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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한글날 특집]"한자는 우리 민족 동이족이 창제했다", 주운래 전총리의 양심고백-지나족이 동이족을 한반도로 몰아내고, 한자가 동이족(한민족) 문자인 증거

작성자한반도홍익인간|작성시간18.10.09|조회수3,413 목록 댓글 10

법관련 행정관련 분야는 일제의 쪽어가 상당히 많다. 일제 병참시대에 뿌려진 적폐용어는 한글로 순화시켜 

갈아버려라. 특히 법관련 용어들 우리말로 다 바꿔라...

국가공무원 시험에 국어를 뺀다는 다문화 외노자불체자난민 사대주의 정부 국어대신 영어를?

민족의 혼을 팔아 먹는 행위?  이게 나라냐? 세종 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굽어 보고 있다.

역사에 충신은 아닐지라도 죄인은 되지마라! 권불 십년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역사는 그들을 평가할것이다.

 

언론방송에서 앞장서서 외래어를 남발하고 듣봅잡 외국인들 내세워 방송 하는것부터 고쳐라...

요즘 방송만 틀면 가장많이 나오는 말... 유명인사, 연예인들, 아나운서들이 앞장서서 사용하더군요?

주체성 없는 다문화주의 사대주의자들 국어 공부좀 시켜서 내보냈으면... 펙트, 케어, 디테일, 비주얼, 엣지,

컨셉, 힐링, 레시피, 케미, 드립, 퀄리티... 이런말 좀 제발 쓰지 좀 마라!

연예인 언론인 방송인들부터 반성좀 하고 요리사를 세프니 머니 좋은 우리말 두고 왜래어로 왜 바꾸는지

사대주의에 빠진 어리석은 인간들....

 

오래전 동북공정 때문에 중공 짱깨시댕들이 난리칠때 당시 기득권권력층들, 정치인쓰레기들, 사학자들이

중공짱깨 심기 건드려 좋을거 없다고 저자세로 비비던 시기 지나고... 그후에 노무현정권 때인가 중국 역사

학자랑 한국 기레기 언론사와 역사학자들 대담할때 한자 문제로 이러쿵 저러쿵 좀 시끄러울 무렵이었는데

한국 언론기레기가 중국 역사학자에게 한자가 중국꺼인데  한국 내부에서 말이 많타고 뭐라뭐라하니까 중국

역사학자가 했던 말이.... 한자가 동이족 문자였는데 무슨말 하냐고? 해서 당시 한국 기레기가 벙쪄서 오히려

부정하는 동북공정등 식민사관 동조하는 친중친일식민사관 개 버러지들과 한국 기레기 언론들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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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특집] "한자는 우리 민족 동이족이 창제했다"

"한자는 앞으로 고한글 또는 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불러야"

 

“(중국 고대국가인) 하(夏)·은(殷) 시대를 소급해 볼 때, 중국인과 한국인이 국경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마치

장벽을 쌓아 갈라놓은 것처럼 전혀 다른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일반상식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한자 창제에는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東夷族)이 깊숙이 관여했다.”

한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한자가 중국만의 글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자를 우리 민족인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고(故) 진태하 전국한자교육총연합회 이사장이

가장 대표적인 학자다. 진 이사장의 ‘동이족 한자 창제설’은 중국에도 소개돼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자의 연원은 동이족 문화권”

한자는 중국의 한족이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대략 서기전 3세기경부터 한자를 차용해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 이사장을 비롯한 동이족 한자 창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이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의 사학자 왕옥철(王玉哲)은 “한자의 연원은 ‘대문구문화시대(大汶口文化時代)’로 소급된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사학자 장문(張文)은 “대문구문화는 동이족 문화며, 이후 용산문화(龍山文化)로 발전해 마침내 갑골

문자를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진 이사장 역시 “중국 섬서성 서안의 반파유적지에서 발굴된 도기 위에 새겨진

유의부호를 연구한 결과, 한자의 연원은 대문구문화보다 약 200년 앞서는 대략 6000년 전 앙소문화에서 시작

된다”고 발표했다. 즉, 한자는 동이족의 문화인 앙소문화, 대문구문화, 용산문화 등을 거쳐 약 3400년 전의

은대 갑골문으로 발전한 문자라는 것이다. 또한 은대의 갑골문은 고대 여러 부족 중 황하 이북의 북방민족인

동이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동이족은 고대 중국에서 우리나라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진이사장은 “국어사전에

동이(東夷)에 대해 ‘옛날에 중국 사람이 자기들 동쪽에 있는 한국, 일본, 만주 등의 나라나 종족을 멸시하여

일컫던 말’이라고 풀이해 놓았고, 모든 자전(字典)에 ‘이(夷)’에 대해 ‘오랑캐 이’라고 대표 훈음을 달아 놓았다”

며 “그러나 중국 후한시대의 문자해설서《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동이족을 ‘큰(大) 활(弓)을 가진 사람’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이족이 곧 우리의 조상인 줄도 모르고 ‘夷’를 ‘오랑캐 이’라고 칭함은 제 조상을 스스로 욕하는 결과가 되었

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夷’는 앞으로 ‘큰활 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고대에

있어서 동이 지역은 한반도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산동을 중심으로 한 일대였음을 먼저 올바로 인식

해야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바로 알 수 있다”면서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가 중국 흑룡강·송화강·요하를 중심

으로 한 만주벌, 요동벌이며, 한반도로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황하 유역으로 진출해 한자를 비롯한 황하문명의

주역으로 활약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자에 동이족 문화 반영돼”

한자에 동이족의 고유문화가 반영돼 있다는 것 역시 동이족 한자 창제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한 예로 ‘집 가’

(家)를 살펴보면, 지붕() 아래 돼지(豕)가 사는 것을 집이라고 했다. 집 안에 돼지가 있다면 그 뜻은 ‘돼지우리’

가 돼야 하는데 사람이 사는 집의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그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동이족 한자 창제설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옛날 파충류가 번성하던 시대에 뱀을 방어하는 일이 큰 고민이었다. 이때 우리의 조상 동이족은 뱀의 천적이

돼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돼지가 둔해 보이지만 뱀만 보면 한입에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독사

라도 돼지를 만나면 도망도 못 가고 잡혀 먹힌다. 우리 조상들은 여기에 착안해 집 밑에 반드시 돼지를 길렀다.

돼지의 똥냄새만 맡아도 뱀이 절대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편안히 잘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집 안에

사람은 없어도 되지만, 돼지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집’이란 글자를 만들 때 집 안에 돼지를 그리게 된

것이다. 제주도에서 근래까지도 화장실 밑에 돼지를 기른 것은 고대에 집 밑에다 돼지를 길렀던 풍속이 이어져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할 연(然)’ 역시 마찬가지다. 然은 고기(肉), 개(犬), 불(火)로 구성된 글자다. 즉, ‘개고기를 불에 그슬려

먹어야 맛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개고기를 그슬려서 먹는 민족은

동이족밖에 없었으므로, 이 역시 동이족 한자 창제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자(漢字)는 한(漢)족의 글자라는 뜻이다. 동이족 한자 창제설을 주장해 온 학자들은 한자의 명칭부터 고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진이사장은 “한자라는 명칭은 한대(漢代)에 한족에 의해 만들어진 문자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한자는 한대는 고사하고 진(秦)과 주(周)대를 소급해, 한(漢)의 건국으로부터 약 1400년 이전

은(殷)대에 이미 문자가 매우 발달히 쓰였음을 알 수 있다”면서 “앞으로 한자라는 명칭은 대내적으로 고한글

(古韓契), 대외적으로는 동방문자(東方文字)라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https://news.v.daum.net/v/20181009100001573?d=y

 

 

주운래 전 총리의 양심고백-지나족이 동이족을 한반도로 몰아내고|

 

 

http://cafe.daum.net/song20080701/3jUK/41?q=%EB%8F%99%EC%9D%B4%EC%A1%B1&re=1

http://cafe.daum.net/khankorea/6DZW/107

 

 

 

[스크랩] 한자가 동이족(한민족) 문자인 증거

 

1) 2008년 10월 22일, 갑골문자보다 1000년 앞선 골각문자 발견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346996

 

4000 ~ 4500년 전 추정 … 동이족 문자 가능성

 

 

중국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甲骨)문자보다 1000년이나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문자가 발견됐다.

갑골문자는 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된 이후 중국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아 왔다.

산둥(山東)대 고고미술학연구소 류펑쥔(劉鳳君) 소장이 최근 중국 고고학 관계자들을 초청한

세미나에서 갑골문자 이전에 다른 형태의 골각(骨刻)문자가 산둥성 창러(昌樂)현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1일 보도했다.

 

류 소장은 중국 고고미술학의 창시자로 학계의 명망이 깊은 학자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회과학원 왕위신(王宇信) 교수 등 은상문화협회(殷商文化協會) 관계자 5명은

모두 류 소장의 학설에 동의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세미나에서 이 문자는 ‘창러골각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류 소장은 산둥성 민간 소장가인 샤오광더(肖廣德)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창러현 지역 주변에서

수집한 수백 개의 골각문자를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류 소장에 따르면 이들 도안은 소의 어깨뼈와 사슴·코끼리 뼈에 새겨져 있었다.

도안의 형태는 다양했다.

뼈 한 곳에 100여 개의 서로 다른 도안이 새겨진 것도 있고, 1~2개의 도안만 새겨진 뼈도 있다.

여러 개의 도안은 세로로 정렬돼 있어 특정 사안을 기록한 문자로 봐야 한다는 게 류 소장의 주장이다.

단순한 그림일 경우 이처럼 정렬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점복(占卜)기록인 갑골문자와 달리 골각문자에선 점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류 소장은 “뼈의 색깔과 석화(石化) 상태를 판단해 볼 때 문자를 새긴 연대는 4000~4500년 전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산둥성의 룽산(龍山) 신석기 시대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함께 출토된 뼈로 만든 칼과 송곳은 전형적인 룽산 중·후기 시대의 도구들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시 산둥 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소장은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고 지적했다.

류 소장은 이어 “안양(安陽)을 중심으로 한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20세기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갑골문자 발견이었다면

이번 골각문자 발견은 중국 역사를 지금보다 1000년 이전으로 돌리는 21세기 중국 고고학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chkcy@joongang.co.kr

 

2) 골각문자, 은허(은나라) 갑골문자 유적지를 유전자 지도에 표시

위의 오른지도에서 골각문자와 은허갑골문자가 발견된 위치를

아래 유전자 지도에 표시하면 산동반도 부근이며, 초록색 원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한반도 인종과 같은 북방몽골계 거주지역 입니다.

농경사회의 인종분포도, 농경사회의 고향은 뿌리를 내리고 살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북방몽골계가 골각문자와 갑골문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구분선 아래 빨간 동그라미들은 북방에서 내려온이 아니라 남방에서 올라온 화하족(한족) 입니다.

 

 

3) 갑골문과 한자

한겨레신문 / 2000.12.04.

 

`한자는 처음 동이족이 만들었다'

 

한자를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그 발생과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다.

중국이 창조자로 알려져있지만 한민족인 동이족이었다는 주장도 종종 제기돼왔다.

한반도 주변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는 김성재(46)씨는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을 남긴

은나라 사람들은 바로 동이족의 일파였다”고 주장하는 고대사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주장을 다시 풀어 쓰면 한자는 중국인이 만들지 않았으며,

놀랍게도 중국에서 동이라고 부르는 한민족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수년에 걸쳐 집필했다는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동녘 펴냄)에는 자칫 무모하게

보일 수 있는 이런 주장을 단호히 펴는 이유와 논거가 700여쪽에 걸쳐 빼곡히 담겨 있다.

 

그가 펼치는 논리는 이렇다.

한반도 남쪽 김해 땅의 수로왕 뒷산에 출토되는 글자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은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 그리고 일본에까지 분포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서만주 발해만 북쪽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곳은 바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또 지금의 한자 꼴은 발해만 지역과 산동반도에서 먼저 나타났다.

그곳은 당시 중국 민족의 뿌리인 화하족의 영역이 아닌 '고조선의 영토였다'.

 

발해만 북쪽 홍산문화 토기에 새 발자국 모양의 글자 등 상형문자가 선연히 남아있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고조선 지역의 빗살무늬 토기와 청동 거울 뒷면의 복잡한 기하학 무늬들도 단순 문양이 아니라

글자이거나 글자의 변형이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한자를 우리 민족만의 창작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한자의 구조로 볼 때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글자꼴을 갖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선조들이 한자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한국상고사 논쟁에 그 맥이 닿아 있는 듯하다.

 

먼저 영토 문제인데, 동이족의 활동무대가 산동성을 포함한 하남성 동남쪽 등에까지

광활한 지역에 이른다는 학설이다.

또 갑골문자가 맨 처음 동이족의 땅에서 나온다는 것도 그의 주장에 연결된다.

 

최초의 농경신인 신농씨가 동이족이며,

<한비자> 등의 문헌 기록에 따라 동이족인 순임금이 산동성 역산에서 흑도문화를 일으키고

역시 동이족에 의해 건국된 은나라가 이를 계승한 것도 같은 논리다.

이런 이유로 채색토기 등에 새겨진 기호가 발전해 갑골문자의 원형이 되었고

이는 또 한자의 기원인 동이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국내 상고사 연구의 최대 논쟁 가운데 하나인 한자 기원에 대한 이런 주장은

고고학적 연구와 문헌학적 고증 절차를 통한 논증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중국쪽의 역사축소에 가로막혀 그다지 큰 진전을 보지 못해온 것이 그동안의 사정이었다.

지은이는 갑골에 숨겨진 고대사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1700자에 이르는 한자의 연원과 시대별 변천 과정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했다.

여기에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들을 꼼꼼히 훑는 정성을 아울렀다.

작은 단락마다 동굴 벽화와 갑골문, 유물 사진 등 다양한 시각 자료들을 실어 흥미를 더하고,

학술용어가 아닌 이야기체로 서술해 역사소설처럼 읽히는 맛을 낸 점도 책의 특징이다.

4) 고조선의 석관묘 분포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갑골 출토

한반도와 산동반도, 요하, 간도에서 출토된

갑골이란 무엇인가?

갑골, 복골,

갑골문자: 갑골에 새겨진 문자

 

 

 

갑골 출토지는 고조선의 석관묘 분포 지역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조선의 석관묘 분포 영역과 골각문자, 초기 갑골문자 발굴

5) 홍산문명(발해연안문명)의 갑골 연대와 분포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홍산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결국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은 홍산명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라 보면 됩니다.”

(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점복신앙과 갑골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형구 교수가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에서 찾은 이유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그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부여, 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신라의 경우엔 아예 왕과 무(巫)가 동일시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 기록을 보자.


“(2대)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이 말하길) 방언에 이르길 무(巫)라 일컬었다.

세인들이 귀신(조상을 뜻함)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이를 두터이 공경하고,

존장자를 칭하여 자충(慈充)이라 했다.”


그런데 ‘차차웅’ 혹은 ‘자충’을 방언으로 ‘무(巫)’라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자음으로는 차차웅(츠츠슝)이나 자충(츠충)이 매우 비슷하다.

또 점복의 목적과 결과를 말하는 ‘길흉(吉凶·지슝)’과도 유사하다.

길흉의 한자음을 표음해서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하지 않았을까.”

(이형구 교수 ‘문헌자료상으로 본 우리나라 갑골문화’ 논문 중에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龜何 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유명한 내용인데, 이 교수는 “끽(喫)자는 구워먹겠다는 뜻이 아니라

점복에서 불로 지지는 행위를 뜻하는 계(契)자가 와전됐거나

가차(假借)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불변을 뜻하는 계(契)자는 갑골에 새긴 문자 혹은 불로 지져 터진 곳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헌만 있고, 증거가 없으면 모든 소용인가.

고고학 자료를 보자.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룬(西拉木倫) 강 유역인 네이멍구 자치구 바린쭤치(巴林左旗)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공반되었다.

연대는 BC 3500~BC 3000년이었다.

이 연대는 중국ㆍ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허베이(河北)ㆍ허난(河南)ㆍ

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ㆍ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츠펑 즈주산(蜘蛛山)ㆍ야오왕먀오(藥王廟) 유적, 닝청(寧城) 난산건(南山根) 유적,

베이뱌오펑샤(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이 유적들의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은(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 즉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無字甲骨)이었다.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재미있어요.

발해 연안에서 갑골 재료로 주로 쓴 것은 사슴과 양이었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거든.

이것은 시대와 사회가 농경사회로 급속하게 변했음을 알려주는 거지.

또 하나 홍산문명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런데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가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형구 교수가 81년 처음 논문을 쓸 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시대와 고훈(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문명문화권인데….”


그런데 ‘병중 논문’의 초고를 완성,

‘고궁계간’에 송고한 뒤, 81년 가을 귀국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 교수에게 한 편의 보고서가 전달됐다.


“이 교수가 좋아할 대목이 이 보고서에 있어요.”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건넨 것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였다.

이 교수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지.

그 보고서에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복골의 존재가 있었거든.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

지금도 20만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출처] 경향신문

6) 골각문자, 갑골문자는 북방몽골족 고조선의 신성한 문

 

골각문자와 갑골문자는 남방에서 올라온 화하족(한족) 기원이 아니라 북방몽골족 문자입니다.

갑골문자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골각문자는 신성한 문자,

 

제가 전에 丹이 가진 뜻을 말씀 드렸지요?..

丹은 화하족이 아닌 한민족과 조상님들이 사용한 문자입니다.

 

丹: 하늘에서 붉은 덩어리가 우묵한 곳에 떨어진 모습을 상형화

 

한자에 대해서 함부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성한 골각 문자,

 

http://cafe.daum.net/revelation1/Hdhe/20626

http://blog.daum.net/wssong9/601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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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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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새날 | 작성시간 18.10.09 주은래가 지나족이 동이족을 몰아냈다는 것도 낭설입니다...
    지나족의 실체가 없읍니다...
    지금 중국에도 우리 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죠...

    삼국시대 이전 고조선시대로 부터 조상을 따지게 되면,
    수당은 흉노계로 고조선의 일파이니,
    부여계 직속인 고구려 백제와 고조선으로 회귀하게 되면 같은 고조선을 구성하던 세력들이죠...
    명을 건국한 주원장도 고구려 고려계의 같은 동이계입니다...

    중국역사 자체가 동이족 역사인데,
    지나족이 어디 있읍니까...

    중국의 역사는 고조선 직계인 부여계와,
    고조선 방계인 흉노계와의 투쟁의 역사입니다.

    주은래의 저 발언도 현 중국의 조상과 우리조상이 다르다는,
    국가분리 정책의 일환이지요..
  • 답댓글 작성자안드로메달 | 작성시간 18.10.09 정답 같습니다.
  • 작성자은하철도99콘 | 작성시간 18.10.09 주은래 저양반도 그당시 위치 때문에 저런 거짓을 약간가미 하였지요 .. 주은래의 본처 를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안중근의 친어머니가 동네 처녀중에 참한 사람을 주은래에게 중매를 해주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 작성자안드로메달 | 작성시간 18.10.10 검은머리 검은눈 황색피부의 동방종자는
    여러 종내기가 아니고 하나죠.
    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토탈유대와 서세가 천년동안
    우리 동방종자들을 역사조작하고
    갈라치기 햇을 뿐이죠.
    살아남은 상류층들과 그 부속 씨종내기들만
    입다물고 떠나는 조건으로
    목숨부지에 이동 허락 시켜준거 같고요.
    가까운 조상의 뼈만 대충 챙겨온거 같고
    그래서인지 왕의 무덤다운 무덤이
    단 하나도 없죠.
    말이 왜 다르냐 ?
    언어는 일이십년 시행해서
    몇십년만 강제해도 깔끔하게 바뀌죠
    그러나
    천년을 그랫는데도 동방종자 언어는
    아직도 본류는 그대로죠.
  • 작성자강촌인 | 작성시간 18.10.10 많고 많은 사람중에
    진태하요

    이양반 대중이 시절에 한자 쓰자고
    개거품 문 놈인데
    말도 안되는 논리로
    웃기네
    그 두둥이로 동이족을 팔아
    이 인간 논리대로라면
    초딩들 지금 한자 땜에 죽길끼여
    말세가 되니
    별 잡것들이 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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