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눈사람 (외 2편)
김륭
평생을 따라다닌 눈사람이 있다는 걸
어젯밤에야 알았어요.
반려동물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던 여자가 말했고, 나는
거기 있었다.
창신동
반바지 입고 도넛 사러 가는 길
하필이면 슬리퍼를 닮았다. 헐떡이는
숨, 한 계단 두 계단 오래된 그림자 먼저 말아 굴리며
신발 상자처럼 안아보는
골목
또 절벽이 된 나는 괜히 울지도 않는 발바닥을
폰처럼 귀에 붙이고
골목은 착하지 않아도 되지만 절벽은 그러면
안 된다고, 네. 네. 그럼요. 누가 등을 떠밀어도 괜찮아요.
마음은 이미 잘 떨어져 있는걸요.
그, 그런데 잠깐만요.
흙을 덮어준다.
발목까지 내려온 입술 위에 입술 하나 더 눌러놓듯
지금이 무슨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절벽은
언제나 바깥이 아니라
안이어서
가만히 절벽 아래로 던졌다 다시 감아올리는
마음이, 그 마음에 생긴 구멍을 사랑의 얼굴이라고
말해도 되나.
이건 후드득 머리 위에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던진
묘파다!
아시죠? 애인이 새로 생겼다는 소식 너머로
등을 떠밀어 보낸 마음이란 분은 또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질 때마다
자꾸 구부러지는 골목이다.
열리면 절벽이 되는
입술이다.
※창신동은 원래 채석장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건물을 지으면서 화강암 등의 돌을 떼서 가져오면서 절벽이 생겼다. 인간이 만든 절벽이다.
홍시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암이 아니라
변비 때문에 죽겠다고, 제발
똥 좀 나오게 해달라고 시원하게만 나오면
죽어도 좋겠다고,
나는 암 병동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이대로 죽었으면 하고, 애인이 사 온
죽을 먹었다.
그때마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본 것도 같다. 죽기 딱 좋은 가을이었다.
잠깐이라도 우는 것을 멈추면 너무 익어서
움켜쥘 수도 없는,
어떤 마음은 매달려서 익는 게 아니라
죽기 위해 매달린다.
물끄러미 병실 창밖을 내다보는
애인 그림자 밑에 엎드려 또 울었다. 나는
죽은 마음에 이목구비가 생길 때까지
불을 켰다.
—시집 『전업 눈사람』 2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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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와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원숭이의 원숭이』『나의 머랭 선생님』 등,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엄마의 법칙』『내 마음을 구경함』『햇볕 11페이지』 등.