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이 고려 공민왕 때 명승(明昇)과 진리(陳理)를 보낸 이유는.

작성자청량산|작성시간17.11.26|조회수1,329 목록 댓글 14

고려사 공민왕 편의 내용 중 명(明)의 주원장이 명승(明昇)과 진리(陳理) 고려로 보냈고, 

고려 조정에서는 명승에게 대신의 딸과 혼인케 하여 잘 살 수 있도록 해줬다는 대목을 들어

고려와 명 주원장의 관계에 대해 기존과 다른 주장을 하는 글이 있다.


즉, 이 대륙고려설 주장자는 명승과 진리를 명나라 주원장이 고려로 보낸 것은 

자신 즉 주원장이 이들을 함부로 처리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며, 주원장이 토벌한 것은 

중조(중앙 조정 즉 고려)의 명(命)으로 토벌한 것이며, 중조(고려)의 명(命)으로 잠시 주원장이 데리고 

있다가, 이들의 처리 명령을 받고 고려의 황도로 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아래는 그 글의 일부이다.

 

여기 대륙 고려가 있다.


(1) 高麗史43卷-世家43-恭愍王

 

 右丞相汪廣洋又致書曰: " 因元政不綱群雄 起各擁兵衆分據土疆. 我聖上乘時啓運奮興?淮右肇基江左命將四征削平群雄. 陳友諒竊據湖湘妄稱大漢明貞據有川蜀僭號大夏. 是以,聖上統御六師親臨湖廣. 其陳氏勢窮力屈率衆就降. 去年春命中山侯穎川侯等摠率師旅水陸 進直川蜀. 明氏力不能* {支}* {銜}璧請命. 皆已欽蒙聖恩特加赦宥保全其生然揆之以理不可使久處京師,今令各將家屬,往王國閑居,如可則留之,其不可則仍發廻還! 尙冀裁度."

 

* 冀기는 王畿왕기=京畿경기를 뜻한다.

 

高麗史43卷-世家43-恭愍王6-21-37-1372

 


 乙丑陳理明昇等男婦共二十七人入京. 理昇詣闕. 王出御報平廳. 理昇拜于階上王坐受之. 禮訖坐於使臣之下. 昇年十八,理年二十二.

 


▲ 이 기록의 “明昇명승”은 대륙 사천성에서 “大夏대하”를 건국한 명옥진의 아들이다. 주원장이 이를 토벌하고 이들을 고려로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明史명사”의 기록에도 있다. 과연 고려와 주원장의 관계는 무엇인가 ? 다음 기록에는 명승을 고려에서 중신의 딸과 혼인까지 시킨다는 것이다. 즉

 


▲ (高麗史44卷-世家44-恭愍王7)에 “辛卯明昇娶摠郞尹熙宗女. 王賜米四十石布一千匹”.

 (明史,列傳第十一, 陳友諒 張士誠 方國珍 明玉珍편을 보면 “陳友諒진우량”편을 보면 “洪武五年,理及歸義侯明升?徙高麗” 이라 했고, 明玉珍명옥진편을 보면 (중략) “明年徙升於高麗”。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주원장은 진우량의 아들 및 명옥진의 아들(황제를 칭)과 그 휘하 가족들을 모두 고려로 보내 살도록 했으며, 고려 조정에서는 그 아들에게 대신의 딸과 혼인케 하여 잘 살 수 있도록 해줬다는 말이다.

 

 명사 본기를 보자. 四年(홍무). 秋七月辛亥 , 徐 達 練 兵 山 西 。辛 酉 ,傅 友 德 下 成 都 ,四 川 平 。乙 丑 ,?明 昇 至 京 師 ,封 歸 義 侯 라 했고, “五 年 春 正 月 乙 丑 ,徙 陳 理 、明 昇 於 高 麗” 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명승은 경사에 이르렀다. 귀의후에 봉하여 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글에서 “경사”란 어느 나라의 경사였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http://pann.nate.com/talk/115303017


고려 공민왕 시대는 대륙의 원명(元明) 교체기이다. 

위 글에서 인용한 고려사 대목(高麗史43卷-世家43-恭愍王)은 공민왕 21년 1372년의 일이다.


이미 그 몇해 전에 명(明)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중국대륙 에 명(明)을 세운 것을 알렸고, 

고려는 나중 명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낸 바 있다. 고려가 元 대의 연호사용을 그만둔 이후이기도 하다.


위 대목의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1372년 5월 17일 계해

명(明) 우승상이 옛 원 관리의 본국 거주를 요청하다  


우승상(右丞相) 왕광양(汪廣洋)이 또한 글을 보내 이르기를,


“과거 원(元)의 정치가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하자, 군웅(群雄)들이 아울러 일어나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국토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시운을 타고 회수[淮]의 서쪽에서 발흥하고, 장강[江]의 동쪽에 터를 잡고, 사방으로 정벌[四征]을 명하여 군웅들을 평정하였습니다. 


진우량(陳友諒)은 가만히 호상(湖湘)에 웅거하고는 망령되이 대한(大漢)을 칭하였고, 명정(明貞)은 천촉(川蜀)에 웅거하면서 참람하게 대하(大夏)를 칭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성상께서는 육사(六師)를 통솔하여 친히 호광(湖廣)에 다다랐는데, 그 진(陳)씨의 세력이 약해져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였습니다. 작년 봄에 중산후(中山侯)·영천후(穎川侯)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수륙으로 아울러 나아가 천촉(川蜀)을 공격하게 하니, 명씨(明氏)는 힘이 능히 지탱할 수 없어 항복을 청했습니다. 모두 이미 성은을 입어 특별히 사면되어 그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그러나 다스리는 이치 때문에 오래도록 경사(京師)에 머물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각각 가족을 이끌고 고려에 가서 한가로이 머물게 하였으니, 만일 가하다면 머물게 하고, 그렇지 않다면 돌려보내길 바랍니다. 잘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右丞相汪廣洋又致書曰, “曩因元政不綱, 群雄並起, 各擁兵衆分據土疆. 我聖上, 乘時啓運, 奮興淮右, 肇基江左, 命將四征, 削平群雄. 陳友諒竊據湖湘, 妄稱大漢, 明貞據有川蜀, 僭號大夏, 是以, 聖上統御六師, 親臨湖廣, 其陳氏勢窮力屈, 率衆就降. 去年春, 命中山侯·穎川侯等, 摠率師旅, 水陸並進直擣川蜀, 明氏力不能支㗸璧請命. 皆已欽蒙聖恩, 特加赦宥, 保全其生, 然揆之以理, 不可使久處京師, 今令各將家屬, 往王國, 閑居, 如可則, 留之, 其不可則, 仍發廻還. 尙冀裁度.”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4%B8%96%E5%AE%B6&types=r#articleList/kr_043r_0020_0050



위 대목은 진우량(陳友諒)의 대한(大漢)과 명정(明貞)의 대하(大夏)를 무너뜨린 명(明)이 이들에 사은을

베풀어 목숨을 살려주었으나, 명의 수도인 경사(京師)에 반란 수괴들을 둘 수는 없는 이치로 중국의 변방에

해당하는 바다 건너 고려에 보낼 것을 고려에 청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대륙도 아니고, 바다건너 고려에 이들을 보내고자 한 것은 이들이 세력을 다시 규합해 반란을 꿈꾸지

못하도록 아예 고립시키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 우승상(右丞相) 왕광양(汪廣洋)의 서신과는 달리 실제로는 진우량(陳友諒)의 아들 진리(陳理)명정(明貞)의 아들 명승(明昇)과 식솔들만 고려로 보내온 것은 이들이 인질의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승이 중국에서 귀의후(歸義侯)에 봉해졌다고는 하나 이는 반란의 꿈을 못꾸게하려는 당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란 수괴에 해당하는 진우량과 명정은 이들과는 달리,중국의 다른 변방으로 유폐시키듯 보내어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명승과 진리 일행을 고려 조정에서 잘 대접한 것은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상국인 명(明)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명에서 봉(封)한 직위를 가벼이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1372년  5월 19일 을축

진리와 명승 등이 입경하다 


을축 진리(陳理)·명승(明昇) 등이 남녀 27인과 함께 개경에 들어왔다. 진리·명승이 궁궐에 들어갔다. 왕이 보평청(報平廳)에 나오니 진리와 명승이 계단 위에서 제배하고 왕이 앉아서 받았다. 예를 마치고 사신의 아래에 자리했다. 명승의 나이 18세이고, 진리는 22세였다.

 

 乙丑陳理明昇等男婦共二十七人入京. 理昇詣闕. 王出御報平廳. 理昇拜于階上王坐受之. 禮訖坐於使臣之下. 昇年十八,理年二十二.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4%B8%96%E5%AE%B6&types=r#articleList/kr_043r_0020_0050



명은 이 일이 있기 3년 전에 이미 중국 대륙에 명(明)을 세웠음을 고려에 사신을 통해 친서를 보내 알려왔었다.


1369년 4월 28일 임진

명 황제가 친서를 보내다 


임진 명[大明] 황제가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를 보내어 새서(璽書) 및 사라(紗羅)와 단필(段匹) 총 40필(匹)을 하사하니, 왕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숭인문(崇仁門) 밖으로 나가 맞이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대명황제(大明皇帝)가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서신을 보냅니다. 송(宋)이 통제력을 잃고부터[失馭] 하늘이 그 제사를 끊어버렸으며, 원(元)은 우리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닌데 천명(天命)을 받아 중국(中國)에 들어와 주인이 된 것이 100년이 넘었습니다. 하늘은 그들이 어리석고 음란한 것을 싫어하여 또한 그 운명을 죽여 끊어버렸으니, 화이(華夷)가 어지러워진 지도 18년이 되었습니다.


군웅(群雄)들이 처음 봉기하였을 때 짐은 회수(淮水) 서쪽에 살던 평민이었는데, 갑자기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이 들이닥쳐 잘못 그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가, 하늘의 신령의 도움을 받아 문무(文武)의 인재들을 얻고 동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너가서 양민(養民)하는 도리를 익힌 지 14년째입니다. 그 사이에 서쪽으로는 한(漢)의 임금인 진우량(陳友諒)을 평정하였고, 동쪽으로는 고소(姑蘇)에서 오왕(吳王)을 붙잡았으며, 남쪽으로는 민월(閩越)을 평정하고 팔번(八蕃)을 토벌하여 평정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오랑캐의 임금을 쫓아버림으로써 중국[華夏]을 깨끗이 바로 잡고 우리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습니다.


올해(1369년) 정월에 신민(臣民)이 추대하였으므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다스리는 나라 이름을 대명이라고 정하고, 연호(年號)를 세워 홍무(洪武)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사방의 오랑캐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므로, 서신을 써서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고려로 들어가게 하여 왕에게 알려 이를 알도록 합니다.


옛날 우리 중국의 임금은 고려와 영토를 서로 접하고 있었으므로 그 왕은 혹 신하가 되거나 또는 빈객(賓客)이 되었으니, 대체로 중국의 풍교(風敎)를 사모하여 살아있는 백성들[生靈]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늘이 그 덕(德)을 살펴보았으니 어찌 영원히 고려에서 왕이 되지 않게 하겠습니까? 짐은 비록 덕이 중국의 예전 현명한 왕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사방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복속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천하에 두루 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설사가 작년 11월에 금릉(金陵)을 출발하였으나, 바닷길이 험난한 관문이었으므로 이때가 되어서야 왔다. 설사는 바로 설손(偰遜)의 동생이다.


壬辰 大明皇帝, 遣符寶郞偰斯, 賜璽書及紗羅·段匹摠四十匹, 王率百官, 出迎于崇仁門外, 其書曰, “大明皇帝, 致書高麗國王. 自有宋失馭, 天絶其祀, 元非我類, 天命入主中國, 百有餘年. 天厭其昏滛, 亦用隕絶其命, 華夷擾亂, 十有八年. 當群雄初起時, 朕爲淮右布衣, 忽暴兵疾至, 誤入其中. 見其無成, 憂懼不寧, 荷天之靈, 授以文武, 東渡江左, 習養民之道, 十有四年. 其閒, 西平漢主陳友諒, 東縛吳王於姑蘇, 南平閩越, 勘定八蕃, 北逐胡君, 肅淸華夏, 復我中國之舊疆. 今年正月, 臣民推戴, 卽皇帝位, 定有天下之號曰大明, 建元洪武. 惟四夷未報, 故修書遣使, 涉海洋, 入高麗, 報王知之. 昔我中國之君, 與高麗, 壤地相接, 其王或臣或賓, 盖慕中國之風, 爲安生靈而已. 天監其德, 豈不永王高麗也哉? 朕雖德不及中國之先哲王, 使四夷懷之, 然不可不使天下周知.” 斯以去年十一月, 發金陵, 海道艱關, 至是乃來, 斯卽遜之弟也.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4%B8%96%E5%AE%B6&types=r#articleList/kr_041r_0050_0040



이에 대해 고려도 1369년 5월 11일에 명 황제의 즉위를 하례하고, 사신 파견에 대해 사의를 표한다.
금릉(金陵)은 명의 전반기(1368~1421) 수도인 남경(南京 난징)의 옛이름이다. 

1369년 5월 11일 갑진
명 황제의 즉위를 하례하고 사신 파견에 대해 사의를 표하다  

갑진 예부상서(禮部尙書) 홍상재(洪尙載)와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 이하생(李夏生)을 보내어 금릉(金陵)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려 등극(登極)을 하례하게 하고, 이어서 사례하게 하였다. 그 표문에 이르기를,

“도록(圖籙)의 예언에 부응하여 다시 중국 황제의 정통을 회복하시고, 선한 덕을 체득하시어 올바름에 거처하심으로써 여러 나라에 있는 신첩(臣妾)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셨으니, 크나큰 천명이 귀속되어 사람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두루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황제폐하의 문덕(文德)과 광명(光明)은 순(舜) 임금보다 뛰어나며 용맹과 지략은 탕(湯) 임금을 넘습니다. 우레가 몰아치고 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이 무력으로 전란을 평정하시는 커다란 업적을 이루셨으며, 옛 나라를 없애시고 새 나라를 세우셔서[鼎新革古] 위대한 국호를 일으켜 창업하여 자손에게 전하시니, 제도[典章]와 문물이 찬연하게 빛나며 중국[華夏]과 이민족[蠻貊]들을 모두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신(臣)은 멀리 동쪽 바깥에 거처하고 있으므로 북쪽만을 멀리서 우러러보고 있는데, 비록 하례를 드리는 반열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있지만 항상 간절한 정성[蘄傾之懇]만은 바치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甲辰 遣禮部尙書洪尙載, 監門衛上護軍李夏生, 奉表如金陵, 賀登極, 仍謝恩, 其表曰, “秉籙膺圖, 復中國皇王之統, 體元居正, 同萬邦臣妾之心, 景命有歸, 懽聲旁達. 皇帝陛下, 文明邁舜, 勇智躋湯. 雷厲風飛, 集大勳於戡定, 鼎新革古, 熙洪號以創垂, 典章文物之粲然, 華夏蠻貊之率俾. 臣邈處東表, 顒望北辰, 雖未叅稱賀之班, 願恒貢蘄傾之懇. (邈 멀 막/ 表  바깥 표)


다음달인 5월말~6월초 경에는 명 주원장이 우리 백성들을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낸다.

1369년 6월 4일 병인
명 황제가 우리 백성들을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내다  

6월 병인 황제가 환관[宦者] 김려연(金麗淵)을 파견하여 글을 보내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작년 겨울에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어 중국(中國)을 평정하여 편안히 만든 사정을 모두 알려주게 하였는데, 도착한 지가 이미 오래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또한 진(晋)과 기(冀) 지역을 평정하고 진(秦)과 농(隴) 땅까지 미치게 됨으로써 삶을 이어가는 민(民)들이 조금 휴식의 시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유연(幽燕) 지역의 민들을 이주시켜 남쪽으로 와서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는데, 그중에 고려(高麗)의 민이 165명 있었으니 어찌 고향과 골육(骨肉)에 대한 생각이 없겠습니까? 짐(朕)은 이를 매우 가엾게 여겨 즉시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배를 갖추게 한 다음 사신을 파견하여 〈이들을〉 호송해 동쪽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습니다. 마침 내사감승(內使監丞) 김려연이 곁에 있었는데 김려연 또한 고려 사람으로, 일찍이 집에 늙으신 어머니가 있는데 오랫동안 뵙지 못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으므로, 짐이 그의 마음을 헤아려 그 호송을 담당하도록 하고, 아울러 모친을 찾아뵙고자 하는 소원을 풀도록 하게 합니다. 이와 더불어 사라(紗羅) 각 6필(匹)씩을 가져가게 하니, 예물과 서신이 도착하면 받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六月 丙寅 皇帝遣宦者金麗淵, 致書曰, “去年冬, 專使涉海, 具述安定中國之由, 諒達已久. 繼又削平晋冀, 以及秦隴, 生民庶有休息之期矣. 比移幽燕之民, 南來就食, 內有高麗民百六十五人, 豈無鄕里骨肉之思? 朕甚憫焉, 卽命有司具舟, 欲遣使護送東歸. 適內使監丞金麗淵在側, 麗淵亦高麗人, 嘗言家有老母, 久不得見, 朕念其情, 就令其行, 幷遂省親之願. 仍齎紗羅各六匹, 侑緘至可領也.” (涉  건널 섭)



명황제는 그 이듬해인 1370년에는 도사를 보내 고려의 산천 신령들에게 제향을 지내게 하기도 한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명이 가지고 있는 지위 때문일 것이다. 해당 내용을 보면, 고려가 대륙이 아니라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370년 4월 22일 경진
명 황제가 도사를 보내 산천 신령들에게 제향을 지내게 하다  hoi

경진 〈명〉 황제가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를 파견하여 산천에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축문(祝文)에 이르기를,

“황제가 조천궁(朝天宮)의 도사인 서사호를 파견하여 고려의 으뜸가는 산[首山] 및 여러 산의 신(神), 
으뜸가는 물[首水] 및 여러 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노라. 

고려라는 나라는 바다 동쪽에 위치하여 산세가 드높고 물의 기운[水德]이 넓고 크다. 실로 모든 신령스러운 기운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국토가 안녕 될 수가 있고 나라의 임금은 대대로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중국을 존경하고 사모함으로써 삶을 영위하는 민[生民]들을 보호하고 신(神)의 공덕은 커졌도다. 

짐은 평민의 신분[布衣]으로부터 일어나 지금 천하를 하나로 아우름으로써 정통(正統)을 계승하였다. 최근 고려가 표문(票文)을 바치고 신하임을 칭하니짐은 그 성의에 대해 기뻐하며 이미 왕의 작위로 책봉하였다. 고전(古典)을 상고해보면, 천자는 산천의 제사에 있어서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사신을 파견하여 공경을 다하여 희생과 예물을 가지고 그 제사를 지냄으로써 신령에게 보답하려고 하니 신령은 살펴주소서.”
라고 하였다.

庚辰, 帝遣道士徐師昊來, 祭山川, 祝文曰, “皇帝遣朝天宮道士徐師昊, 致祭于高麗首山及諸山之神, 首水及諸水之神. 高麗爲國, 奠于海東, 山勢磅礴, 水德汪洋. 實皆靈氣所鍾, 故能使境土安寧, 國君世享富貴. 尊慕中國, 以保生民, 神功爲大. 朕起自布衣, 今混一天下, 以承正統. 比者, 高麗奉表稱臣, 朕喜其誠, 已封王爵.考之古典, 天子於山川之祀, 無所不通, 是用遣使, 敬將牲幣, 修其祀事, 以答神靈, 惟神鑑之.”

(奠  전-(터를)정하다(定--))



고려사의 전체 내용이 아니라도 , 관련 대목만 흞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확대해석하거나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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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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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온마루 | 작성시간 17.11.26 역사를 창조하시려는 분들은 먼저 진실이 과연 무엇일까를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조상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렸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건지 묻지 않을수 없네요
  • 답댓글 작성자청량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1.26 그러니까요...

    외견상일 수 있겠지만, 현재 남한의 민주주의는 촛불혁명을 통해 민주정부를 내세움으로써 거의 세계를 선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력도 세계 10위권에 들어갑니다. 한미동맹이라는 수직적 예속동맹에 묶여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전작권도 회수하고 주한미군도 철수하게 되겠죠.

    북한같은 경우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야기할 정도의 핵강국이 되었습니다. 쇼맨십이 강하기는 하지만 어떨 때는 깜짝놀랄 정책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는 허경영은 북한을 <초강대국>이라고 표현하더군요. 군사력 부문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경제를 외국의 어느 학자는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선진경제 (poorest advanced economy in
  • 답댓글 작성자청량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1.26 the world)" 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일본의 동북아시아경제연구소 미쓰히로 미무라 선임연구원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노동집약적 산업 부터 자본집약적 산업을 포함하는 종합적 생산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못살긴 하지만 말이죠.

    http://www.38north.org/2017/09/jbaron090717/

    북한은 그러니까 여건만 갖춰지면 잘사는 선진 경제에 진입할 기본적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남북이 서로 시너지효과를 낸다면, 현재 남북의 각각의 경제규모와 성장률은 개별적 발전을 이룰 때보다 훨씬 성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일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지겠죠...

  • 답댓글 작성자우전 | 작성시간 17.11.27 강단 사학자들이 이병도 제자인 김원룡 제자들..현재 5세까지 새끼를 쳐서
    70년간 왜곡된 자료를 가지고 역사를 가르치고 있겠지요
    중요사실은 전부 거짓역사라 보면 맞겠지요
    또 뉴라이트 학자와 사회 지도층 뉴라이트 회원들도 친일파들..

    자한당.바른당 80%는 한국인으로 개명한 왜놈 후손이거나 친일파라고 봅니다
    민주당일부와 국민당도 마찬가지겠지요
    철수도 친일파 자손
    제인 부친도 일제시대 북한에서 공직에 근무했는 모양
    지배층 1%중에 80%는 왜놈 자손이거나 친일파라고 봅니다
    적폐청산도 시간만 끌다가 꼬리 자르고 끝낼지 모르지요

    왕조실록 외에 지리지..기타 중요 역사서는 전부 왜곡 했다고 봅니다
    원본공개후 다시필사해야
  • 작성자강촌인 | 작성시간 17.12.08 공민왕 때면 주중팔의 명왕조가 안정이 되지 않아
    배원세력인 공민왕조를 안아야지요
    조선조에 들어 주중팔이 이성계의 기반이 북방이고
    측근 퉁두란(이지란)이 여진인이라
    명왕조의 안정에 북방세외민족의 통합 체제가
    가장 무서웠죠
    그래서 조선 태종때 정도전의 표문을 트집잡아
    태클을 걸었는데
    이때 해명차 "권근"이 갔는데
    시제를 주었는데 제 압록강,고려고경,사경요좌인데
    즉 압록강을 경계로 넘지마라는 소리를 했죠
    더불어 기자봉국을 들먹여 아부했죠(응제시주참조)
    주중팔이 걱정한데로 한200년 됬나
    북방세력 누르하치에게 왕조를 넘겨주었고
    주중팔이 이놈은 1000년을 누리고자 신라의 金尺을
    탐내었기 때문에 태종의 분서가 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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