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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살아있다

작성자초롱박|작성시간11.02.19|조회수309 목록 댓글 2

[국제] 이집트는 살아있다


 

2011.02.14.월요일

파토

 

 

 

 

 

요르단에서였다. 숙소에서 다음 행선지가 이집트라고 하자 주인 아저씨가 정색을 하며 잔뜩 겁을 주는 것이다.

 

이집트는 요르단과 달라. 사람들이 점잖지 못해

무슨 말이죠?’

바가지도 심하고 사기도 많고아무도 믿지 말아요.’

, 그런 건 인도에서 많이 겪어서 나름 대비가....’

인도보다 더 해. 도와주는 척 하다가 이용해 먹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게…’

 

이너넷을 뒤져봤다. 과연 그랬다. 이집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 치고 호의를 가장한 기분 나쁜 일을 겪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여자들은 성추행에 가까운 일들도 흔해 빠졌다는 거다.

 

의아했다. 적어도 내 머리 속의 이집트의 이미지는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4천년 전의 영광까지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류 최초의 위대한 문명을 일군 이들이다. 그 내공의 일단이라도 사회 곳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저렇게 주변 아랍국들에게서 조차 3등국 취급을 받고 멸시 받을 정도라니.

 

사실 요르단에 도착했을 무렵에 우원은 지쳐 있었다. 직전에 한달 반 동안 여행했던 네팔과 인도는 멋진 곳들이지만 여행객이 다니기 쉬운 나라들은 아니다. 생활의 불편함과 다양한 형태의 위험, 끝없는 호객과 바가지가 들끓는 터라 한시도 긴장을 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거길 벗어났나 싶었는데, 이집트에서 또 그것들을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지겨웠다...

 

그렇다고 그 동네까정 가서 이집트를 안 갈 수는 없는 일. 30년간 벼려왔던 기자(Giza)의 대피라밋이 거기 있고, 왕가의 계곡과 이집트 박물관(이번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타르히르 광장 바로 옆인 이 곳의 이름은 국내 보도와는 달리 카이로 박물관이 아닌 ‘Egyption Museum’이다) 도 있다. 아무리 불편하고 호객에 시달리고 사기를 당한다 한들 이집트를 빼놓고 간다는 건 곤란하다.

 

그래서 요르단 아카바에서 배를 타고 이집트 땅인 누에이바로 들어갔다. 이어 버스를 타고 모세와 그 백성이 40년 걸려 건넌 시나이 반도를 8시간만에 주파하며 카이로에 도착했다.

 

우원의 루트는 지도 중간 우측 Taba에서 Tamad Nakhi서쪽 아프리카 대륙 방면으로 빠져 나가는 직선 경로다지도 맨 아래 Sharm 이라고 적힌 곳이 샤름 알 셰이크로, 유명한 관광지이자 현재 무바랔이 도주해 있는 장소.

 

그리고는 조금씩, 그 숙소 주인 아저씨가 말한 게 뭔지 느끼게 됐다. 현지인들도 많이 가는 곳은 덜했지만 관광지 주변의 상황은 실로 인도를 뺨치는 면이 있었다(지난번 피라밋 방문기에 지나가듯 소개한 바도 있다). 화려한 카이로 다운타운의 불빛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찌들어 있었고, 호객과 바가지를 넘어 몇 푼 안 되는 돈에 비굴한 모습마저 보였다.

 

머 그런 건 인도나 네팔도 마찬가진데 굳이 이집트만 따로 문제 삼아야 하냐라는 항의가 있을 수 있다. 근데 이게 좀 다르다. 인도와 네팔이 가진 역사와 문화적 특성 때문이다.

 

그 두 나라는 세상 어떤 나라보다도 종교적 영향을 포괄적으로 받고 있는 땅들이다. 근데 이슬람이나 기독교 같은 일신교 국가들과는 달리 힌두교와 불교 등이 뒤섞여 있어 문화와 세계관이 열라 복잡하고 여기에 영국 식민지의 잔재, 근대적 가치들이 뒤섞이고 충돌하는 혼란상이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한 성스러움과 가난으로 인한 끝없는 절망, 이를 벗어나기 위한 약삭빠른 현실주의의 계산이 마구 뒤엉켜 있다.

 

그래서 사기를 쳐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사회 전체 분위기가 원체 바깥 세상과 이질적인 만큼 여행객이나 관광객도 일차 접고 들어가게 된다는 거다(물론 인도와 네팔의 사회 문제도 심각하기 그지없으며 종교나 전통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자).

 

그러나 이집트는 다르다. 인도나 네팔보다는 훨씬 정돈된 현대 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고, 사우디나 이란 같은 정교일치의 신정체제도 아니다. 인도같이 너무 커서 정리가 안되거나 네팔처럼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개발 자체가 어려운 한계를 갖고 있지도 않다. 거기에 인도인들이 움찔할 만큼의 깊은 역사를 보유하고 있고, 세계 최장의 나일강을 갖고 있으며, 이에 기초한 관광자원의 깊이와 수준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지리적으로도 지중해에 연해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의 교두보적 위치에 있고 이를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활용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국제적으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수에즈 운하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경제적으로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으로나 적어도 중진국 대열에는 포함되어야 할 조건의 나라라는 말씀이다. 근데도 GDP 2천불 대의 빈국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이웃 요르단도 4400, 중국도 이젠 4200불이고 심지어 북한도 1400불인데.

 

참 못난 나라 아닌가…?

 


고백하자. 우원은 현대 이집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앞서도 말했듯 굳이 악명 높은 이집트에 간 것도 고대 유적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목적뿐이었다.

 

아 물론 위에서 이야기한 상식 수준의 정보나, 낫세르, 사다트, 무바라크로 이어지는 통치의 흐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깊이 들여다 본 적도, 그래서 이집트인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는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30년간의 비상계엄 같은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우원에게 기회주의적이고 비뚤어져 보이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이해될 리 없다. 그래서 다니면서 계속 군시렁거렸다. 머 이런 나라가 있어. 도대체 사기꾼 아닌 넘이 없냐. 이 넘들은 수치심도 없나.

 

그들의 얼굴은 자주 슬퍼 보였고 미묘한 열패감마저 흘렀다. 때로 허망한 호언장담과 과장된 쿨함을 드러낼 때는 더 그랬다. 지치고 또 이집트에 대해 무지했던 우원은 그게 이 사람들의 민족성인 줄만 알았다. 수 천년 전 융성했던 문명의 그림자에 눌려 살아가면서 이렇게 됐구나. 명예심도 자존심도 상실해 버린, 그림자 그 자체가 되어 버렸구나.

 

그런 느낌 때문에 인도나 네팔, 아니 우원이 가 봤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싫었다. 타흐리르 광장을 몇 번이나 걸어 지나다니면서도, 혹시라도 누가 친한 척 하면서 말이나 걸까 봐 조마조마했다. 보나마나 사기꾼이나 호객군일 것이기 때문이다. 광장 옆에 붙은 작은 공원에 들어가기도 싫었다. 여행객인 나를 돈으로만 볼 듯한 그들의 눈길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속물적이고 자긍심 없는 사람들. 여행객이나 관광객 등쳐서 돈 뜯어먹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 ‘아무도 믿지 마라는 요르단 아저씨의 말은 우원의 좌우명이 되었고, 그만큼 실제로 아무도 안 믿었다.

 

하긴 딱 한 사람, 예외가 있긴 했다. 룩소르의 숙소 옆 작은 슈퍼마켓의 젊은 주인이다. 여행객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일쑤인 관광지였지만 그는 모든 물건들을 정직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팔았으며 언제나 친절했고 진지했다. 하루는 내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이집트에 대해, 이슬람 국가에 대해 편견이 많은 거 압니다. 실제로 문제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 그런 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집트의 문화와 이슬람의 기본 교리가 적힌, ‘한글로 된 작은 책자를 내게 건네 주었다.

 

시간 나면 꼭 읽어주세요.’

 

우원은 숙소로 돌아가 그 두 책자를 다 읽었다. 내용이 궁금했다기 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어서였고, 이집트라는 땅에서 신실한 사람을 만난 게 반가워서였다. 그러나 그 뿐이다. 세상에 예외란 있는 법이고, 이집트에 대한 내 생각이 그런 한두 예외로 바뀔 건 아니니까.

 

그리고는 11월 말, 우원은 룩소르에서 터키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집트여 안녕. 피라밋도 봤으니 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인류 문명의 발상지를 떠나는 우원의 마음은 씁슬했다.

 

 

2010 12 31, 우원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팽개쳐 놓은 일들을 수습하고 남겨 놓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며 정신 없는 한 달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소식이 들려온다. 튀니지에서의 민주화 시위, 이집트로 확산.

 

그렇게 싫었어도 나름 밟고 다닌 땅이라고 생판 모르는 곳에 비해서는 관심과 애정이 생겼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오는 것은 적당히 하다 말겠지하는 냉소적인 생각이었다. 속물적이기 그지 없는 그들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들이 강력한 독재 정권을 상대로 얼마나 싸울 수 있겠냐.

 

그러나 우원의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가기 시작한다. 내가 돈독 오르고 비굴한 속물이라고 느꼈던 이집트 사람들, 그들이 생업을 전폐하고 수십만 명씩 거리에 나오는 거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아스완불과 두어 달 전 우원이 매일같이 돌아다니던 타흐리르 광장은 어느덧 민주화의 성지가 되어 있었다.

 

체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십,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허나 그들은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교활하고 자기 이익밖에 모르는그 사람들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있었다. 차선도 지키지 않고 쓰레기도 아무데나 버리던 사람들이, 동지의 죽음을 목도하는 분노 속에서도 질서와 비폭력의 원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1 1일 알렉산드리아 콥트 기독교 교회 테러로 수십 명이 죽은 종교 반목의 나라에서, 꾸란과 십자가를 들고 함께 서서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우원은 깨달았다.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긍심이 높은 사람들이 너무 오랜 세월 압제에 비틀리고 억눌려서 그렇게 되고 만 거였다. 그리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각성의 기회가 주어지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간 거다.

 

역시, 5천년 대문명의 내공은 마냥 증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이집트에서 스치고 지나간 사람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카이로 숙소의 청년 사장, 건너편 슈퍼마켓의 무뚝뚝한 아저씨, 우원이 커피포트를 샀던 타흐리르 광장 옆의 전자제품 가게 주인, 룩소르 숙소 홍반장, 그 옆의 정직한 슈퍼마켓 주인, 마차 몰던 아저씨, 팁 달라고 조르던 열차 차장, 우원을 꼬여 말 타게 만들려고 했던 대피라밋 호객 아저씨, 공짜 선물이라며 물건 안기고 결국 돈 뜯어내려던 얄미운 청년들.

 

그들은 시위에 참여했을까? 혹시 다치거나 죽은 건 아닐까와중에 우원이 피자 사먹은 타흐리르 광장의 피자헛이 불탔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렇게 우원은 이집트 혁명의 열렬한 심적 후원자가 되었다. 제발 이겨라. 물러서지 마라. 군이 이상한 기미를 보일 때는 불안했고, 물러난다는 소문이 돌았던 무바랔이 퇴임을 거부했을 때는 대량학살로 이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저,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이 작은 응원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미안한 마음도 함께.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였다. 이집트는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다. 이로 인해 관광산업이 무척 발달한 나라고, 따라서 북한처럼 폐쇄된 곳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집트인들은 외국에서 오는 돈 많은 관광객들을 매일 접하며 그들과 스스로를 비교할 수 밖에 없다.

 

지난 30년간, 영미나 유럽은 물론 우리처럼 못살던 나라조차 선진국 대열에 다가서는 것을 보면서, 아직도 빈국의 형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국의 현실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의 선진국들과 지척에 있으면서, 유럽 문명의 모태인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 지혜를 전파한 당사자였던 그들. 그러나 30년간의 계엄, 부패와 압제, 독재와 억압, 가난과 멸시 속에서 자긍심도 명예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일인당 GDP 2700달러, 그나마 빈부 격차가 극심해 작년 일반 노동자의 월급은 고작 우리 돈 11 4천원이니, 그 기준의 연간 소득은 1200달러에 불과하다. 4인 가족에 두 사람이 돈을 번다고 해도 연 수입은 270만원을 조금 넘을 뿐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물가는 결코 울나라의 1/10 이나 그 이하가 아니다.

 

와중에 30년간 집권했던 무바라크 일가는 최대 7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78조에 달하는 재산을 모았다니 전두환 노태우의 3,4천억 비자금은 여기에 비하면 참으로 소박한 수준이다(그들을 비호하는 것 아니니 오해 말자). 공식적인 대통령 월급이 150만원이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게 다 횡령, 뇌물, 독점, 담합, 리베이트의 결과라는 건 안 봐도 비디오다.

 

이런 엄청난 부패 하에서라면 일반 국민들은 아무리 일해도 풍족하게 살 수 없다. 그런 그들에게 우원 같은 여행객들, 실제로 돈은 많지 않았지만 여하튼 잘 사는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의 존재는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의 지푸라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피라밋에서 낙타 안타겠다고 했더니 한국 동전이라도 있냐며 적선을 요구했던 초로의 이집트 가장, 열패감과 민망함 속에서도 그 말을 해야만 했던 그의 처지가 드디어 이해되는 거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정부가 바뀐다고 사람들까지 변하겠냐고? 그럴 거다. 카이로 대통령궁 앞에서 취재 중 무바라크 퇴임 소식을 들은 미국 ABC 특파원 테리 모란의 말을 들어보면 이해가 될 거다.

 

이집트 국민들은 단지 이 나라의 정치와 정권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바꿨고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목도한 그들의 기쁨의 진정한 원천이었다.

 

글타. 우원이 어렴풋이 느꼈던 자신들의 뒤틀린 모습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거다. 이 시민혁명은 스스로를 모멸의 고리에서 해방시키는 과정이었던 거다. 압제로부터의 해방, 정권으로부터의 해방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책임과 명예를 지닌 자유인으로서.

 


이제 우원은 이집트에 다시 가고 싶다.

 

그 두달 새에 역사의 현장이 된 타흐리르 광장의 아스팔트를 밟으러.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한층 밝아진 얼굴들을 지켜보러. 지난 번 만났던 이들에게 혁명에 대해 물어보러. 그들의 자랑스러운 무용담과 앞으로의 비전을 들으러.

 

처음부터 모든 게 송두리째 바뀌진 않을 거다. 허나 거대한 각성과 변화의 흐름, 희망의 빛은 분명 거기에 있다. 우원뿐 아니라 이번 혁명을 목도하고 응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거다. 테리 모란이 전한, 시위에 참여했던 한 청년의 목소리에서처럼.


나는 해외에 나갈 때 마다 이집트 여권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이집트인입니다. 자랑스러운 이집트인입니다...!

 

미안하다 오해해서. 고맙다 이겨줘서.

 

 

트위터: patoworld

http://www.ddanzi.com/news/570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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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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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론직필 | 작성시간 11.02.19 펌글의 경우 출처 링크 주소를 반드시 남겨 주세요.
  • 작성자털파리 | 작성시간 11.02.19 이집트인의 고통이 당장은 끝이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뭔가을 이루었다는 자긍심은
    자신들을 기쁘게 만들고 동질감을 같고 있는 국가에겐 희망을 .
    .바라보는 우리도 뿌듯하고 가슴이 아려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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