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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참 "北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 발사…700km이상 비행"/이란의 미사일과 조선, 정태현 글/유로 팔아 엔화 산 미국

작성자파랑새7|작성시간26.08.12|조회수302 목록 댓글 6

http://cfile294.uf.daum.net/image/995439465D932434025CB2:,:위 내용을 삭제하지 마세요!! (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출처: https://cafe.naver.com/sisa33/39753

 

출처: https://youtu.be/SwOtdDkoCLQ

유로 팔아 엔화 산 미국. 대체 얼마나 간당간당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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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논평#738] 대문사진: 유튜버 '새덕후'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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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슨황 700조 토큰 유동화(야바위)/ 이란 종전 ‘증시 Bull Trap’/ 트럼프 개콘, 발 빼는게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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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학당 215] 우크라 전쟁, 막바지 혼선 // 양 진영 무기 지원 극대화, 븍한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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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둘러싼 국제 정세 분석과 러우전 전황분석을 매일매일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자발적 후원: 신한은행, 110-233-569690, 최기영 email: roskor0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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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거면 이란이랑 왜 싸웠나… 트럼프 결국 무릎꿇은 진짜 이유 | 진재일 교수 1부
@scoop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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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참 "北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 발사…700km이상 비행" / 연합뉴스TV (Yonhapnew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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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geopolitics-two-jrh5.vercel.app/blogs/section-3/26-8-12

이란의 미사일과 조선, 정태현 글

최근 이란의 미사일 역사가 궁금해 조사하던 중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김일성 주석과 이란 혁명수비대 장교들이 함께 서 있었다. 그 중에는 훗날 ‘이란 미사일의 아버지’로 불린 하산 테헤라니 모가담이 있었다. 정확한 촬영 날짜와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진 속 인물이 테헤라니 모가담이라는 설명과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이란 군사대표단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흑백 사진 속 맨 아래 줄 오른쪽 첫 번째가 모가담이다.

사진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지만, 때로는 공식적인 문서보다 역사와 시대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사진은 1980년대 이란과 조선이 그저 무기를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두 나라 사이에는 무기 이전, 생산시설 건설, 기술자 파견, 군사훈련, 전후 개량을 포괄하는 장기 협력의 틀이 형성되고 있었다.

오늘날 이란의 미사일 창고와 지하 저장시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맞서 전쟁의 형세를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이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비해 공군력과 위성정찰, 원거리 정밀타격 능력에서 불리하다. 그러나 미사일을 분산 배치하고 지하화했으며, 발사대와 생산시설을 여러 지역에 나누어 두었다. 한 곳이 공격받아도 전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구조로 만든 것이다.

미국의 공습에도 이란의 미사일 창고는 파괴되지 않았고, 이란은 계속해서 상대의 군사기지와 주요 시설을 타격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비용과 위험의 문제로 바꾸어 버렸다.

그 배경에 1980년대부터 이어진 조선과 이란의 협력이 있었다. 이란 미사일의 모든 기술이 조선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란의 독자적인 연구와 중국, 러시아를 통한 기술 접근이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란의 액체연료 탄도미사일 계열을 조사하다 보면 스커드와 로동 미사일, 그리고 조선의 생산기술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전쟁에 맞선 미사일 국가 이란의 미사일 개발은 이라크와의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전쟁 경험에서 출발한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군사적으로 고립됐다. 1979년 11월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란의 자산을 동결했고, 무기와 군수품에 대한 수출을 차단했다. 1980년 9월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했을 때 이란군은 지휘체계와 장비, 부품 공급망 모두 불안정했다. 혁명 직후 기존 군 장교들이 숙청되었고, 보유한 미국산 전투기와 무기의 정비에 필요한 부품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에 반해 이라크는 소련과 프랑스 등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스커드 미사일과 프로그 로켓을 이용해 이란을 공격했다.

이란은 처음부터 탄도미사일을 보유한 국가가 아니었다. 1985년 3월 12일 새벽 3시 20분, 이란은 리비아 기술자들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 키르쿠크 인근을 향해 처음으로 스커드-B 미사일를 발사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이란은 모두 117차례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란의 첫 미사일 공격은 군사적 효과만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가 이란의 도시를 공격하면 이란도 이라크 도시를 공격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전투기와 공군기지를 갖추기 어려운 나라가 상대의 후방과 도시를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고, 탄도미사일은 그 공백을 메웠다.

그러나 리비아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란이 리비아와의 약속대로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리비아는 지원을 끊었고, 이란이 보유한 스커드의 일부를 무력화하려 했다. 이란은 다시 미사일을 확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하산 테헤라니 모가담이 등장했다.

테헤라니 모가담은 리비아에서 들여온 스커드를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미사일의 구조를 이해하고, 부품을 조달하며, 발사체를 다시 작동시키는 기술을 조직했다. 외국에서 완제품을 구입하는 단계에서, 자국 내 생산과 개량을 추구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데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리고 이란은 1987년 1월 11일 외국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조선이 핵심적인 공급자로 등장했다. 1987년 이란은 조선으로부터 약 100기의 미사일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미사일들은 이란-이라크 전쟁 말기에 사용되었다. 전쟁 기간 이란은 조선으로부터 스커드-B를 비롯한 무기와 부품을 공급받았고, 조선은 이란으로부터 외화와 원유를 확보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스커드에서 키암으로 조선과 이란의 미사일 협력은 완제품 수출에 머물지 않았다. 이란은 조선에서 들여온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동시에 생산기술을 습득하려 했다. 이란은 조선의 화성-5호를 수입했고, 이라크와의 전쟁에 사용했다. 동시에 생산기술도 이전받았다. 이란이 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은 이때였다.

1983년 양국이 탄도미사일 개발 상호지원 협정을 체결했다는 자료도 있다. 이란은 조선에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장비를 지원했고, 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스커드 계열 미사일의 생산과 개량을 추진했다. 1984년 조선은 스커드-B를 복제·개량한 화성-5호 발사에 성공했고, 1987년부터 생산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은 화성-5호 약 100기를 구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란은 조선이 제공한 미사일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았다. 이란의 지리와 작전환경에 맞게 개량했다. 스커드-B의 사거리는 약 300㎞, 스커드-C의 사거리는 약 500㎞로 평가된다. 이란은 사거리와 탄두, 발사체 구조를 개선하면서 미사일을 자국의 군사체계 안에 편입했다.

1990년대 초 조선은 이란에 스커드-C와 이동식 발사차량을 추가로 제공했다. 브루스 벡톨 교수는 조선이 1994년까지 이란에 약 200기의 스커드-C를 공급했고, 이후 이란과 함께 이란 내 스커드-C 생산시설 건설을 추진했다고 분석했다. 해당 시설에는 조선산 부품과 기술지원이 계속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생산기반에서 나온 대표적인 개량형 미사일이 키암이다. 키암은 스커드 계열의 기술적 뿌리를 이어받았지만 이란이 자체 생산체계와 작전 요구에 맞춰 개량한 미사일이다. 사거리 800㎞ 안팎의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평가되며, 이란은 이를 지하 저장시설과 이동식 발사대에서 운용해 왔다.

키암의 중요성은 제원이나 외형이 아니다. 그 의미는 이란이 더 이상 미사일을 외국에서 구입하는 국가가 아니게 됐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완제품과 기술을 들여왔지만, 이란은 생산시설을 세우고 부품을 국산화하고 운용 경험을 축적했다. 조선의 기술 이전이 이란 내 군수산업의 출발점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 과정에는 기술자 파견도 포함된다. 조선과 중국은 1997년 100명이 넘는 기술자를 이란에 보내 탄도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능력을 지원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 주장의 세부 내용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이란이 생산시설 건설과 제조공정 확보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설계도 한 장만으로는 미사일 기술이 완성되지 않는다. 연료를 혼합하는 공정, 엔진을 주조하는 방법, 밸브와 펌프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기술, 유도장치의 오차를 줄이는 방법, 이동식 발사차량을 운용하는 절차가 종합적으로 필요하다. 미사일을 구매해 운용하는 것과 미사일 산업을 보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조선의 역할은 완성품 제공을 넘어 이란에 그 산업적 기반을 세우는 데 있었다.❙ 로동에서 샤하브-3로 1990년대 후반부터 양국 협력의 중심은 스커드 계열에서 로동 미사일 계열로 옮겨갔다. 조선은 1993년 5월 29일 로동 1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조선 정부는 이 발사를 핵 문제와 관련된 정치적 신호로 활용했지만, 군사기술과 수출 가능성을 시험하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이란과 파키스탄 대표단이 시험을 참관했다. 이란 대표단은 그해 3월 평양을 방문해 탄도미사일 협력과 로동 미사일 문제를 논의했다.

로동 미사일은 사거리 약 1,000㎞급의 중거리 탄도미사일로 분류된다. 미국과 서방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은 1990년대 후반 이란에 로동 미사일 약 150기를 이전했다. 이란은 이를 샤하브-3이라는 이름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FDD 보고서는 조선이 이란의 첫 핵탄두 탑재 가능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로동-A의 개발과 이전에 관여했고, 이란이 이를 샤하브-3으로 생산했다고 평가한다. 샤하브-3는 이후 이란의 액체연료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우주발사체 개발의 기반이 되었다.

샤하브-3와 로동 미사일 사이의 유사성은 외부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지적해 온 부분이다. 최근 분석에서도 샤하브-3 계열인 가드르와 에마드가 조선의 로동 미사일에 직접 기반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란의 샤하브-3는 로동 미사일의 직선적인 복제품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란의 독자적인 개량을 거쳤다.

이란은 샤하브-3의 사거리와 정확도를 높였다. 추진체계와 유도장치를 보완했고, 탄두의 무게와 형태를 조정했다. 가드르는 샤하브-3의 사거리를 늘린 파생형으로 개발됐다. 에마드는 종말 단계에서 기동할 수 있는 재진입체를 적용해 명중 정확도를 높이려 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가드르와 에마드를 조선 미사일의 복제품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기술적 출발점은 조선에 있었지만, 후속 개발은 이란의 연구자와 생산체계가 담당했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서방 언론은 이란 미사일을 흔히 ‘조선제’라고 부른다. 반대로 이란은 모든 성과를 자국 과학자들의 독자적 업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양측 모두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 이란의 액체연료 중거리 미사일은 조선의 로동 계열 기술과 생산기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란이 20년 넘게 추진체계, 유도체계, 탄두, 제조공정을 개량해 온 것도 사실이다. 초기 기술 이전과 현재의 생산능력을 구분해야 한다.

미국 재무부의 제재 기록은 양국 협력의 물적 흔적을 보여준다. 2007년 미국 재무부는 이란의 샤히드 헤마트 산업그룹(SHIG)이 담당한 샤하브 계열 중거리 미사일이 조선이 설계한 로동 미사일에 기반하며 중국과 조선의 지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2009년과 2013년 제재 발표에서는 조선광업개발무역회사, KOMID와 SHIG 사이의 탄도미사일 거래가 언급됐다. 단천상업은행이 금융거래를 뒷받침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2016년에는 SHIG 관계자들이 이란 주재 KOMID 관계자들과 협력했고, 액체연료 탄도미사일과 우주발사체 지상시험에 이용될 수 있는 밸브·전자·측정장비의 선적을 조율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 자료가 보여주는 사실은 미사일 한 기가 국경을 넘어갔다는 점이다. 즉, 설계와 부품, 금융, 운송, 시험장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움직였다는 뜻이다. 서방의 제재는 이 네트워크를 차단하려 했으나 이란과 조선은 회사 이름을 바꾸고, 중개업체를 이용하고, 거래 경로를 우회하며 대응했다. 국제 금융망을 장악한 미국은 모든 거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현실 세계는 미국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무수단과 액체연료의 계보 2000년대 초에는 무수단 계열을 둘러싼 의혹도 제기됐다. 조선의 무수단 미사일은 옛 소련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R-27 계열 기술과 관련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란의 호람샤르 계열 역시 R-27 기술과 연결된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로동-샤하브 계열보다 공개된 증거가 부족하다.

조선이 2005년 이란에 무수단 계열 미사일을 제공했다는 주장은 언론에서 반복되었으나 정확한 수량과 이전 방식, 이란이 실제로 어떤 설계와 부품을 확보했는지 알기 어렵다. 이란의 호람샤르가 무수단의 직접 복제품인지, 같은 계통의 기술을 토대로 이란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인지도 전문가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처럼 양국 미사일 협력의 역사는 사실과 추정이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부분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전체적인 흐름을 부정할 수는 없다. 1980년대 스커드-B와 화성-5호, 1990년대 스커드-C와 생산시설, 1990년대 후반 로동과 샤하브-3, 이후 가드르와 에마드로 이어지는 이란의 미사일 계통은 여러 보고서와 제재기록, 군사전문가 분석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란 미사일 전체가 조선의 영향이라 설명해서도 안 된다. 고체연료 미사일은 별도의 계보를 가진다. 이란은 1990년대 중국의 공식적 지원과 이후 중국 기관을 통한 기술 접근을 바탕으로 고체연료 추진체계와 관련 생산능력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란의 고체연료 중거리 미사일인 헤이바르 셰칸과 일부 기동형 미사일은 이란 과학자들의 독자적인 성과로 평가받는다. 군사 전문가들 역시 조선과 이란의 연계가 가장 뚜렷한 분야는 액체연료 미사일이며, 고체연료 계열에서 조선의 직접적 연계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란 미사일의 역사는 세 갈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첫째는 조선의 스커드와 로동에서 출발한 액체연료 탄도미사일이다. 둘째는 중국과 러시아를 통한 기술 접근과 협력이다. 셋째는 이란 자체의 연구개발과 전쟁 경험에서 나온 고체연료·정밀유도체계다. 이 세 요소가 결합해 오늘날의 이란 미사일 전력을 만들었다.❙ 지하 창고와 새로운 전쟁 이란의 미사일은 기술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전쟁 교리의 산물이다. 이란은 1980년대 이라크의 미사일 공격을 경험했다. 테헤란과 이란의 주요 도시가 공격받았고, 시민들은 대피했으며, 전쟁의 공포가 사회 전체를 흔들었다. 이란 지도부는 그때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다시는 미사일 없는 국가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이라크 미사일 공격 당시 이란이 방어할 수단을 갖지 못했던 경험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미사일을 억제력의 핵심으로 보았다. 전투기와 해군에서 미국과 경쟁할 수 없다면, 미국의 기지와 동맹국을 미사일로 위협해 전쟁의 비용을 높이겠다는 계산이었다.

미국 FDD의 2023년 보고서는 이란이 중동에서 가장 큰 탄도미사일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21년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케네스 매켄지는 이란의 미사일 보유량이 종류에 따라 3,000기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FDD 보고서는 2015년 핵합의 이후 2022년까지 이란이 최소 228회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우주발사체 발사를 진행했다고 집계했다. 그 가운데 단거리와 중거리 체계의 시험·훈련·실전 운용이 함께 포함됐다.

이 숫자는 미사일의 질을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란이 한두 개의 시험용 미사일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생산과 저장, 이동, 발사, 재보급이 가능한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은 보여준다. 이란의 미사일은 이동식 발사차량에 탑재돼 위치를 바꾼다. 일부는 산악지대와 지하터널에 보관된다. 발사기지와 생산시설을 여러 곳으로 분산해 한 번의 공습으로 전체 전력을 제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최근 미국의 공격에 이란이 미사일로 반격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박을 상쇄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공군기지와 항공모함, 정찰위성, 장거리 폭격기를 갖고 있다. 이란은 그에 맞서 미사일의 숫자와 분산, 은폐, 이동성을 이용한다. 미국이 이란의 핵시설이나 군사기지를 공격해도 이란이 미사일을 보존하고 있다면, 미국의 공격은 전쟁의 종결이 아니라 보복의 시작이 된다.

미사일 창고는 이란의 ‘두 번째 공군’과 같다. 전투기는 발진기지와 활주로, 정비시설, 조종사가 필요하다. 미사일은 지하에 숨겨둘 수 있고, 발사 직전까지 위치를 노출하지 않을 수 있다. 고정된 공군기지와 달리 이동식 발사대는 탐지와 파괴가 어렵다. 이것이 이란이 미국의 압도적인 공군력에 맞서 버틸 수 있는 이유다.

물론 미사일은 전쟁을 결정적으로 끝내는 만능무기가 아니다. 미사일은 요격될 수 있고, 정찰과 지휘통제망이 파괴되면 효율이 떨어진다. 탄두의 파괴력과 명중률, 발사 준비시간, 재고량도 중요한 변수다. 이란의 미사일 공격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방공망을 완전히 무력화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미사일이 상대의 군사기지와 항구, 에너지시설, 지휘시설을 위협하는 한, 미국은 전쟁을 끝낼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란의 미사일 전략은 정치적 효과를 얻는다.❙ 멀리 있으나 가까운 두 나라 이란과 조선은 지리적으로 멀다. 한 나라는 서아시아에 있고 다른 나라는 동북아시아에 있다. 종교와 언어, 역사적 경험도 다르다. 이란은 이슬람혁명을 거쳤고 조선은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를 세웠다. 두 나라는 같은 체제를 가진 국가도 아니다.

그러나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맞서 자주권과 군사적 자립을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두 나라는 가깝다. 미국은 이란을 제재했고 조선을 봉쇄했다. 미국은 이란의 무기 구매를 막았고 조선의 미사일 기술 수출을 차단했다. 그러나 그 압박은 두 나라의 접촉을 끊지 못했다. 오히려 서로의 필요를 확대했다.

이란은 조선으로부터 스커드와 로동 계열 미사일, 생산기술과 기술자 지원을 얻었다. 조선은 이란으로부터 외화와 원유를 얻었다. 이란은 조선의 기술을 자국의 군사환경에 맞게 개량했다. 조선은 이란과의 협력을 통해 미사일 산업의 외부 시장을 확보했다. 양측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고, 동시에 상대방의 능력 향상에 기여한 상호의존 관계였다.

냉정하게 국제정치의 현실을 바라보자. 미국과 서방은 자신들의 미사일과 폭격을 ‘억제’와 ‘방어’라고 부르면서, 이란과 조선의 무기에는 ‘위협’과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미국은 세계 곳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도, 제재를 통해 상대 국가의 방어수단을 제거하려 한다. 국제법은 강대국의 폭력에는 '질서'라 부르지만, 약소국의 저항에는 '처벌'을 이야기한다.

이란과 조선의 미사일 협력은 그 이중기준 속에서 형성되었다. 두 나라가 자주와 자강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외부의 군사보호에 의존하면 언제든 무장해제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란에 미사일 없는 국가의 비극을 가르쳤다. 한국전쟁과 이후 지속적인 미국의 핵위협은 조선에 독자적인 국방력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오늘날 이란의 미사일 창고에서 발사되는 샤하브-3, 가드르, 에마드, 키암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1980년대 평양의 군수공장, 테헤란의 지하 생산시설이 함께 나타났다. 그곳에 김일성 주석과 이란 군사대표단의 만남이 있었고, 이란 미사일의 아버지 테헤라니 모가담의 젊은 시절이 있었으며, 미국의 봉쇄를 뚫고 부품과 기술을 옮긴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있었다.

이란과 조선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누가 국제질서를 만들었고, 누가 무장할 권리를 독점했으며, 누가 타국의 방어능력을 위협으로 규정해 왔는지를 묻는 일이다. 미국의 일극패권은 군사기지와 제재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세계 곳곳에서 자주국들이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협력망을 만들고 서방에 맞서고 있다. 이란과 조선은 그 첫 줄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출처: https://youtu.be/EiDFKKUG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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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종전 조건 제시. 미국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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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극화로의 길 격변의 국제정세 손정목 통일시대연구원 원장 류경완 코리아국제평화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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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소장님] 일본이 독도를 노리는 진짜 이유 #김태형 #ㅆㄷㄱ #독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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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이란 미국 잔치는 끝났다? 트럼프 대형사고 100신 정책 바꾼다//중국 에너지 전쟁? 타일러 선생 리뷰//미국 사는 분들 안보면 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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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jajusibo.com/70693

역사서사시 한미관계 150년⑦ 여순사건과 6.25 전후 학살

고승우 민언련 고문 | 기사입력 2026/08/11 [20:15]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 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 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 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한라산이 거대한 무덤이 되어 갈 때
송요찬의 서슬 퍼런 포고령이 나왔다.
“제주 해안선 오 킬로미터 밖의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
제주의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던
1948년 10월 19일 밤 .
바다 건너 여수항의 병사들에게 명령서가 왔다.
“제주로 가라.
제주 형제들을 총으로 쏴라.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자들을 진압하라.”
지창수를 비롯한 하사관 등 제14연대는
분노하며 거부하고 총을 잡았다
“동족을 죽이러 갈 수 없다.
조선의 아들이 조선의 아들을 겨눌 수 없다.”
그 거부는 봉기가 되었고
그 봉기는 곧 이름 싸움이 되었다
누군가는 반란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항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름이 달라져도
그날 피어난 것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무엇이 나라인가
무엇이 군대인가
무엇이 양심인가
출동 거부의 함성은 새벽어둠을 찢는
횃불이 되어 남녘땅을 흔들었다.


여수 시민들이 곧 상황을 이해하고 환호했다
경찰서는 점령되고,
여수의 밤은 혁명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20일 새벽이 밝자 14연대는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 한다.”
그들의 요구 또한 명료했다.
“동족상잔 반대, 미군 철수.
토지개혁과 친일파 숙청.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여수 시민 수천 명이 모인 인민대회가
결의문을 발표했다.
“친일파를 몰아내라.
민족반역자를 청산하라.
토지를 농민에게.
식량을 굶주린 자에게.”
창고가 열려 쌀이 시민들에게 배급됐다.
인민위원회가 다시 서고
여수는 거대한 항쟁의 바다가 되었다.
순천 시내도 순식간에 봉기군의 손에 넘어가
세관과 우체국, 모든 관공서가 점령되었다.
봉기의 불길은 여순에 이어 벌교, 광양으로 번져갔다.


10월 20일 오전.
서울의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가 모여
봉기는 신속히 진압되어야 한다고 결의할 때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 진압하라”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미국의 냉전 논리에는
최소한의 양식도 없었고
미군 장교들은 진압작전에 직접 동행했다.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설치될 때
그 자리에는
미국인 고문들이 함께했고
한국 진압군에 합류했다.
대전, 전주, 부산, 대구에서 한국군 11개 대대가
박격포, 장갑차와 함께 왔다.
경비정과 경비행기까지 왔다.
육군과 해군과 공군의 합동작전.
군 역사상 최초였다.


10월 22일까지 전라남도 37개 시·군이
봉기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제14연대는 세 개의 편대로 재편되어
서쪽 벌교, 북쪽 학구, 동쪽 광양으로 진출했다.
초기 진압에 밀리자 정부는
10월 25일 여순지역 계엄령을 통과시켰다.
대통령령 제13호
그러나 계엄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법 없이 선포된 계엄, 그것이 바로 폭력의 본질
계엄 아래에서 군은
‘즉결처분권’을 행사했다.
그것은 어떤 법적 근거도 없는
권력이었으나
군인들은 그것을 학살의 면죄부로 삼았다.


이승만이 담화를 발표했다.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어떠한 법령이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
그 말은 담화가 아니라
수많은 죽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백운산과 지리산, 웅석봉으로
반군들이 퇴각하고
진압군이 휩쓸고 간 여수와 순천에서
군과 경찰은 모든 시민을
학교 운동장으로 오게 했다.
남녀노소 불문, 갓난아기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어야 했다.
운동장 한쪽에는 참수대가 설치되었다
도끼와 칼, 그리고 나무 블록
법정도 없고 판사도 없고
오직 증오와 공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반군 색출이 시작됐다.
기준이 있었다.
손바닥에 총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
흰 지까다비를 신은 자.
군용 속옷을 입은 자.
흰 고무신을 신은 자.
흰 고무신은
인민위원회가 배급한 것으로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이 죽음의 표식이 됐다.
손가락질 한 번 또한
‘손가락 총’이 되고
학살자에게 즉결심판 판결문이 되었다.
우익청년단원과 밀고자들이
군경에게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판이 없었다.
변호가 없었다.
증거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결정했다.
죄가 없어도 지목되면 죽음이었다.
그것이 1948년의 정의였다.
그것이 미군사고문단이 지원한
진압작전의 정의였다.
부역자 색출은 1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한 달 반 동안 운동장은
매일 인간도살장이 되었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모였고
저녁에는 시체들은 수레에 실려 나갔다.


군법회의는 광주와 대전에서 열려
수천 명의 혐의자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처리’되었다.
변호인은 없었고
증인은 없었고
진실은 없었고
오직 유죄 판결만 있었다.


여순과 주변 지역의 땅은 시체로 숲을 이루고,
바다는 핏물이 되었다.
정부 조사관이 파견되어
여수, 순천,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1949년 1월 10일까지의 피해를 조사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인명 피해 총 5,530명
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


가옥 피해 8,554호
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


재산 피해 추정액 99억 1,763만 395원
그 시대에 그 액수는 천문학적이었다.
구호가 필요한 사람 6만 7,332명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숫자일 뿐
진실은 훨씬 더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들이
땅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다.


여순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자
이승만은 군대를 청소했다.
숙군이라 불렀고
4,749명이 축출됐다.
전군의 5%.
광복군 출신들과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 사라졌다.
양심 있는 장교들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박정희.
여순사건과 연루됐지만
숙군 작업에 적극 협조했다.
살아남아 18년간 한국을 지배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윤석열 등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여순사건이 끝난 지 두 달 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반민특위가 구성된 지 두 달 만이었다.
친일파를 처벌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지자마자
친일파를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
11만 8천 명에게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여순사건이 그 법의 자궁이었다.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는 법.
동족을 적으로 만드는 법.
70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국보법은 온 나라의 입과 귀를 막는
거대한 사상적 감옥을 완성했다.
“한 하늘 아래 두고는 같이 살 수 없는 짐승들.”
언론과 문인들은
제주, 여순 봉기군과 그 조력자들을
‘귀축(鬼畜)’이라 부르며
인간의 범주에서 지웠고,
이 잔혹한 ‘절대 악’의 프레임은
곧 국가적 반공 체제의 주춧돌이 되었다.
제주와 여순 등에서 시작된
동족 학살의 광기는 남녘산하를
무차별의 초토화 지옥으로 만들었다.
정치권력은 이념을 민족에 우선하는
반역사적 냉혈한이 되어버린
비참한 역사는
더 거대한 비극으로 흘러갔다.


1980년 5월 광주에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소속 군인 아무도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시민들이 죽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여수의 병사들은 거부했다.
제주 형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1948년 10월의 14연대는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했다.
거부는 그냥 반란이 아니었다.
거부가 인간이었다.
그날의 여수와 순천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기쁨이 찢기고
냉전의 칼날이 한반도에 꽂힌
비명 중 하나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누가 총을 들었는가?
누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가?
두 질문은 얼마나 더 오래 남아야 하는가?
여수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순천의 새벽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사이를 떠도는 이름 없는 영혼들이
오늘도 바람 속에서 묻고 있다
나라란 무엇인가?
양심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사람으로 남는가?


이승만과 미국에 의해 자행된
즉결심판과 학살의 피 바닥 위에
또 다른 시대가 세워졌다
전쟁이 왔고 반공의 깃발이 더 높이 올랐고
의심은 법이, 법은 폭력이 되었고
폭력은 다시 질서라는 옷을 입었다
보도연맹과 거창의 이름 아래
6.25 전쟁 속에서 같은 종류의 비극이 번져갔다
학살은 단발이 아니었다.
학살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한 번의 명령이 다음 명령을 낳고
한 번의 침묵이 다음 침묵을 낳았다
죽은 자는 이름을 빼앗겼고
살아남은 자는 고통 속에 침묵했다.
빨갱이의 자식
반란자의 집안
그런 말들이
무덤과 함께 오래 남아
피해자들의 삶을 두 번 죽였다


그러나 산과 바다는 기억하고
무덤 없는 죽음들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흙은 입을 열었고
바람은 결국 기록이 되었다
묻힌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회는 뒤늦게 이름을 불렀고
국가는 뒤늦게 사과의 문턱 앞에 섰으며
희생자들은
겨우 사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어
여순사건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2021년 6월 29일
21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여순사건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의 진실을
밝힐 첫 계단이 만들어졌다.
사건 발생 73년 만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침묵중이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https://geopolitics-two-jrh5.vercel.app/blogs/section-0/26-8-12

과거의 친일과 현재의 친일, 친일을 소비하는 방식, 배우 하영과 대통령 이재명의 경우

하영이란 배우의 조부가 친일이었느니 아니니가지고 소란스러운 것 같다.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는 한국최초의 양의사로 고종의 어의를 지냈다고 한다. 하영이 자신의 집안이 4대째 의사가문이라고 자랑하면서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이력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안상호라는 인물의 행적은 복잡한 것 같다. 일본 의사들에 대항해 조선 의사들의 집단을 만들기도 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일본인처럼 행세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영의 조부인 안부호는 전남대 의과대학 교수를 지내면서 한센병 연구와 치료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하영이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면서 증조부의 친일문제까지 드러나게 될지는 몰랐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배우의 조상이 친일을 하면 비판을 받지만, 현재 정권과 대통령이 친일을 해도 비판을 받지 않고 오히려 칭송을 받는다. 배우 하영이 증조부 문제로 비판을 받게 되는 과정은 현재 한국사회의 공적 담론이 사실상 붕괴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영의 발언이 소셜 미디어 세계에서 퍼지면서, 한국의 역사학계가 하영의 증조부의 친일 행적을 추적했으며, 이에 대해 소재원이란 작가가 하영의 증조부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이 과정에서 경향신문과 같은 언론도 비판에 동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영의 소속사가 유감을 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이란 휘발성이 강한 주제다. 그런데 하영이란 배우의 증조부가 친일의 의혹이 있다고해서 이렇게 난리를 피워야 할 일일까? 하영이 증조부의 친일문제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증조부가 이렇게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조부가 한센병 치료를 위해 헌신한 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영 문제에 대해 소재원 작가는 강력하게 비판을 했고, 박유하는 이런 친일행각 비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소재원과 박유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만 보고 다른 한쪽은 보지 않는다. 인간이란 원래 인간이란 복잡한 존재다.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초지일관해서 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떤 인간을 평가할때는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안상호란 인물은 반민족적 친일행각을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한일합방이후 일본의 지배에 완전하게 순응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소란과 비난의 원인을 제공한 한국 역사학계에도 문제는 있다고 본다.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은 반드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인식에 바탕해야 한다. 하영 조상의 친일문제보다 우리의 삶에서 더 심각한 것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소위 진보정권과 진보세력이 떠 받들고 있는 이재명 정권의 역대급 친일 외교행각이다. 역사는 현재적 인식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의 역사학계가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당대사적 관점에서 현재 이재명 정권의 역대급 친일 행각에 대한 비판에 열을 올리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소재원이란 작가는 이슈를 찾아서 자신의 이름값을 올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고, 박유하는 친일문제만 나오면 친일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그런 관점에서 친일을 부정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작가라면 인기를 위해 이슈를 따라가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박유하는 스스로 학자라고 하면서 항상 반쪽의 증거는 무시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학자라고 한다. 스스로 학자라고 말하려면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박유하가 비판받는 것은 그녀가 가치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영 배우의 증조부 문제를 보면서 한국사회의 천박함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된다. 하영이 증조부의 문제로 사과를 해야 할 일인가? 한국에는 여전히 연좌제가 작동하고 있다. 자신도 잘모르는 증조부의 말로 인해 사실상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영을 비판하는 것은 빨치산의 자식을 비판하는 것이나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과거의 친일 문제에 입을 닫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학계라고 한다면, 그리고 학자라고 한다면 어느정도 균형감각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주장을 혹세무민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따져 보자. 이재명의 친일이 더 심각하고 우려스러운 문제인가, 아니면 하영의 증조부 친일 문제가 더 심각한가. 우리의 현재 삶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과거의 행적에 미친것처럼 달려드는 한국사회는 분명 건강하지 않다. 마치 과거의 친일을 소환해서 현재 이재명 정권의 친일행각을 지워버리려는 아주 못된 짓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영의 증조부를 비판한 목소리인 소재원이 더불어민주당과 일정한 연관이 있고, 경향신문이 문제를 부각했기 때문이다. 그럴 정성이 있으면 현재 이재명 정권의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나 비판하는 것이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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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인향만리 | 작성시간 26.08.12 new
    8월12일 일어날 천문현상들...

    한반도 하늘엔 어둠 속 별빛 쇼가...
    서방 하늘에는 대낮 개기일식이...ㅎ

    앞으로 지구에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지...ㅎ
    천문과 우리의 삶의 관계...

    하늘의 천문현상에 대한 탐험이
    삶에서 과학,철학,문화로 이어져 온...

    https://youtu.be/DY1cZ6OpSgM?si=6pRIo6HfzRPsW2CQ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 작성자인향만리 | 작성시간 26.08.12 new 태풍이
    대놓고 한반도를 차별한다? ㅋㅎ

    지난 3년간 태풍경로....
    https://youtu.be/Xh0I4OBavRA?si=6UHbjqV3cTbRuBFy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 답댓글 작성자인향만리 | 작성시간 08:38 new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인간을 도우셨다는 우리 옛적...^^

    하늘이 보우하사?...ㅎ
    이번엔 일본을 희귀한 역주행으로 통과하며
    순해진? 태풍이 심한 가뭄으로 힘든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비를 내려주실듯 ㅎㅎ
  • 작성자이방인 | 작성시간 05:53 new 여순 학살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인향만리 | 작성시간 17:15 new 푸틴이 처음으로 쿠릴열도를
    직접 방문해 러시아 함대를 순찰했군요
    북한은 동해로 새?미사일을 발사하고요.

    일본극우의 전쟁가능국가 움직임과
    미국의 일본을 활용한 전쟁 리스크를
    감안한 사전 경고용인지...

    물밑에서 전쟁리스크가 실제로
    높아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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