완전고용의 목표로 조직되지는 않았다. 사미의회는 완전한 농업경영안을 1995년 완성했다. 여러 해 동안 사미의회는 주요한 산업의 문화를 지속하는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러 회의들에서 노르웨이의 농업기관들과 사미의회는 농업에서의 고용에 관한 관점을 공유하고 다른 주요한 산업들은 지역사회에게 중요성을 지속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사미족만의 전통방식을 후세에게 전파할 것을 강조했다.

9. 사미 건강과 사회 사건들 이슈
그들의 기관들에서 사미지역의 건강·사회활동가들은 사미 환자들과 소송의뢰인들의 상황을 강조했다. 사미 건강과 사회 이슈들은 1995년 공식리포트 "사미족의 건강과 사회복지를 위한 계획"과 함께 논의되었다. 이 리포트를 이행하는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다.

10. 사미 법령과 사미의회
1980년대에 위원회는 사미문화件들과 사미족의 권리에 대한 조사를 담은 리포트와 토론을 벌였다. 사미문화위원회는 1985년과 1987년 사미학교와 문화 이슈들 (사미언어령을 위한 제안을 포함한) 리포트를 발행했다.
사미족의 법적 지위에 관련된 노르웨이의 공식보고서는 사미의회와 다른 법적인 사건들을 담당한 안들을 포함한 보고서를 1987년 6월 12일 제출했다. 사미의회는 올라프(Olav) 5세에 의해 1989년 첫발을 내디뎠다. 사미언어의 사용을 위한 규제들은 1990년 의회에 상정되었고 1990년 발효되었다. 헌법 110a조항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사미족에게 언어와 문화, 생활방식을 유지케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책임이다." 이것은 사미족에게 노르웨이 국가의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안겨다준 사건이었다. 사미령은 같은 구체적인 규칙들과 함께 전문(前文)을 지녔다.
노르웨이는 사미족에게 관련된 여러 국제 협약에 서명했다. 이런 것들 중의 으뜸은 1966년 시민과 정치권에 관한 'UN 협약 27조'이다. 그리고 1989년 독립국가의 소수민족의 권리에 관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169조'도 포함된다.
사미권리위원회는 여러 개의 보고서들을 발행했다. 이것들은 현재의 법 위에 Finnmark의 땅과 물에 관한 운영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보는 것과 노르웨이의 원주민에 관한 것이었다. 사미문화를 위한 자연적인 기초에 대한 노르웨이의 공식보고서는 1997년 1월 발행되었다.

11. 사미의회(Sami Parliament)
사미의회의 본회의 기구는 39명의 선출된 지역대표들로 구성된다. 의회는 연중 4번 개최된다. 의회는 Karasjok에 본부를 두고 있다. 사미의회의원회는 매일 정치적인 활동들을 이끈다. 다양한 전문적인 권고기관들은 사미의회에 부속돼 있다. 예컨대, 사미문화기념위원회, 사미사업위원회, 사미문화위원회, 사미언어위원회 등이다. 그들은 사미위회를 위한 전문적인 기관들로서 기능하며 배당과 보조의 운영에 보조한다.
노르웨이 정치풍경 하에서 사미의회의 위상에 관한 지위에 관한 질문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사미의회의 주요한 의정활동 중의 하나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미족의 경제적인 권리옹호와 표르드 어부들의 북쪽에서의 지위에 관한 문제들이다. 사미의회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뿐만 아니라, 여성 프로젝트를 위한 특별한 계획도 담당하고 있다. 사미의회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정부와 협력해서 사미족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12. 多문화사회 속의 사미족
사미족은 多문화사회인 노르웨이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일들은 사미령의 규정의 제정과 접촉을 남아 있다. 사미위원회는 노르웨이의 사회시스템 안에서 지위를 성취해야만 한다. 그로 인해 사미족의 사회발전들을 위한 장소를 포함한 열쇠를 움켜쥔 활동가로 활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노르웨이의 역사학자인 Wenke Brenna의 기사를 참고해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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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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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태허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0.08 사미의 어원은 샤먼이랍니다.
    아시아계로 필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러시아 kola에
    분포해 살아갑니다.
    이들은 아시아에서 이주한 원주민들로 백인 이주이전에
    이미 정착한 민족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사유제산을 부정하고 자연을 공유하며 순록과
    낚시로 생업을 꾸려가는 민족입니다.
    노르웨이에서 이들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포기하게 하고 노르웨이 언어를 모르면 사유재산 배분에서
    열외하는 등 아메리카 인디언 말살정책에는 못미치나
    사미족을 노르웨이로 동화하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중인가
    봅니다.
    우리도 이와 유사한 진행이 눈에 띕니다.
    동해가 일본해로 서해가 황해로 그럼 조선은 없지요.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태허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0.09 반갑습니다.
    예! 어원을 밝혀보면 같은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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