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난번에 간단히 몇자 올린 글을 다시 전문 번역하여 올립니다.
중국인이 평양에서 본 내용과 자신이 알고 있는 북한에 대한 지식을
간략하게 기술한 내용입니다.
사실확인없이 온갖 악의적인 보도내용을 매일매일 도배하다시피 보도하는
남한의 보수언론보다는 훨씬 사실에 근접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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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반도의 정세가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지만, 평양은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차분하고 명확하게 표명한다 : 조선은 모든 정력을 경제건설에 집중해야 하며, 따라서 평화적 환경이 필요하다, 언론매체 뿐만 아니라 시내 전경을 보면 조선은 마치 단호하게 고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집행해 나갈 거처럼 보인다. 즉, “전쟁 전야에도 건설해야 한다”
군사보다 경제를 더 많이 시찰
조선은 2011년에 국내 핸드폰을 전부2G에서3G 로 전환하기로 계획했다. 현재 조선이 사용하는 3G 통신표준은 유럽표준으로 이것은 중국련통이 채택하고 있는 표준과 같은 것이다. 3G이동통신업무를 대대적으로 발전시킬 결심은 조선의 강성대국 건설에 중요한 임무다. 조선의 목표는 2012년 강성대국 대문을 열기 이전에 이동통신 네트워크 전국망을 완성하여 이동통신 가입자 100만명을 달성하는 것이다.
조선이 설정한 발전목표는 2012년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에 강성대국 대문을 여는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조선은 이미 군사대국, 정치대국, 사상대국을 이미 달성했다. 유일하게 완성하지 못한 것은 경제대국 건설이다. 이 때문에 경제발전은 조선이 최종적으로 실현해야 할 “강성대국”의 최후 중요 임무가 되었다.
2010년 거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표대회에서 당의 영도 및 선군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 경제발전, 민생개선이 중요 의제가 되었다. 김정일이 재차 조선노동당 총서기에 당선되었고, 젊고 경제를 잘 아는 간부가 중앙 또는 지방행정 요직에 충원되었다. 예를 들면, 신임 평양시 서기 문경덕은 53세로 김일성 종합대학 정치경제학을 졸업하고 장기간 경제업무에 종사했다. 이외 중점 광공업기업에서는 경제성적이 간부들의 상하이동의 중요 지표가 되었다.
김정일은 친히 언제나 지방 및 군대 시찰을 했다. 2009년,김정일은 군대시찰, 군대공연관람 등이 전체 시찰의 2/3이상이다. 2010년 오히려 반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경제부문 및 경제단위에 할애했다. 그 중 탄광, 발전소 등 국가대형기초건설을 포함하여 백화점, 닭·오리·육류·어류 등의 가공공장 기지, 호텔 등 보통 군중들의 일상에 관련된 민생부문, 그리고 신발공장, 양말공장, 화장품 공장 등 일용 경공업 생산품 생산 부문 등이다.
2010년초 조선의 3대 신문사 연합 사설에서 제기한 구호는 “창당 60주년인 올해 대대적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발전시켜 인민경제생활의 전환점이 되는 해를 만들자”다. 이후,국가는 모든 직종을 위해 300여개의 열의를 북둗우는 구호를 제정하였는데 그 중에서 200여개가 경제건설에 관련된 것이다. 조선은 현재 유행하는 어휘들 모두 경제와 관련 있다. 예를 들면 첨단 돌파, 지식경제시대 등. 전산기기, 프로세스 설계 등은 이미 조선 청년의 인기 있는 전공이 되었다.
김정일은 시찰때, 기업의 현대화 수치제어화 작 또한 요구했다. 기술인력이 두뇌전과 기술전을 진행하고, 첨단기술 수단을 운용하고, 새로운 기술관리 및 설비관리 등을 도입하는 것을 격려했다. 기업이 새로운 유형의 운영개념의 채용 및 경영전략 제정하도록 요구하며, 실리주의 원칙 등을 강조했다.
경제정책의 변화
김정일은 2010년에 2차례 중국을 방문했는데, 중간의 시간 간격은 4개월에 불과했다. 조선의 각종 매체는 그의 방중일정을 충분히 보도했다.
조선노동당 당기관지 《노동신문》은 평일 일반적으로 6면 발행하는데 김정일의 방중소식 보도에는 10 내지 12면을 사용했다. 대부분은 사진이며, 대부분의 사진은 모두 중국의 공장, 기업 혹은 거리풍경이었다. 대련의 휘황찬란한 가라오케 사진도 몇 장 있었다. 조선의 기자들은 또 중국의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의 성과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조선의 경제정책은 정세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조정이 이루어졌다. 김일성시대,조선은 중공업우선과 자력갱생 전략을 실행했다. 20세기 70년대의 전세계적 경제위기는 조선에도 파급되었다. 한편으론 수입원유가격의 상승, 다른 한편으론 수출상품인 금속원료 가격의 폭락으로 조선의 중공업 우선전략은 큰 장애에 부딪혔다. 。
20세기 90년대초, 김일성은 ‘경공업, 농업, 무역제일주의”의 혁명적 경제전략을 제출했다. 비록 초기 희망은 좋았고, 방향 또한 정확했으나, 오히려 국제환경의 악화로 계속 추진할 수 없었다. 김정일 시대의 조선은 부득불 군대우선, 경제와 정치의 병진의 “강성대국전략”으로 전환했다. 즉 한손으론 안전을 지키고, 다른 한손으론 건설을 하는 것이다.
현재,조선은 어떻게 개혁, 발전, 안정의 3자관계의 균형을 맞출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국내정권 측면에서 볼 때 경제 발전은 조선의 미래에 상당한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은 시장요소의 증가와 활력을 가져오며, 개혁의 수요를 동반한다. 따라서 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선은 반드시 개혁과 안정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신도시 및 신시장
평양시내의 관찰을 통해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새로 실시한 야간조명 공정은 그 중의 하나다.
이전에는 단지 만수대 김일성 동상과 주체사상탑 등 주요 건축물에만 조명불이 밝혀지고, 거리의 가로등은 항상 한쪽만 불이 들어왔다. 2010년 여름 이후에는 시내 주요 건축물 모두에 조명이 밝혀졌으며, 밤이되면 시내 중심지인 김일성광장 주변의 인민대학습당, 만수대 극장, 천리마거리의 평양체육관, 스케이트장, 대동강변의 옥류관 등 전체가 훤하고 반짝반짝 빛난다. 길가의 선전물도 조명간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겨울에 들면 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야간조명 공정은 중점 건물만 계속 할 수 있다.
도시미화 정책은 계속 추진되고 있다. 2010년12월 상순,평양에서 전국원림녹화설계 방안 전시회가 열렸다. 조선 전국의 건설 설계원의 250개의 설계 방안 및 조형물이 제출되었다. 평양의 10세대 주민 살림집이 현재 기세등등하게 진행되고 있다.
2009년말,조선은 갑자기 역사상 제5차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시장 미 금융체계에 큰 동요가 조성되었다. 신속한 급제동으로 화폐 및 외환유동성의 엄격한 통제, 시장 휴장 강행, 시장안정을 추진했다. 1년이 지났고, 시장은 이미 복원되었고, 각종 경제활동은 더 활력적인 상태가 되었다.
평양시 평천구 등 주민 집중구역에는 2-3개 대형 농산물 무역시장이 새로 건설되었다. 시장내에는 물건이 풍부한데, 야채 및 과일, 수산품 및 가금류 등은 현지에서 생산된 것이다. 일상생활 용품 및 육류식품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도로변의 식품 및 사료 등을 파는 노점상도 많이 증가했다.
평양기차역 앞은 한쪽은 식품노점이고 한쪽은 도로인데, 길모퉁이에 있는 간이 가옥에는 사람들로 북적되고 있다. 판매하는 물건은 간단한데, 설탕을 묻힌 기름떡으로 먹어보면 고향의 맛이 느껴진다. 그러나, 가격은 하나에 화폐개혁 이전의 50원에서 120원으로 올랐다. 보통 조선사람 월급의 1/20과 비슷하다. 설령 이와 같더라도 기름떡 노점상 장사는 아직 잘되는 편은 아니다.
몇몇 음식점이 신장개업 또는 재개업했다. 음식점안의 인테리어 자재 및 가전제품은 “메이드 인 차이나”다. 김정일은 새로 확대한 조선요리 전문점 옥류관, 중국요리 전문점 향만루를 잇달아 시찰했다. 시민들이 가는 음식점이 많은데, 이중에는 전문적인 중식 샤브샤브집도 있다. 비교적 공간이 넓은 음식점에는 노래방시설이 모두 있다. 원래는 무료였으나, 지금은 약간의 비용을 받고 있다. 필요한 것은 바로 시장에 있다. 조선사람들이 장사하는 사업종류가 가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글 왕무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