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4월 14일 일어난 경운궁(慶運宮)은 화재는 일대 대사건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운이 완전히 뒤바뀐다. 화재 직후 러일전쟁, 을사늑약, 한일신협약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이어져 결국엔 대한제국은 재기를 하지 못하고 멸망한다. 경운궁 대화재는 궁궐측면에 봤을 때는 궁궐배치, 전각규모 등의 패러다임을 바뀐 전환점이었다. 화재 전후로 경운궁에 큰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문화재적 측면에 있어서 이때에 국보급 문화재들이 많이 소실된다.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중화전 등 궁궐의 핵심건물들이 소실된다. 특히 석어당, 즉조당은 경운궁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역사적인 건물로 이들의 소실은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중화전 역시 인정전 -> 근정전으로 이어지는 궁궐 정전의 계보를 이은 건물인데 이것이 소실됨으로써 구한말 대표적인 건축물이 사라졌다. 이후 재건된 단층의 건물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긴 하지만 중층건물이 갖는 위용을 갖추지는 못한다.

사실 경운궁 대화재는 빠른 대처를 했더라면 막을 수 있는 인재(人災)였다. 경운궁은 지리적으로 외국 공사관들과 인접해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각국 외국 공사들은 궁궐에 화재가 발생했음을 직감하고 재빨리 소방수들을 궁궐에 충돌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궁궐 문을 닫혀있었고 아무리 외쳐 봐도 안에서 열어주는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궁궐 문을 안 열어준 이유에 대해서는 아마 혹시 모를 변란의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을미사변과 같은 사건을 이미 겪었기에 외국인들은 궁궐에 들이는 것에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달려온 소방수들이 일본과 청국이었으니 이들에 대한 불신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미 근대적인 소방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정작 화재가 발생할 당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화재 발생 시 외국 공사 소속 소방수들이 도와주러 왔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아 결국 화재를 더 키우고 말았다.
결국엔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진다. 화재 당시 북동풍이 불었다고 하는데 함녕전에서 시작한 불길을 바람을 타고 곧바로 정전권역까지 미친다. 사태가 심각해져서야 외국의 지원을 받아들인다. 궁궐 내 한국병사들은 밖에서 대기하던 미국 경비병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궁궐 내 탄약을 옮겼다고 한다. 만약 탄약을 옮기지 못해 화약고에까지 불이 펀졌다고 어마어마한 대형사고가 날 뻔했다. 고종을 비롯한 황족은 평성문으로 빠져나와 경운궁의 서쪽 끝에 있는 수옥헌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이 피신하고 나서야 외국 소방수들이 궁궐에 들어가 화재 진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때 영국 소방수들은 재빨리 궁궐에 들어가 자신들이 담당하고 있던 석조전을 불길로부터 구해냈다고 한다.

고종이 수옥헌으로 피신하고 나서야 각국 공사들이 보낸 소방수들이 궁궐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영국 소방수들은 자신들이 건축맡은 석조전으로 달려가 이곳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을수 있었다. 사진은 영국 공사관의 경비병 모습이다.
대화재의 결과는 참담했다. 위에 언급했듯이 궁궐의 주요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각 전각에 소장되고 있던 많은 유물들이 없어졌다. 당시 궁궐의 금고도 불에 탔는데 다행히 음괴, 금괴, 은그릇고 같은 금속물은 그 특성상 화재의 피해가 덜했다고 한다. 그런데 종이류인 문서 특히 일본지페를 비롯하여 전통악기, 의복 등 많은 궁중유물들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이 피신할 당시 가장 먼전 챙긴 물건이 있다고 하는데 옥새와 사진 한 점이었다고 한다. 이 유물은 중화전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화재가 여기까지 번지자 다급히 가장 소중한 물건을 챙긴 것이다. 이때 사진 한점에 대해서는 사진 속에 대한 기록이 없어 궁금한데, 아마도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대한국새는 화재 당시 고종이 가장 먼저 챙긴 물건 중 하나이다. 국새는 당시 임금의 분신이자 국가의 상징물이었다.
국새와 함께 고종은 사진 1점을 챙겼다고 한다. 아마도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위의 사진은 공식적이지는 않으나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경운궁 대화재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단순히 궁궐 시종이 일으킨 인재라고 하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일단 화재 이후 함녕전 권역의 숙위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처결이 이루어 졌는데 고종은 형벌 등급을 1등급씩 감등했다고 한다. 고종도 화재의 배후가 다른 곳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십중팔구 그 주도세력은 일본이었을 것이다. 1904년 4월 당시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으로 궁궐 주변은 물론 한반도의 주요 거점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이 청일전쟁 전 을미사변이라는 궁궐 유린 사건을 일으킨 전적을 볼 때 이번에도 러일전쟁을 앞두고 궁궐을 유린한 것으로 보인다.

경운궁 대화재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 준비로 궁궐주변 및 한반도의 주요거점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화재의 범인은 일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화재직후 도성에는 괘서가 하나 돌아다녔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松林有變 虎尾先藏 靑龍之昔 寄位兩句’
송림유변(松林有變) = 송림(소나무 숲 = 궁궐)에 변고가 생긴다.
호미선장(虎尾先藏) = 호랑이 꼬리(궁궐 서쪽)에 숨는다. (수옥헌에 피신한 것을 지칭)
청룡지석(靑龍之昔) = 청룡(갑진년 1904 갑진달 4월)의 석(昔=21일)에
기위양순(寄位兩旬) = 창덕궁에 기탁한다. (양순은 순이 두 개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旬=日로 통한다. 곧 日이 두 개 있으니 昌이 되고 이것은 창덕궁을 의미한다.)
이런 괘서를 통해 대화재가 누군가 작정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의 동태까지 파악했으니 굉장히 치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화 직후 일본공사는 영국공사와 함께 줄곧 창덕궁에 이어할 것으로 고집했다고 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경운궁의 입지 상 제2의 아관파천과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창덕궁을 고집한 것 같다. 창덕궁은 상대적으로 도성의 구석에 있을 뿐만 아니라 후원도 있어 넓었다. 넓다는 말은 곧 그만큼 경비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일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종은 경운궁에 계속 기거할 것임을 천명한다. 화재 직후 자신의 내탕고를 털어 바로 중건공사에 들어간다. 이것은 당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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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이근명이 아뢰기를,
“즉조당이 불탔으니 더더구나 가슴이 아픕니다. 궁성 안이 모두 재가 되고, 나머지 집들의 한 쪽 모퉁이가 성한 채로 있기는 하지만, 어수선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폐하가 갈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물과 비용이 궁색하지만, 반드시 이 궁궐을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이윽고 경운궁중건도감을 세워 경운궁 복구공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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