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 Of Their Lives (North Korea/Football Documentary)
Published on Mar 28, 2013
(1시간 26분)
위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지만......
1966년 월드컵에 출전했던 북한 축구선수들의 기량과
전술이 매우 놀라운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군요.
그리고 당시 쏘련 선수놈들이 아주 야만적으로
몸으로 부딪혀 밀어부쳤군요.
당시 북한 선수들의 평균신장은 고작 165 cm 밖에 안되었다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 북한 골키퍼의 이탈리아 전 선방 실력은
신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북한 선수들이 포르투갈과의 경기 전날 사창가에 가서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둥 하는 소리들은 아마도
북한을 폄하하기 위해 누군가가 조작해낸 개소리로 생각됩니다.
위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의 선수들이 그 때의 일에 대해서
얼마나 허심탄회하게 증언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대부분 살아 있군요.
적어도 70대 중반은 되었을텐데도 말입니다.
그들 중에는 군 고위장성들도 있는가 보더군요.
그런 사람들이 수용소에 끌려갔다는 둥 헛소리는
아마도 남측의 일부 찌라시들이 조작해낸 썰에 불과하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추가 정보
[김일성대 출신 주성하 기자의 북한 잠망경 ⑥]
북한팀의 8강 진출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조에 소련, 칠레, 이탈리아라는 당대의 강호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 이 중 전설의 골키퍼 야신이 버티고 있던 소련이 최대 강호였다. 소련은 예상대로 이 조에서 북한과 이탈리아를 제압하고 조 1위로 올라갔다. 소련은 이후 준결승에서 서독에 패배했는데, 소련이 서독에 패배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이변이었다. 서독은 소련 선수 2명이 퇴장당한 뒤 당대의 축구영웅 베켄바워를 앞세워 가까스로 2-1로 이겼다.
소련은 첫 경기에서 북한을 3-0으로 이겼다. 스코어만 보면 북한의 완패였지만, 실제론 북한 수비수들이 엄청난 신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공격을 매우 인상적으로 막아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마지막 골만이 소련이 북한 수비를 완벽하게 뚫은 최초이자 최후의 골’이라고 평가했다. 미들즈브러 사람들은 북한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 다음 경기인 칠레 전에는 더 많은 팬이 축구장을 찾아 북한을 응원했다.
칠레도 1962년 월드컵 3위에 오른 강팀이었다. 최종 스코어는 1-1이었지만 슈팅수를 보면 16대 9로 북한이 우세한 경기였다.
이탈리아와의 경기는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였다. 북한은 소련과 칠레전에서 주전 공격수들이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두익의 골로 1-0으로 이겼다. 예선 탈락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귀국해서 썩은 달걀 세례를 받아야 했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01/07/201001070500010/201001070500010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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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의 최대 이변은 북한이 이탈리아를 격파한 사실이다. 본선대회에 처녀 출전한 북한이 두 번이나 우승한 바 있는 이탈리아를 1대0으로 눌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제일 수비가 강한 팀으로 꼽히던 때였다.
이는 역시 본선에 처녀 출전한 포르투갈이 2회 연속 우승한 전력이 있는 브라질을 3대1로 이긴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브라질 팀에는 펠레가 있을 때다. 북한의 돌풍은 에우제비오가 속한 포르투갈에 역전패하면서 끝났지만 북한 축구가 세계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북한팀은 본선 참가국 16개국 가운데 가장 먼저 잉글랜드에 왔다. 그러나 체육상 김기수를 단장으로 한 65명의 대규모 선수단은 주최국에서 지정해준 호텔을 네 군데나 거부하고 경기장 근처 선더랜드의 미들스보러 교외에 있는 미완성 호텔에 자리잡았다. 뿐만 아니라 선수의 외출을 아예 금지했고 철저한 단체생활을 했다. 자신들의 연습장면은 절대로 공개하지 않으면서 현지 카메라맨을 고용해 그들이 상대할 팀인 소련, 칠레, 이탈리아의 연습장면을 찍어오게 했다. 칠레의 연습장면을 몰래 찍다 들킨 카메라맨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주최국과 언론, 그리고 북한팀과 상대할 나라들은 북한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3년 간 계속 훈련해왔고 평균 신장 165㎝에 주력이 뛰어나며 선수 전원이 미혼인 팀이다』
이런 사실 외에 더 이상 취재하지 못한 언론은 북한팀을 두고 「비밀에 싸인 팀」 「괴팍한 수수께끼의 팀」이라고 보도했다. 도박사들은 승률 1%의 최약체 팀으로 평가했다.
예선전 첫경기에서 북한이 소련에 3대0으로 지자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예선전 두 번째 경기 상대는 칠레였다. 누구나 칠레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패색이 짙던 북한은 후반 43분 박승진이 동점골을 터뜨려 경기를 1대 1로 끝냈다. 1무1패의 북한은 예선전 마지막 상대로 이탈리아를 만났다. 이탈리아의 예선전 전적 역시 1무 1패. 두 팀은 이 마지막 경기를 이겨야 8강전에 오를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누구나 이탈리아가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북한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북한이 이탈리아를 눌렀다. 전반 35분 이탈리아 불가렐리 선수의 퇴장이 불길한 조짐이었다. 이탈리아 선수의 퇴장은 「동양의 진주」라던 북한 박두익의 독무대를 의미했다. 전반전이 끝나갈 무렵 박두익이 결승골을 터뜨린 것이다.
그 여세는 후반전까지 이어져 북한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추가득점 없이 1대0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탈리아의 완패였다. 이탈리아 팀은 고국 팬들의 폭동이 두려워 사흘 뒤 한밤중에 로마가 아닌 제노아로 몰래 귀국했는데도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다.
8강전인 준준결승전은 브라질을 꺾고 승승장구하는 포르투갈과 북한의 경기였다. 전반 시작 23초 만에 북한의 박승진이 한 골 뽑은 것을 시작으로 북한의 골 행진이 이어졌다. 20분에 이동운, 그로부터 1분 후인 21분에 양성국이 각각 골을 보태 순식간에 3대0이 됐다. 북한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에는 에우제비오가 있었다. 그는 전반 27분, 42분 각각 페널티킥으로 득점하고 후반 12분에도 신들린 듯 골을 넣어 3대3 동점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2분 후인 14분 또 페널티킥을 역전골로 성공시켰다. 그의 4골과 아우구스트의 한 골로 결국 포르투갈이 5대3으로 이겼다.
이는 북한의 경험부족과 자만심, 작전 실패의 결과였다. 그러나 수수께끼팀 북한이 1966년 월드컵에서 바람을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http://ask.nate.com/qna/view.html?n=870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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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를 깨고 아시아 국가 최초로 8강에 진출한 전적이 있다. 이 경기의 결과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잉글랜드가 미국에게 0-1로 진 것과 더불어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포르투갈과의 8강전 전날 단체로 사창가에 갔다가(...)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는 카더라가 있다. 패배 요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들통나 선수진 전원이 정치범수용소로 직행했다고 한다. 박승진 선수는 그나마 살기 좋은 요덕 수용소로 갔다고. "왜 하필이면 경기를 앞두고 그랬느냐"라는 질문에는, "게임이 끝나면 이기든 지든 귀국을 해야 하니 게임 전 밖에 시간이 없으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 경기에서 북한은 포르투갈전에서 3점 차이로 앞서고 있다 내리 다섯 골을 먹으며 역전패했다. 참고로 사창가 갔다는 얘기는 강철환,《수용소의 노래》(200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애초부터 강철환씨의 이 책에서 곁가지로 다루는, 일종의 카더라이기 때문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정보는 아닌듯 하다.)
하지만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는 이 설을 사실상 부인. 사창가가 이유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당시 갑산파를 둘러싼 숙청에 애꿎은 축구선수들이 휘말렸다는 것이고, 실제로 이들 북한 대표팀이 수용소에 끌려간 것도 월드컵 몇 달 후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피파 회장이 공격에는 에우제비오, 수비에는 신영규, 골키퍼에는 야신이라고 극찬한 신영규 선수는 지주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이 발각되어 런던월드컵 이후 일체의 행보를 알 수 없다고. 다만 이탈리아전에서 득점을 기록한 박두익만은 영웅칭호를 받으며 평생 수용소 구경조차 못해봤으며 잘먹고 잘살았다.
그러나 이것도 올바른 정보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의 감독이 촬영한 영화 천리마 축구단을 보면 당시의 선수들이 멀쩡히 살아서 다시 만나는 장면도 나오고, 그들 중 몇몇은 꽤나 고위층으로 출세한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천리마축구단의 선수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당시 우리는 예배당이니 뭐니 그런것 잘 몰랐는데...우리가 원래 우승할 줄을 모르고 주최측에서 예배당에 딸린 숙소를 배정해 놨단 말이예요. 이딸리아 선수들이 묵을 줄 알고. 그 구조가 한가운데에 성모상이 서있고 주변에서 불빛이 아른거려서 숙소 어디에서든 성모상이 보이는 구조였거든요. 그걸 보니까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더라구. 그래서 잠을 설쳤어요.
― 영화 <천리마 축구단> - 당시 선수들의 인터뷰 중
http://mirror.enha.kr/wiki/%EB%B6%81%ED%95%9C%20%EC%B6%95%EA%B5%AC%20%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